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퀴어’, ‘일스’, ‘일틱’, ‘언니’, ‘은둔’, ‘벽장’… 여러 말이 뒤섞이고 엉키고 흐른다. 근데, 퀴어가 뭐야?
프로그램 노트
우리는 퀴어다. 그게 너와 내가 같다는 뜻일까? <귀귀퀴퀴>는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시작부터 별별 말이 흘러 나온다. 헤테로는 무엇인가. 팬로맨틱, 팬섹슈얼은 무엇인가. 전애인이 트랜스젠더였다는 사람과 그게 무엇이냐 묻는 질문들. “저렇게 살아야 퀴어인거야?” 우리의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
퀴어는 간결하지 않다. 동일하지 않다. 너와 나는 다르다. 단일한 “퀴어로움”이란 없다. 내가 욕망하는 섹슈얼리티와 네가 욕망하는 섹슈얼리티는 다르고 내가 살아온 퀴어의 방식과 네가 살아온 퀴어의 방식은 다르다. 여기저기 “판”에서 떠도는 “용어”에 무지한 퀴어도 있고 정형화된 이미지에 반박하는 퀴어도 있다. 동성애자만 퀴어인 줄 아는 퀴어와 퀴어 내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게 되는 퀴어, 거리에 나가 투쟁하는 퀴어가 있다면 인권에 관심이 없는 퀴어도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퀴어’로 통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퀴어’는 끝없이 역동하고 움직이는 관계이자 정치의 동사이기도 하다. 각자 맺어온 관계의 방식과 커뮤니티가 다르고 욕망하는 것이 다르고 되고 싶은 것과 삶의 주요 이슈가 다르다. 우리가 퀴어로 묶여 힘을 모을 수 있으려면 각자의 고유성을 지키며 갈라질 수도 있어야 한다. ‘퀴어’는 하나로 정의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끝없이 확장하고 관계맺기를 위한 장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또다시 질문한다. “그래서, 퀴어는?”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감독
이곳저곳 어슬렁거리며 곁을 지 , . 키고 싶은 현실을 포착기록번역합니다 이왕이면 그곳에 균열이 생기길 바라면서 난리를 피웁니다. ( 그러려고 애씁니다.) (괄호체를 좋아합니다.)
[2024년 겨울의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
저에게 살아감은 투쟁입니다. 일상에서의 대화와 그 속의 규범, 각종 배치가 만들어내는 기본값들과의 불화를 버티며 조금씩 비틀어보려는 습관이 저에게는 투쟁입니다. 하지만 종종 투쟁할/살아갈 일상이 부서지는 경험을 합니다. 지금이 그렇습니다. 상상 바깥의 통제와 폭력이 발생할 때, (모두의 거리라 여겨지는) 거리로 온 힘을 쏟게 됩니다. 저의 부스럭거림을, 즉 일상에서의 투쟁을 박탈해간 계엄과 이후 쌓이는 대응으로 그나마의 믿음이 깨졌다 붙었다 반복하는 와중입니다.
그럼에도 일상에서의 물음이 ‘대의’라는 이름에 완전히 가려져야만 국회 앞에서 함께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일부) 소수자들은 이미 그 믿음을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하고 싶지 않더라도)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적 물음이 선별적인 ‘대의’를 획득 받은 곳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소수자성을 둘러싼 의제는 늘 ‘대의’ 바깥에 위치되어야 하는 걸까요. 저에게 투쟁은 삶을 향한 질문입니다.
(생기길 바라는) 탄핵/퇴진 이후의 논의들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중요한’ 곳에서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게 익숙한 소수자들의 깃발이 국회 주변에 북적거리고 있습니다. 이 거리의 웅성거림이 무색하게 그런 ‘중요한’ 논의에서는 대체로 뒷전이 된 채 늘 나중을 희망삼아야 하는 소수자들의 몸과 소리가 응원봉과 함께 지금 여기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깃발은 각자의 거리를 줄곧 채워오고 있었다는 사실, 각각의 일상에서 부스럭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외치는 분들과 뜻을 같이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투쟁은 외면의 반의어입니다. 때론 망각하고 싶은 깃발이 거리에서, 제 몸과 마음 어딘가에서 여전히 펄럭입니다.
인권해설
퀴어는 왕도가 없다
퀴어 아티스트 이반지하는 종종 ‘퀴어들이 고생이 많다’고 말한다. 농담 같지만 농담은 아닌 것이 응당 성소수자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여기저기 설명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전에 규범적 젠더와 이성애 관계에 충실히 맞춰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일을 나부터 이해할(나는 왜 그들과 다를까?)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일단은 다행이라 생각하자) 최근의 인터넷과 SNS는 동료와 자원을 찾을 소스를 제공한다. 2010년 전후 LGBT로 통용되던 정체성은 말 그대로 폭발하듯 증가했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연상할 만큼 언어들이 증식하는 시점은 스마트폰과 SNS가 보급되고 퀴어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이 만들어진 시기와 겹친다. 과거 ‘이반’과 ‘동성애자’가 LGBT와 동석하던 시절에 비하면 차원이 다른 변화였다.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지고, 관계에서도 섹슈얼리티와 로맨스가 제각각 나뉜다. 이즈음부터 사람들은 정체성을 하나의 단어로만 설명하지 않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적 지향은 무엇인지, 젠더정체성은 무언지, 로맨스는 어떤 것을 지향하는지 흡사 MBTI처럼 나를 설명할 언어를 조합했다. 실제로 당시 인권단체를 찾은 10-20대 퀴어들 중에는 미들 네임을 여러 개 병렬하듯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이 많았다. 어떤 것은 단어들이 모여 문장처럼, 시처럼 들리기도 했다. 수다한 정체성의 언어가 불안한 퀴어의 실존을 지탱하고 있다는 생각은 은유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성소수자 인권교육에는 젠더브레드 퍼슨(genderbread person) 이미지를 참조하여 설명하는 일이 많았다. 샘 킬러만(Sam Killermann)이라는 예술가이자 문필가가 2011년 제작한 젠더브레드는, 성별도 무엇도 알 수 없는 사람 모양 쿠키 이미지를 가져와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 생물학적 성별과 젠더표현 그래프를 나란히 놓고 리트머스처럼 당신이 어디쯤 있는 사람인가를 체크한다. 젠더브레드는 자신을 설명할 정체성의 이름을 찾는데 일용한 가이드가 되었다. 도식화한 젠더와 섹슈얼리티 모델은 ‘나는 내가 잘 안다’는 문장에 힘을 실었고, 이는 곧장 타인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명명하는데 신중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 문장은 지금도 어느 정도 유효하게 쓰인다) 그것이 말처럼 쉽다면 좋았을지 모르지만, 일단 여러분이 ‘빵(bread)’은 아니지 않은가.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복잡한 현상들을 정의하면서 발명되고 이론화한다. 개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틀을 부여하고 나와 다른 모습의 타인을 구분한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지탱하지만, 온전히 동일시하고 체화할 수만은 없다.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고 사용하는 이는 각자의 생김새와 환경에 맞춰 활용하기 마련인데, 언어는 그저 끝없이 같은 모양을 유지하지 않는다. 현실의 관성과 경합하고 외래종 이름이 토착 언어와 습속에 맞물려 변이하기도 한다. 이름이 갖는 개념적 틀은 현실 관계의 복잡성에, 지역과 세대의 환경과 인식 차이에 따라, 개인의 취향과 기호에도 저마다 다르게 맞춰간다. 여기서 정체성의 쓰임은 조금씩 달라지고, 정체성의 일반적인 통념 또한 흔들린다…… 그래서 퀴어가 뭐냐고?
영화 <귀귀퀴퀴>를 보면 단서를 얻을 것이라고 쓰고 싶지만, 관객들은 그 기대마저 와장창 깨지기 쉽다. 그나마 알고 있던 정의마저 다양한 문화권과 개인의 생각과 맥락에 변하고 미끄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서사가 만들어지고 예기치 않은 시간과 세상이 열리며 불확실한 미래가 수다한 용처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기로 작동할 수 있다면, 그것도 퀴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다 제쳐두고 ‘성소수자’와 ‘퀴어’가 같은 거냐고, 둘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매번 멈칫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 혼란을 누구와 어떻게 기억하고 과정으로 남길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더불어 이 고민을 함께 나누기 위해 어떤 장치를 고려해야 하는지까지도 놓치지 않는 점이 이 작품의 미덕일 것이다.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ttps://lgbtpride.or.kr/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는 1997년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성소수자 인권단체입니다. ‘실천’과 ‘연대’라는 주요한 활동원칙 아래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이 존중받을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성소수자 인권을 존중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행동합니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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