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벨기에의 한 트랜스젠더인 네이슨. 그는 44년 동안 살면서 꿈에 그리던 남성이 될 수 있었지만 마주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화는 지금도 끊임 없이 논쟁 중인 국가와 개인, 성소수자, 가정폭력, 안락사, 죽음, 기억 등 복잡하게 얽힌 주제의식을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저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했던 네이슨의 순수한 바람을 들려주고자 한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종규
네이슨. ‘낸시’로 태어난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FTM(Female to male) 트랜스섹슈얼인 네이슨은 남성호르몬을 주입받고 유방을 축소한 후 난소와 자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남성으로, ‘네이슨’으로 살아가고 싶었기에 그가 택한 길이다. 그러나 네이슨의 꿈은 고지를 앞두고 무너진다. 음경을 재건하는 수술이 실패한 탓이다. 그는 자신을 44년 동안 옭아맨 육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무거웠던 삶의 짐을 내려놓고 기꺼이 죽음을 준비한다. 새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던 네이슨은,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다.
<네이슨>은 존엄사를 앞둔 네이슨의 얼마간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의 중심은 네이슨의 서사다. ‘낸시’였던 네이슨은 가정폭력을 겪으며 남성이 되기를 갈망했다. 트랜스섹슈얼인 그의 삶은 힘겨웠다. 존엄사가 합법인 벨기에에 국적을 둔 그는 죽음을 택했다. 개인의 서사임에도 그의 마지막 모습들은 많은 화두를 던진다. 가정폭력의 문제부터 성소수자의 삶, 자유의 범주, 죽음의 의미, 개인의 자결권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의 이야기가 남긴 잔상은 결코 가볍지 않다. 네이슨은 이미 새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고 있다.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서성이며 했던 고민들은,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았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수현
어떤 단어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시에 어떤 단어로도 시작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어떤 이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삶을 고작 한 시간 남짓 보고, 감히 어떤 단어를 골라 말을 시작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영상을 보고 가장 신경 쓰였던 지점들에 대해서이다. 네이슨이 남성의 몸을 가지는 데에, 남성으로서 제도적 지위를 인정받는 데에, 심지어 안락사를 결정하는 데에까지 따라다니며 개입하는, 이른바 전문 의료인들의 의학적 판단이라는 것들이 가장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성별을 스스로 규정하는 것에, 자기 몸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다루려 하는 것에 그들의 검증과 판단이 그토록 절대적인 힘을 가져야만 할까? 의학적 지식들과 사회에서 통용되는 전문성, 그리고 그것들을 가진 전문가들. 이들이 재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몸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일들에 사이사이 끼어 있다는 것. 그 어마어마함에 다시 놀라고 있는 중이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경복
감독
로엘 놀레
로엘 놀레는 벨기에 앤트워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저널리즘 대학원 과정을 밟았으며 2005년에 하우스 하바나 프로덕션의 비디오리포터로 활동했다. 텔레비전 리포터 일을 위해 매일 현장으로 출동하고 있다.
인권해설
네이슨의 존엄사를 다룬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네이슨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죽음까지의 경로는 네이슨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의 원인이나 계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이라 생각한다. 가족으로부터의 부정, 성폭력 등의 트라우마, 트랜지션 과정에서의 수술 부작용, 더 이상의 희망이 없고 살아갈 의지가 없어서 등 갖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도 있지만 가족의 부정, 성폭력이 네이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거나, 트랜지션 수술 부작용이 네이슨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 한 가지의 이유라기보다 여러 가지 종합적인 것들이 죽음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영화에서는 ‘네이슨이 수술 부작용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었고, 부작용이 삶에 끼친 영향으로 더 이상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세계 유수의 매체를 통해 네이슨은 트랜지션 수술 실패로 인한 좌절로 죽음을 선택한 트랜스젠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이유가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러한 기사들은 네이슨이 수술 실패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한 것처럼 비춰지기 쉬울 것 같다. 과연 그게 트랜지션 실패라는 이유일까? 실패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 실패이며, 과연 그것이 직접적으로 죽음과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되었을까? 그를 죽음까지 이르게 한 것은 자기 자신일까, 혹은 사회일까? 확실한 건 수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영화 결말의 결정적인 이유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을 결정적인 이유라고 판단하는 건 얼마나 단편적인 해석인가!
수술이 잘못되었을 때 그리고 그 수술이 재수술로 바로 잡히지 못한다는 그 고통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FTM 트랜스젠더의 성기재건수술은 수술 부작용의 위험 부담과 금전적인 부담이 큰 수술이다. 많은 부작용 사례들이나 수술 실패 사례들이 있어 왔으며 당사자들에게는 하나의 큰 고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몇 년 전까지 FTM이 법적 성별변경을 할 때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수술 조건으로 성기재건수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많은 노력으로 의학적인 부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와 수술의 부작용이나 실패사례, 그리고 금전적인 부담 등을 강조하여 성별변경 시 성기재건수술의 조건이 일부 완화된 바 있다. 그렇지만 수술을 할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듯이 모든 트랜스젠더들도 각자 다 원하는 몸이 다를 것이다. 자신의 육체에 혐오나 불만이 없을 수도 있고 건강상 하지 못할 수도있고 몸과는 별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각자가 원하는 몸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처럼 트랜스젠더에게도 수술에 대한 선택이 그 어떤 것이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네이슨은 남성의 육체를 가지길 원했고 그로 인해 선택한 성기재건수술이 본인의 만족과는 별개로 기능성의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성기재건수술은 한 번의 수술로 끝나기 어려운 수술이며 긴 과정과 오랜 회복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수술의 고통이 잠깐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위에 수술 과정을 겪은 사람들은 다 같은 말을 했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고… 그런 말들로 미루어 보아 네이슨은 여러 번의 재수술을 통해 그 고통을 수차례 겪었을 것이다. 네이슨의 과거 이야기와 다른 병원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 등은 너무나 짧게, 그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더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이나 해석을 하게끔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네이슨에 투영하여 볼 수도 있고, 나의 주변 사람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예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같이 본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얘기해 보고 다른 사람들은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다양하게 읽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네이슨의 친구들은 그가 오랜 기간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네이슨이 신분증 속의 성별을 바꾸고 웃음 가득 기뻐했던 모습이나 지지해 주는 친구들을 만나 편하게 대화하던 시간들, 그리고 자신이 정말 타고 싶어했던 열기구를 탔을 때 좋아하던 모습 등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네이슨은 고통이나 좌절 속에서만 살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네이슨의 우울감, 좌절감, 고통 등은 그가 트랜스젠더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남들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다른 점이라면 어쩌면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는 그 차이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누구나 긴 여운을 느끼는 듯하다. 이 길지 않은 한 편의 영화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이 영화를 보며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접하기 힘든 다양한 트랜스젠더중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 그 안에는 복잡한 가정사와 수많은 감정의 기복 그리고 트랜지션 과정… 한 가지의 주제로는 다 풀어낼 수 없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단편적으로만 해석하게 된다면 정말 안타까울 것 같다. 영화의 결말은 죽음이었지만 이 영화의, 네이슨의 삶의 결말이 어떠한 뜻이었다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여 네이슨이 스스로 결정한 죽음에 대해서 옳다/그르다 혹은 좋다/나쁘다고도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좀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네이슨의 죽음은 용기 있는 죽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별을 고하고 자신의 안락사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며 자신의 죽음까지 본인의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Free as a bird… 어디에서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고 있길 바란다.
진호 (조각보-트랜스젠더인권단체설립준비위원회)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날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옆에는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난 이제 더 이상 내 삶의 고통과 맞서 싸우기 지쳤으니 스스로 끝낼 결심을 했다고 말했을 때, 어떤 감정과 생각이들까. 아니, 당신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이란 어떤 깊이일까. 그 결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설득하고 지지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고통을 경험하는 인간으로서의 나와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의지를 발견하도록 돕는 자로서의 내가 수 없이 교차한다. 만약 그의 친구라면 난 그에게 뭐라 할 수 있을까. 상대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떻게든 그 결정을 돌리고 싶은 절박함, 그렇지만 어떻게도 도울 수 없다는 무력감, 여러 감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그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것임을 알고 있다면 선뜻 막아설 수 있을까.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절망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 아닌가. 마지막의 시기를 결정하고 삶을 정리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아닐까. 답을 내리지 못하는 질문들이 쌓여간다.
영화는 쉽게 답하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생각해본 적도 없을 수 있는, 삶을 끝낼 수 있는 권리, 삶이 주는 고통을 끝낼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네이슨의 마지막 나날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정은 어쩌면 담담하게, 때로는 즐겁게, 그래서 오히려 먹먹하게 다가온다. 고통의 원천에 대해서는 아주 잠깐씩 드러난다. 어린 시절 엄마의 학대, 오빠의 성폭력, 트랜지션을 지지해주었던 아빠의 죽음, 수술의 실패… 눈에 띄는 큰 사건들 사이에 얼마나 더 많은 상처가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이 경험들 속에서 고통은 켜켜이 쌓여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약물, 심리치료, 상담 등의 개입도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못했다. 엄마는 끝까지 비난의 말을 쏟는다. 형제들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군다.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 같았던 아빠는 법적으로 남성이 되는 날 돌아가셨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려 애썼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 중 다수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도 비수를 꽂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고통이 그의 절망을 더 깊게 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길을 함께 해준 친구들과의 작별을 성실하게 해나가지만 친구들 속에서도 여전히 외로웠음이 드러난다. 그가 친구들에게 남기는 말은 너무나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어서 쓸쓸하다. 그 누구보다 네이슨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조금 더 고통을 말할 수 있었다면, 주는 것만큼 더 받을 수도 있었다면, 그 외로움이조금 더 감당할 만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고통을 대신 겪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더 말 걸고 손 내밀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의 절망에 아파하면서 마지막 길에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했지만 여전히 다시 한 번 생각해 줄 수는 없겠니, 이게 정말 최선이니, 묻고 싶어진다. 그의 친구들이 그랬듯 나 또한 그를 잃는 것이 안타까워서였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나의 무력감에 맞닿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의 친구들은 그를 잃지 않고 싶은, 결심을 되돌리고 싶은 소망을 솔직하게 표현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옆을 지켰다. 어떤인연은 끝내 회복될 수 없었고 어떤 인연은 마지막까지 이어져 있다.
떠오른 많은 질문에 여전히 답할 수 없다. 아니, 답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려 한다. 편협한 잣대로 성급히 판단 내리지 않으려 한다. 다만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나와 다른 생각과 삶의 방향을 존중하는 것,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되새기려 한다. 잘나거나 모자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가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서도 괜찮은 사람임을 인정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소망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나의 몸과 정신이 침해되거나 손상되었을 때, 그 상처를 잘 보살피고 나 자신으로서의 삶과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한 개인의 몫을 넘어선 그를 둘러싼 여러 연결고리의 사람들, 나아가 이 사회가 함께할 몫이다. 어떤 틀로 분류된 무엇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수많은 네이슨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네이슨의 손을 놓지 않았던 친구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나 또한 절망할 때 용기 내어 손 내밀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조이수현(트라우마치유공동체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
수많은 해외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들은 비성소수자보다 건강이 나빠질 확률이 높다. 성소수자는 비성소수자와 비교할 때, 흡연, 음주 등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고, 심장질환이나 비만, 성감염증에 걸릴 확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건강상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건강연구를 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은 차별, 특히 동성애혐오와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성소수자들의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분위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날까 늘 위축되어야 하는 사회 심리적 요인, 커밍아웃했을 때 또는 아웃팅을 당했을 때 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법/제도적 근거가 전무한 상황, 일상적으로 이들이 마주쳐야 하는 낙인의 위험, 직접적인 혐오범죄의 대상이 될 가능성, 도움이나 상담을 받기 위해 찾은 의료기관에서조차 차별당하거나 낙인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 등을 꼽자면 이들의 건강이 나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특히 트랜스젠더의 경우, 트랜지션(성전환수술)을 하는 이들이 다수 있기에 의료체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건강이 나빠질 수 있는 조건뿐 아니라, 젠더표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혐오 범죄의 직접적 대상이 될 가능성도 크다. 자살 생각도 매우 광범위한 편이이서, 해외연구에서는 트랜스젠더 중 38~65%가 자살생각을 하고 있으며, 16~32%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 있다고 나타난다.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의 경우, 일상생활을 관리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긴장과 스트레스는 배가되기 쉬워, 심리상담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렇듯, 건강상의 큰 위험을 안고 살아가지만, 트랜스젠더의 건강, 특히 우울증, 불안 등 정신건강상 문제를 알고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외에서도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비교하는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국내에서도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대한 문제는 전무하다.
건강이란 무엇일까? 세계보건기구가 말하듯이, 건강이란 신체적 건강만을 뜻하지 않으며, 심리적 행복과 안녕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건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좋은’ 음식을 찾고 운동을 하며 의사를 찾아가기도 한다. 더불어, 가족과 친구, 지인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구하기도 하며, 그들로 인해 불행할 때는 다른 사회적 관계망, 지지망을 형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여전히 신체적 고통이 지속될 때, 심리적 행복과 안녕이 보장되지 않을 때 개인의 선택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안락사는 그 목적, 방식, 환자의 자발성 여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지만, 영화 <네이슨>의 선택은 적극적 안락사이자 존엄사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의료계는 자살에 대한 의사의 조력, 죽음에이를 수 있는 약품에 대한 정보 제공, 의사가 직접적 안락사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이를 법제화하여 허용한 나라 또한 많지않다. 의사가 환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하여 발전해온 의료행위가 생명윤리와 충돌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존엄사법’이 통과되고, 2000년 네덜란드, 2002년 벨기에, 2004년 룩셈부르크가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하면서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더불어,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의사의 의견을 물은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의사들의 생각도 달라지는 듯하다. 54%가 의사 조력자살 허용에 찬성한다고 답한 것이다.
안락사를 하기로 한 트랜스젠더 <네이슨>의 선택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규정할 수도 없다. 아동기 폭력의 피해경험,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 성전환수술의 실패, 전 생애를 걸쳐온 고립감과 외로움은 차별받는 이들이 공히 갖고 있는 ‘건강의 위험요인’들이다. 이들을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위험요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살아남은 자들의 싸움이 더 끈질기게 필요하다. 그것이 지금껏 우리 곁에 있었던 수많은 다른 <네이슨>의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는 길이자, 함께 안녕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박주영(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용어 해설
외상(trauma)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5판』에 따르면 죽음, 심각한 상해 또는 성적인 폭력과 같은 외상사건을 실제로 겪었거나 그러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혹은 외상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거나 가족 등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의미한다.
안락사
의사의 역할에 따라서 적극적 안락사,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되며, 환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이를 요구하는 경우 존엄사라고도 한다. 의사가 약물 등 정보를 소개하고 돕는 경우가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되며, 의사조력 자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 추가적인 의료조치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연명치료 중단, 심폐소생술 거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 아래의 용어 해설은『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사람생각, 2008)의 용어정리 pp.13-23 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성전환자/트랜스젠더
먼저 ‘트랜스젠더(transgender)’는 ‘전환이나 초월’을 뜻하는 ‘trans-’와 ‘성별’을 뜻하는 ‘gender’가 합쳐진 말인데, 이를 줄여 ‘TG’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한국의 언론은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 성전환자와 같은 용어를 서로 구분이 안 되는,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을 구분하며, 트랜스섹슈얼은 수술을 하는 사람,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수술을 하는 건 아닌 사람들을 일컫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는 하다.
만약 이 용어들의 뜻을 미국 학제에서 사용하는 방식에 따른다면, 성전환자를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트랜스섹슈얼은 ‘정신적인 성에 육체적인 성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즉 호르몬 투여와 성전환수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용어는 정신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성전환자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트랜스젠더는, 이런 의료식민화를 비판하며 운동적인 성격을 띠고 등장했다.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수술이나 호르몬을 하는 것은 아니며,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상당히 넓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에 와선 트랜스섹슈얼이 반드시 정신병리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건 아닌데, 트랜스젠더와 달리 트랜스섹슈얼이란 용어가 성전환수술 경험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이들 용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미국의 그것과 동일하다면 그저 어느 유명한 이론가의 정의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용어가 특정한 의미로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미국의 맥락과 상당히 다르다. 몇몇 유명 연예인들이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각인되면서,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태어났을 때 주민등록번호로 할당받은 성별과 갈등 하는 존재로서, 대체로 성전환수술을 하거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간 수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지칭한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 이 용어는, 육체적인 성은 남성(혹은 여성)이어도 정신적인 성은 여성(혹은 남성)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경향이있으며, 정신적인 성이 여성(혹은 남성)이기에 수술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들 상당수가 자신은 트랜스섹슈얼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라고 얘기한다.
ftm/트랜스남성
ftm은 ‘female to male’의 준말로,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남성 정체성을 가진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mtf는 male to female의 준말). 당사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체성과 전환의 의미를 담은 이 용어들을 즐겨 쓰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별만을 상정하고 있어 성별이분법적이고, 전환의 의미를 너무 강조하기에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로 적절치 않다’는 입장 혹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였지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게 아니다’라는 입장 등의 다양한 이유로 이러한 표현을 거부
하는 이들도 공존한다.
‘트랜스남성’이란 용어는 보통 ‘ftm’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 트랜스남성은 출생 시 부여받은 성(여성)과 달리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의료적 조치를 받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 젠더정체성(남성)에 입각하여 의료적 조치를 받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남성임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의학적 조치를 통한 경우(트랜스섹슈얼 남성)뿐 아니라, 의학적 조치가 아닌 다양한 젠더적 수행을 통해 자신이 남성임을 드러내는 경우(트랜스젠더 남성)도 모두 트랜스남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트랜스남성이란 용어는 사회 안의 다양한 남성들과 같이, 예를 들면, 장애남성, 흑인남성과 같이 트랜스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이기도 하다.
트랜지션
트랜지션(transition)은 보통 ‘전환/전환 과정/성전환’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트랜스젠더에게 전환이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성별과 다른 젠더정체성으로 ‘정체화하는 과정에 들어선다’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1)옷차림이나 말투 행동거지 등 젠더 표현을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맞게 재사회화하고 학습하는 과정, (2)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거나 성전환을 위한 여러 수술을 받음, (3)법적 성별을 바꾸어 살아가는 일련의 절차 등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을 거쳤다고 해서 반드시 전환이 종료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보통 트랜스젠더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에서 ‘전환 중’이라는 표현은 의료적 조치(그리고 이에 뒤이은 법적 성별변경 과정)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패싱/통과하기
패싱(passing) 또는 통과하기는 ‘이러이러한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짐’이란 뜻을 갖는다. 트랜스젠더에게만 국한하여 쓰이는 용어는 아니며 인종, 민족,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등에도 통용되는 단어이다. 패싱(passing)은 원래 유태인이나 유색인종 등 서구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민족이나 인종이 그 사회에 어떤 식으로 속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할 때 쓰였던 단어였다. 그러다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에 확대 적용되어 왔으며, 쓰이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와 맥락이 달라지기도 하여 왔다.
ftm일 경우, 태어날 때부터 법적 신분증에 남성으로 표기되어 있는 듯이, 학창시절 남학생이었던 듯이, 여자인 몸으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는 듯이 얘기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람이 ‘원래 남성’이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도록 행동할 수 있는데, 이를 패싱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영미권의 트랜스젠더 인권운동 역사 속에서 패싱은 트랜스젠더로서의 역사-개인으로서나 집단으로서의 역사 모두를 지우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는 패싱의 의미를 너무 협소하게 보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먼저 트랜스젠더에게 있어 패싱이란 젠더 표현과 젠더 역할, 젠더적 수행이 자신의 젠더정체성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와 더불어서, 자신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과는 다른 성별로 오인된다(비수술 트랜스젠더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는 모순되고 양가적 의미 모두 다로 쓰일 수 있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네이슨처럼 ftm인 경우,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남성’이었다고 말하고 ‘남성’으로 통하는 것도 패싱이며, ftm/트랜스남성이 ‘여성’으로 통했던 역사 역시 패싱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트랜스젠더가 남녀 중 한쪽의 성별로만 패싱하려 하지는 않으며, 어떤 이들은 트랜스젠더로, 누군가는 트랜스남성/여성으로 패싱하려 하기도 한다
이처럼 패싱은 좁은 의미로만 보면 과거를 지우거나 부정하거나 속이는 행위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맥락에서 개인과 집단의 역사, 각각의 육체의 역사와 관계망의 역사를 거듭 재구성하면서 자기 개인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SRS/성전환수술/성재지정수술/성확정수술
Sex Reassignment Surgery(SRS)는 ‘성전환수술’이라고 가장 흔히 번역되곤 하며, ‘성재지정수술’이나 ‘성확정수술’ 등 다른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성전환수술이라 함은, 신체에서 성별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외과적 수술 – 성선(정소, 난소), 내부성기(정낭, 질, 자궁, 나팔관), 외부성기(음낭, 음경, 음핵, 음순) 등 생식기관의 제거와 성형, 나아가 유방, 얼굴 등 외부에서 성별을 판단하는 외형들의 성형을 포함 – 을 통하여 성별적으로 신체적 외형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광의의 SRS를 포
함하는 의료적 조치에는 호르몬 투여, 정신과적 진단 및 조치 등을 전부 포괄하는 의미로도 쓰이곤 한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성기 및 생식능력제거 수술을 지칭하는 경우로 가장 자주 쓰이곤 한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따라 출생 시 부여된 성별과 ‘반대’의 성별로 수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한 사람만의 전유물만은 아니어서, 간성인 사람이 자신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성별로 신체를 변화시키거나,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필요에 따라 성전환수술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성전환수술이란 용어는 ‘성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에게 주어졌어야 할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진 이들에서는 사용하기를 꺼려지곤 한다. 대신에 이들은 관련된 외과적 수술을 ‘성을 자신에게 부합하게 정위치에 돌린다’는 의미에서 성정위수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나에게 적합한 몸’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성적합수술이라고 하거나, 출생 시에 외부성기에 의해 지정된 성을 ‘자신에게 편안한 성으로 다시 지정한다’는 의미에서 성재지정수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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