도시목격자 City Witness

작품 줄거리

<도시목격자>는 도시에서 일어난 5가지 일들의 기록을 다시 꺼내 펼쳐 본다. <골리앗의 구조>의 일산 풍동, <모래>의 은마아파트, <두 개의 문>의 남일당, <어떤 점거>의 두리반, <우리는 오늘도>의 아현포차와 우장창창. 여기에는 투쟁하는 사람, 연대하는 사람, 혹은 자본이라는 큰 굴레에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감독들은 같은 공간이지만 이전과 같지 않은 그곳을 다시 찾아간다. 일산 풍동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남일당이 있던 곳은 큰 빌딩이 세워져 위치를 알 수 없게 변했다. 은마아파트 사람들은 이사를 준비한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투쟁했던 두리반은 형체가 알 수 없게 무너져있다. 포차가 즐비했던 거리는 깔끔한 도로와 꽃으로 덮였다. 많은 것들이 바뀌는 도시에서 감독들은 어떤 이야기를 목격했을까.

프로그램 노트

격변하는 도시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던 감독들은, 그 순간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공간과 기억을 되짚는다. 그들이 다시 목격한 공간은 이미 흔적도 없이 변해있었거나 머지않아 사라지려 한다.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모이고 밀집하는 도시. 하지만 공간은 한정되어있고 욕망은 끝이 없다. 누군가는 내치고 누군가는 나가떨어져야만 하는 게 도시의 생리이다. 결국 개발의 욕망은 누군가의 이주와 철거를 만든다. 도시에서 이 변화의 압력은 너무나 높아서 버티고 서있는 것조차 힘들다. 그렇기에 영화 속 사람들은 각각의 공간에서 철거에 맞서 절규하지만 무력하게 뽑혀나간다.
변화의 여파와 진동은 우리에게까지 미친다. ‘당장 내일 눈을 뜨면 내 공간조차 집어삼키고 있진 않을까’ 싶다가도, ‘나에게도 역시 개발의 콩고물이 떨어지진 않을까’ 하며 들썩거린다. 이렇게 우리는 자주 욕망에 의존하고, 동조하고, 휩쓸리곤 한다. 결국 어느 날의 우리는 뿌리째 뽑혀서 갈 곳을 잃지만, 또 어느 날의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 어떤 이들의 삶을 큰 힘 들이지 않고 튕겨낸다. 누군가에겐 돈벌이, 매물, 개발부지일 뿐인 공간이 누군가에겐 삶이자 뿌리이며 역사라는 것을 종종 잊는다. 편리와 발전을 위해 도시는 언제나 변화해야만 하는 걸까.
도시 안에 선 우리 중 누구도 이 복잡한 긴장을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저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내 옆에서도 벌어지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죽어가는 새벽에 나는 무얼 했나’라는 부채감이 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인다. 각자 자신의 공간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하나의 철거부지에 모여 싸운다. 그렇게 오늘도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지켜내려 한다.
매일 마주하는 도시엔 언제 사라졌고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떠나고 머무르는 이들이 누군지 조차 모른다. 이쯤 되면 도시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변화의 속도는 여전히 체할 것만 같다. 도시는 언제쯤 잠잠해질 수 있을까?

감독

리슨투더시티 Listen to the City

리슨투더시티

리슨투더시티는 디자인 예술 도시 콜렉티브로 현재 네명의 멤버가 있으며 도시개발, 강 개발 등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며 도시와 도시외부 공간의 공통성(the commons)에 대해 고민해왔다. 2009년 결성되어 현 멤버 외에도 많은 외부 협업자와 작업을 함께 해왔으며 주로 도시의 기록되지 않는 역사들, 존재들을 가시화해왔다. 독립잡지 어반드로잉스를 출판하고 있으며, 서울투어, 내성천 활동, 도시영화제, 옥바라지 골목 보존 운동 등 직접행동을 하고 강과 생명에 관하여 담론을 만드는 독립공간 스페이스 모래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평창올림픽반대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인권해설

차별 없는 도시를 위하여

도시 공간의 발전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공사판이 벌어지고 도로는 온통 파헤쳐지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공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아파트와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전국 평균 102.6%이지만, 서울 시민의 절반은 자기 집 없이 전세나 월세를 전전하며 살고 있다. 집은 넘쳐나지만, 사람들이 집을 구하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차별 없는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자니 끝은 보이지 않고, 구체적인 정책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그마저도 ‘법’이라는 장치로 에워싸고 모든 문제는 항상 법대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따져 보자, 법은 어디에 있는가?

도시는 개발을 통해 자본의 축적과 재생산을 위한 필수 과정으로 전락했으며, 과잉축적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는 핵심적 수단이 되어 버렸다. 재개발 조합이 법을 내세워 세입자들을 내쫓을 수 있게 되었고, 건설자본과 금융자본이 공간을 통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자본이 장악한 거리는 노숙인과 노점상처럼 낙인찍힌 사람들을 쫓아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도시 공간의 독점적 사유화와 이를 통한 자산 이득의 배타적 전유는 우리 삶을 파괴하였고, 사회 공간적 배제를 초래했다.

하지만 우리의 헌법 35조에 따르면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들도 자본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재생산 영역에서의 극단적 모순을 원치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주택난에 허덕이고 있는 대다수 서민의 주거권 보장이라는 국가적 책무를 위해 여러 차례 주택정책을 내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나라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1.28%로 선진국의 1/5에 불과하다. 집값을 잡고 투기세력을 압박할 근본적 대책이 없다. 이밖에 분양원가 공개, 재건축초과이윤 환수제 등 불로소득을 통제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물가지수에 맞추어 전·월세 상승을 인정 한도 내로 규제하는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 청구권’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계속 거주할 권리도 단계적 도입으로 미루거나 유보적이다. 무엇보다 주거 취약계층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공공임대정책도 다주택자나 건설자본의 임대사업인 뉴스테이 사업과 같은 기업형 민간주도 정책을 통해 가려져 있거나 부풀려 있는 셈이다. 결국, 문재인 정부도 투기와 건설자본의 토지? 주택보유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을 사회로 환수하려는 노력이 없어 보인다.

모든 권리는 실정법을 넘어 새로운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정의, 평등, 보편성 등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권리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주거권도 오랜 민중의 투쟁 속에서 하나둘씩 만들어졌다. 아직도 고통과 슬픔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도시 빈민들이 외치는 ‘법보다 밥’이라는 구호가 문재인 정부에서도 여전히 외쳐지고 있는 것일 테다.

최인기(빈민해방실천연대 수석부위원장)

1923회 서울인권영화제삶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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