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이것은 노르웨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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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이름 그대로 한참 북쪽의 나라, 복지국가 선진국에 국민들도 관대하고 도시든 시골이든 깨끗해 보이는 나라다. 평소에 오로라를 볼 수 있으니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몸으로 느끼고 친환경 실천에도 열심히 나설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나라에도 두통이 있다. 기후 위기와 화석에너지라는 두통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누리는 부와 안정성의 상당 부분은 세계에서 손꼽는 석유와 가스 수출국인 덕분이다. 그런데 이 나라 북극 바렌츠해의 석유 시추가 심각한 반대를 만났다. 석유 개발권 면허를 내준 정부를 상대로 ‘기후 소송’이 벌어진 것이다. 법조인들뿐 아니라 청년 기후활동가, 은퇴한 전문가, 시민들이 이 시추 허용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법원에 판단을 요구한 것이다.

노르웨이 헌법 제112조는 “모든 사람은 건강에 이로운 환경과 생산성, 다양성이 유지되는 자연환경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태어나지 않은 모든 노르웨이인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현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 채굴 사업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송이다.

하지만 재판은 원고에게 쉽지 않게 흘러간다. 석유 시추가 노르웨이의 기후 위기를 악화시킨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인정받기도 쉽지 않거니와, 피고 즉 정부 측의 논리는 시종일관 절차적인 부당성은 없다는 것이다. 석유 시추를 더 할 것인지 또는 기후 위기를 감내할 것인지는 정치적 판단의 문제이지 그것을 법원이 답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정치적 영역의 답을 할 수 없는 법관들의 대답은 ‘기각’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법원 바깥의 장면들까지 보아야 한다. 기후학자들과 주민들은 눈에 띄게 사라져가는 노르웨이의 빙하를 기록하고 증언한다. 그러나 석유 채굴 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이 나라의 많은 지자체와 노동자들은 기후뿐 아니라 생존도 현실이다. ‘정의로운 전환’의 윤리적 당위론만으로는 이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 얼마 전 독일에서 벌어진 유사한 기후소송은 기후 보호법이 미래세대의 자유권을 침해한다며 원고가 승소했고 의회는 기후 목표를 상향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했다. 한국에서도 몇 건의 기후소송이 시작됐다. 이기기 쉽지 않은 법률 투쟁이지만, 그 과정과 결과 모두가 기후 위기와 인권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바꾸는 의미가 있으니 최선을 다할 일이다. 그러나 어쩌면 노르웨이 정부 측의 말처럼, 애초 법으로 해결이 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대체 어떤 법과 제도가 기후 피해와 기후 회복을 온전히 보장해 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노르웨이의 ‘두통’이라는 이 다큐멘터리의 원제는 매우 적절해 보인다. 두통은 문득문득 찾아오고 쉬이 걷히지 않으며 하나의 처방으로 낫기도 어렵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소송과 싸움은 노르웨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두통으로, 그러나 대화와 행동을 만들어내는 두통으로 함께 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김현우(기후위기 비상행동, 탈성장 대안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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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기억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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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30여 년 전쯤 다하우 강제수용소 기억공간에 갔을 때, 출입문 한가운데 달린 이 문구가 불러일으킨 감각이 생생하다. 들어갈 때도 기이한느낌이었지만, ‘안’을 다 둘러보고 나왔을 때 ‘바깥’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곳에서 행해진 ‘노동’은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속해있고 알고 있던 인간이라는 종의 세계

는 하얗게 증발해버렸다. 내게 <기억의 숨결>을 본다는 것은, 루시와 함께 이 부조리한 경험을 다시 한번 역사 속 몸으로 복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리고 루시는 96살의 늙은 트랜스젠더여성이고, 하여 이 몸의 과정은 조금 더 특수했고 그만큼 더 몸의 정치학이었다.

그가 말한다. ‘내가 이제껏 살아있다는 게 부조리하지 않은가? 나는 이미 그때 죽었는데? 내가 사는 건, 내 몸이 살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광기’의 현장을 목격한 그때, 죽은 시신을 수레에 싣고 소각로로 옮기는 노역을 한 그때, 그가 인간으로 알고 있던 정체성의 세계가 무너졌지만, 그는 인간으로 살아 남았다. 그의 몸이 이 역설을 실현해냈고, 역설은 두 종류의 역겨움 사이에서 진동했다. 다섯 살 꼬맹이었을 때 첫 성찬식을 앞두고 ‘성직자’에게 성폭력을 당한 역겨움에서 시작해 다하우의 광기에 끌려 들어간 역겨움이 있는가 하면, 여성의 몸으로 새로 태어난 그를 보고 ‘역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역겨움이 있다. 루시는 이 두 역겨움의 세계를 성실하게 몸으로 살아냈다. 영화는 <기억의 숨결>이 아니라 <기억의 몸결>이다.

<기억의 숨결>은 96세 트랜스젠더 여성의 ‘살아있는 몸’의 성실한 활동을 찬찬히 조목조목 보여준다. 그가 다하우에서 강제노역을 하게 된 것과 퀴어로서의 그의 정체성은 분리할 수 없이 연관되어 있지만, 루시의 역사적 삶을 증언하는 것은 명백하게 표현된 정치적 입장도, 퀴어 활동가의 면모도 아니다. 일상을 사는 몸이다. 사야 할 물건이 적힌 종이를 손에 들고 슈퍼마켓을 돌며 채소나 바나나를 고르는 몸.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세수를 하고 손과 얼굴에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빗고, 스프레이를 뿌리는 몸. 자고 난 뒤 순서대로 침대를 정리하는 몸. 손님을 맞기 위해 요리하고 식탁보를 새로 깔고 냅킨을 정렬하는 몸. 시디나 비디오를 찾아 기기에 넣고 의자에 앉아 듣는 몸. 그의 살아있는 몸은 다하우에서의 ‘노동’ 이후 부서진 (그의, 인간 종의) 시공간을 어떻게든 다시 잇고 지탱한다. 아마도 지난 75년 동안 매번 마지막 부서짐의 절벽 앞에서 천천히 그를, 인류의 세계를 다시 조합했을 것이다. 뽀드득 소리가 들릴 정도로 컵의 물기를 다부지게 닦아내는 그의 손에서 나는 살아있는 그의 몸, 부서진 현대사를 지탱하고 있는 그의 몸을 확인한다. 아름답고 강건하다.

“이 손이 무슨 짓을 한 거지?” 고통과 역겨움이 가득한 얼굴로 그는 묻는다. 그의 손은 다하우에서 죽거나 채 죽지 않은 사람을 불덩이에 밀어 넣는 일을 했고, 손님에게 성적 서비스를 팔거나 애인을 사랑하는 일을 했다. 자신과 다른 이들을 먹이며 돌보는 일을 했다. 유년기의 성폭력도,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섹스를 파는 일도, 인간종의 광기도 그의 ‘살아있는 몸의 힘’을 파괴하지 못했다. 그는 유머와 관대함이 있는 트랜스젠더‘할머니’가 되었다. 그가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서 말하지 않았지만, 역겨움과 비통함 사이에서 퀴어 세계의 비규범적 통쾌함이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평범한 일상 내내 ‘퀴어 프라이드’가 발산하고 있었다. 그의 몸을 이동시키는 수

단은 자동차에서 보행기로, 그리고 휠체어로 바뀌었지만, 그는 몸의 이동을, 몸으로 하는 ‘트랜스, 즉 거스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하우를 다시 찾은 그는 ‘인간의 의지가 지배하는 이 땅에 계속 남는 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의 살아온 삶의 역사와 함께 ‘우리’는 역설의 화법으로 응대한다. 이 땅에 계속 남아 날마다 몸으로 다른 젠더의, 다른 섹슈얼리티의, 다른 노동의, 다른 자유의, 다른 해방의 역사를 살아내자고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okeesalon.org
옥희살롱은 연구활동가들이 모여서 아프고 나이 들고 돌보고 돌봄받는 일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새롭게 질문하고, 여성주의 인권의 관점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곳입니다. 다양한 연령대가 호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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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무브@8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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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 활동 안에서 문화운동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이자, 힘을 조직하는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대중문화 장르를 통해 드러내는 시도들이 인권운동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시도되었고 역사를 오랫동안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성소수자 운동 내에서도 중요한 활동 영역입니다. 성소수자들이 향유하는 대중문화와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만나는 접점을 통해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운동이 만나는 계기가 되고, 당사자들이 세상에 당당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현장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은 활동을 쉬고 있지만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내 게이 합창단 ‘지_보이스’에 오래 활동했습니다. 노래하기를 좋아하던 게이들이 합창을 통해 모여보자는 마음에 시작된 모임이었고, 그 모집 공고를 보면서 저는 처음으로 ‘친구사이’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합창이란 음악 장르를 통해 나와 같은 사람들과 만나 매주 2시간 연습하면서 나와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렇게 이어지는 만남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고, 세상에 말을 건넸습니다.

활동하면서 계속 마주하는 고민은 역시나 어떻게 세상에 우리를 드러내느냐? 입니다. 성소수자로서 나 자신을 오롯이 드러내는 것에 대한 어려움도 존재하지만, 세상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상당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이 세상에 건너야 하는 이야기들은 무엇인지, 어떤 모습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지가 화두가 됩니다. 취미로 시작한 활동이 점점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에서 부담과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그러면서 모임의 형태나 말 걸기의 방식을 조금씩 변형하면서 나름의 지속 가능성을 꾀합니다.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같이하는 내가 소진되지 않도록 말이죠.

지난 2~3년간 코로나 시국은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게 한 집중적인 시기였습니다. 매주 만나서 합을 맞추며 활동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만나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오히려 모임에 대한 운영과 미래 등을 더 고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활동의 구심점은 어떻게 찾고 있는지를 되물었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드러내어 활동하면 좀 더 반가운 세상과 마주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차별과 배제를 맞이했던 순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좀 더 힘을 내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 힘은 결국 함께 고민하는 주변의 사람들 때문이었고, 변화와 희망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현장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해서이기도 합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에서 정말 다양하게 활동하는 문화 관련 모임들이 많습니다. 제가 그 이름을 다 옮길 능력이 없어 적지는 못하지만, 그 수많은 모임은 저마다의 모임의 정체성에 따라 자신들을 드러내며 모임의 목표를 이어가며 활동합니다. 나답게 존엄하게 살고자 거리로 나와서 함께 했던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현장, 각 지역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 그리고 갖가지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 행사, 그리고 그 모임 자체적으로 개최하는 행사들은 성소수자 커뮤니티 일원들이 숨 쉴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은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이자, 퀴어한 활동판이기도 합니다. 문화 활동 모임들이 저마다의 방식을 같이 공유하면서 좀 더 확장된 현장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상상도 해봅니다. 또 다른 일이 되겠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들을 조직하는 것이고, 세상을 조직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요.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차별금지법제정연대 https://equalityact.kr/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이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로, 2022년 9월 현재 167개 인권시민사회단체와 15개의 지역 네트워크가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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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뿔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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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뿔’은 아프리카 대륙이 아라비아반도에서 인도양 쪽으로 코뿔소의 뿔처럼 솟아난 북동부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다. 지부티,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의 나라가 해당한다. 지역 내 국가 간 무역의 95% 이상이 비공식적이고 장부에도 잡히지 않는 가축을 거래하고 하니 특별히 유력한 산업은 없는 지역이다.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가축을 키우거나 낡은 배로 물고기를 잡으며 뿔의 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다른 선택지는 아마도 없었을 테고, 세계 많은 사람의 삶이 그렇기도 할 것이다.

느린 흑백 화면이 비추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들과 이웃 남자와의 대화는 몇 마디 안 된다. 쇠약해진 아버지가 먹을 약이 떨어졌고 주변에는 일거리도 없어 보인다. 이웃들은 하나둘 이 고장을 떠나고 마을은 폐허처럼 정지한 것 같다.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유럽 국가들은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카의 뿔 바다에 독성 폐기물을 투기했고, 2004년에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가 유독 물질을 소말리아 해안에 퍼트리면서 여러 질병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나라든 소말리아 정부든 그들에게 이런 일을 충분히 설명해 주거나 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의 장면들은 사뭇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아주 특수한 사례는 아닐 것이다. 세계 곳곳의 자원 채굴지, 핵발전소의 피폭 노동과 주민들의 발병, 삼성 반도체에서 일어났던 백혈병 비극 모두가 같은 문제의 가지들이다. 그러나 우리, 특히 선진국 대도시 사람들은 일상에서 더럽고 위험한 것을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더럽고 위험한 것은 비정상이거나 극단이라고 여긴다.

2009년 국역 된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테드 스미스, 데이빗 A 외 지음, 공유정옥 외 옮김, 메이데이)라는 책의 영어 제목은 “Challenging the Chip”, 즉 ‘반도체 신화에 저항하기’라는 의미다.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서 한국에서는 이 산업이 한국 경제를 끌어나갈 것이라는 신화와 함께 이 산업이 깨끗한 첨단 산업이라는 신화가 강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공짜로 얻어지는 깨끗하고 좋은 것은 없다. 우리가 쓰는 가전제품과 에너지의 피해자가 이 소말리아 사람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딘가에 우리는 부담과 위험을 안기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가해와 피해의 얼굴들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밝혀내고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의 법 제도가 보호해주지 못하는 존재와 권리를 드러내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길어 올릴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해법과 해결이 일대일로 맞아떨어지거나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만성적인 일이라는 인정도 회피해선 안 될 것이다.

당장은 보이지 않거나 떠올리기도 어려운 존재들을 생각하는 것은 우울하고 답답한 일이다. 우울증에 오래 빠질 필요는 없지만, 이런 환경과 인권에 관한 문해력과 감수성은 더욱 권장되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손쉽게 상황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조용히 애도한다. 이 표현 방식이 아쉬울 수도 있지만 그조차 이해하거나 느껴볼 부분이다.

김현우(기후위기 비상행동, 탈성장 대안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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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멜팅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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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활동을 하다보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남기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카메라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며 때론 저건 왜 찍는 걸까? 라는 물음이 생기기도 한다. 기나긴 집회의 연설과 가만히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덩그러니 놓인 가방, 때론이 공간과 무관해 보이는 곳에 카메라 렌즈가 향하는 것 같기도 하다. 메모를 남기거나, 현장의 소란스러움이 끝나길 기다리다 말을 거는 사람도 본다.

우리는 이러한 ‘인권’의 기억을 담은 사진과 말을 인권 기록이라 부른다. 현장과 무관해 보였던 카메라의 렌즈에는 그곳에서 존재하는 존엄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있다. 영화나 책과 같은 기록, 성명서나 자료집처럼 인권운동이 일상적으로 만들어온 기록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남겨져 있다.

인권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하며 기록 속에 담겨진 것들을 접한다. 인권운동에서 주장하는 것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폭력과 차별이 만들어지는 구조와 그 속에서 겪게 되는 사람들의 아픔,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받치는 마음이 그것이다.

하지만 인권의 현장을 담아온 기록이 모두 ‘인권적’이진 않다. 기록은 그 당시의 현장만이 아닌, 그때의 운동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래된 기록에는 인권 침해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어 피해생존자가 이 기록을 접했을 때 다시 그 고통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한다. 때론 피해자로서의 모습만을 강조하기도 하고 강

인한 투사로서의 모습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권운동이 무엇을 어떻게 ‘재연’할 것인지, 인간의 존엄을 상기시키기 위해 자칫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무너트리지 않는지 지금도 고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기록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현장을 잘 전달하는 소식통 수준에서 시작을 했던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겠다. 나라도 하자.”는 말처럼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때의 현장이, 잊힌 기억이 아닌 지금의 기억이 된다. “계급의 위대, 전형성이라는 말을 되게 많이 썼어요. 전형성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가지고 어떤 노동자의 얼굴을 찍었을 때 이것이 정말 노동자 계급의 얼굴을 대표할 수 있는 그런 사진이냐”는 말은 당시 운동이 보여주려 했던 사회 모순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얼굴을 담은 세계가 가진 한계점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 담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투쟁하는 사람들의 결기에 압도당하면서도 그들의 삶에 투쟁만이 있지 않기에 그 이외의 삶에 대해 궁금해진다. 한 사람의 세계는 여러 면으로 이루어졌기에 여러 개의 기록은 또 다른 면을 채워낸다. 우리가 인권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건, 다양한 세계와 존엄한 삶의 방식들을 채워내기 위함이다.

기록은 남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양한 기록이 모이고 그 기록을 함께 나눈다면 기록은 사회적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존엄이 무엇인지, 공명하는 인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 모두 각자의 존엄에 대한 기록을 남기자. 그렇게 모인 기록을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힘을 연결하자. 인권기록을 통해 서로 말을 걸며 어깨에 기대어 보자.

훈창(인권아카이브)


인권아카이브 http://hrarchive.or.kr
인권아카이브는 인권기록을 정리하고 보존하기 위해 2016년부터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권아카이브 웹페이지에는 오랜 인권기록부터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기록까지 보존하고 있으며, 누구나 손쉽게 자료를 볼 수 있도록 원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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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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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수백 개의 메시지가 쌓여 가고 검색 몇 번이면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요즘. 텍스트와 이미지로 알고 있고 그렇게 만나는 것으로도 내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자조할 때쯤 40일간 현장을 돌아보는 순례에 함께 하게 됐다. 문정현 신부의 이야기처럼 촛불의 내용을 채우지 못함으로써 검찰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순례를 준비했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설사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 해도 지금껏 싸워온 사람들은 투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란 걸. 이미 몇 번의 민주 정부가 심지어 ‘촛불혁명’이라며 세워진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권력이 바뀌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것이란 걸 여실히 증명하지 않았나.

‘지금 당장 기후정의, 차별을 끊고 평등으로, 일하다 죽지 않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 전쟁 연습 말고 평화 연습’ 이라는 네 가지의 의제를 가지고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자는 것이 순례의 출발이었다. ‘만남’ 자체가 중심에 선 운동이었다. 제주에서 출발해 전국을 돌아보며 매번 2시간 정도 시간을 들여 차분히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세상을 만나는’이라는 봄바람 순례단의 슬로건처럼 순례단은 우리가 다른 세상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곳곳에서 자본과 권력에 맞서 다른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던 깊은 자부심 때문이었다. 자신의 노동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이 살아온 지역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들이 지키고 싶은 진실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펄럭거리는 노상 천막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싸우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고통이 있는 곳에서 존엄하게 살고자 하는 존재들의 힘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투쟁은 시골의 작은 이야기로 비정규직들의 외로운 싸움으로 다른 성별,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수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축소되어 있다. 하지만 결코 투쟁하는 사람들은 소수가 아니었다.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세상을 말하는 사람들, 그 곁에 선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불평등과 차별은 핍박받는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거대한 이익 앞에 놓인 이 땅에 사는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오늘 하루를 안전하게 깨끗하게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던 이면에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순례 내내 들었던 고민이었다. 하지만 봄바람 프로젝트_여기 우리가 있다 상영회를 통해 이 고민도 서서히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21명의 감독들을 통해 재구성된 이 영화를 접하고 다시 고민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렇게나 많은 세상의 고통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된다면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고 익숙한 공간, 주제, 지역을 떠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다가갈 때, 사람들이 서로 교차할 때 운동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혼자가 아니란 걸. 싸우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란 걸 느낄 때 든든한 마음으로 다른 세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우리가 있다.

딸기(평화바람, 봄바람 순례단)


평화바람 gunsanpeacemuseum.kr
군산과 제주 강정에서 군사기지에 반대하며 평화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군산에서는 평화박물관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의 평화운동의 역사와 현재성을 알리며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을 바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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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명: 우린 같지만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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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서울의 한 마을에 청소년 퀴어 노랭, 똘추, 복순이 살았습니다. ‘노똘복’은 자신과 같은 퀴어 청소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영화는 10명의 청소년이 자신의 성소수자 정체성을 차례로 소개하는 화면으로 시작해, ‘노똘복’ 세 사람이 자신과 같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따라갑니다. ‘노똘복’은 집, 학교, 사회에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환경을 마주하고 있는 다른 청소년들의 안부를 궁금해했고,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더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였습니다.

2015년 활동을 시작한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에는 매일같이 ‘노똘복’과 같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찾아오고, ‘노똘복’과 같은 마음과 고민을 나눠줍니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주변에서 접하기 어렵고,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나 커뮤니티가 거의 없다 보니, 도대체 나 말고 청소년 성소수자가 있긴 한 건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알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기 때문이겠지요. 분명 청소년 성소수자는 우리 세계 안에서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임에도, 집과 학교, 미디어 등에서 마치 없는 존재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설령 존재가 드러난다고 해도 차별과 혐오로 힘들어한다는 모습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노똘복’ 세 사람은 직접 자신들과 같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찾아 나섭니다.

‘노똘복’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청소년 성소수자를 찾기 위해 SNS(온라인)뿐만 아니라 동네 곳곳에 포스터(오프라인)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는 여러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전봇대에 붙여 두었던 포스터는 어디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예 사라져버립니다. ‘마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이런 순간들은 청소년 성소수자가 나를 드러내길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노똘복은 순간 당혹감을 느끼면서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한 듯 다시 한번, 이번에는 더욱 꼼꼼하게 포스터를 붙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여기 있다’라는 당당한 존재감과 다른 청소년 성소수자와 꼭 만나고자 하는 열망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이렇듯 누군가의 용기 있는 시도가 결국 우리를 닿게, 서로 연결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용기 있는 시도로, 드디어 전국에서 모인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만나 “안녕하세요”라고 들뜬 인사를 나누는 순간은 어쩐지 뭉클하기까지 합니다. 여느 청소년들처럼 마라탕과 떡볶이를 먹으며, 처음 정체성을 깨달은 순간, 커밍아웃과 나의 안전에 대해서 솔직한 이야기들을 터놓습니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듣는 사람’이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성소수자라는 나의 중요한 정체성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드러내는 일은 귀하고 드물기에, 누군가가 사려 깊게 경청해주는 경험은 나라는 존재의 어떤 한 부분을 제외한 채가 아니라 온전히 한 사람으로 존중받는 경험일 것입니다. 어떤 한 마디에 순간 모두 웃음이 터지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건 정말 싫다고 공감하고, 차이점을 발견하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관객 또한 은근슬쩍 이들과 함께 화상전화를 하는 것처럼 노트북 앞으로 초대되고, 경청하게 됩니다.

영화상에서 청소년 성소수자가 정체성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공간은 ‘노똘복’의 학교 또는 온라인입니다. 물론 2020년이었다면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이는 청소년 성소수자가 안전을 느낄 수 있는 공간과 커뮤니티가 얼마나 부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식사하면서 청소년들이 “‘외부’가 무섭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 한편 ‘외부’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는 당당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얘기합니다. 부모님에 관한 얘기에서 가늠할 수 있듯 ‘내부’라고 해서 반드시 안전한 곳은 아니며, 그 때문에 나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안과 밖이 아닌 무엇이 청소년 성소수자가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살게끔 하는 가능성의 조건일까요?

10명의 청소년 성소수자가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준 말들을 한번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도 누구든 자연스럽게 여기면서 하는 대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게 잘못된 것이지 성소수자가 잘못이 아님을 아는 것,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동료들, 인권을 바탕에 두고 만날 수 있는 곳들. 이런 것들이 나는 성소수자로서만 혹은 성소수자 정체성은 제외하고서가 아닌 다양한 결을 지닌 총체적인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우리 사회에 잘 드러나지 않던 목소리를 통해 지금 여기,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지희(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http://DDingDong.kr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이하 띵동)은 위기 상황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합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신체적‧정신적 안녕을 보장받고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에 대한 자아존중감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합니다. 띵동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고, 자립을 위해 도움을 주는 종합적인 기관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4시간 운영할 수 있는 주거대안공간 설립과 더불어, 전국에 있는 청소년 쉼터가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이 되도록 변화를 만들어내는 ‘홈 프라이드 홈(Home, PRIDE HOME)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42인권해설

인권해설: <코리도라스>

인권해설

미래를 감금당한 몸

“9살 때부터 장애인 시설에서 살아가다가 30살이 되던 해에 임대주택으로 자립하여 생활하고 있다”
간결한 이 담긴 무수한 치열함을 어떻게 수 있을까 글을 시작하며 잠시 고민이 들었다.

2021년 2월 16일 3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았던 또 다른 누군가가 시설을 뛰쳐나와 장애여성공감을 찾아왔었다. 시설은 ‘가출’이라 당사자와 지지자들은 ‘탈출’이라 말한 탈시설이었다. 그의 탈시설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퇴소 절차가 진행되기까지 약 3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설을 나가고 싶은 의사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면서, 정말 당신의 의지인가? 탈시설을 강제로 이끄는 운동단체가 배후에 있지 않은가? 무슨 목적으로 나가는 것인가? 시설을 나간다는 의미를 이해하는가? 라는 질문을 공무원, 시설관계자, 장애인 학대 상담 기관 관계자에게서 수없이 들었다. 그가 시설에 들어갔던 순간에는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 시설을 나오려는 순간 봇물 터지듯 터졌다. 마침내, 그를 옥죄었던 시설장의 ‘승인’을 받고서야 공식적으로 시설을 벗어날 수 있었다. 3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았던 시설을 나온 이유를 그는 단 한 줄로 설명하였다. “그곳은 집이 아니에요”

몇십 년을 머문 공간이 여전히 집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런데도 그 공간을 떠난다는 것, 떠나야 한다는 것, 떠나고 싶다는 것의 무거움은 탈시설의 근거이자 의지이다. 우리는 더 이상 시설의 삶이 얼마나 열악한가를 말하고 싶지 않다. 2009년 마로니에 8인의 투쟁으로 시작되었던 그 처절함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꺼내야 하는가 어지러운 마음이 든다. 그것은 대구 희망원과 루디아의 집 등 시설 안에서 여전히 진행되는 지옥 같은 광경이다. 그런데도 박동수는 그것을 구태여 강조하지 않는다. 다른 세상을 그려내야 살아갈 수 있었던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고 담담히 말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 또한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 함께 살아가는 타인으로, 증언자로 목격하고 질문하고 기억하며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오래도록 함께했을 시설의 선생님들은 끝끝내 알아듣지 못한 동수의 말을 어째서, 진산은 알아듣는가? 자신을 아버지라 칭하는 시설 원장은 어째서, 그의 아들인 박동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까? 실로암의 ‘집’은 왜 따스한 방바닥과 온기는 켜지 않은 채, ‘고깃덩어리’들이 전기장판 위에서 익어가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먹고 자고 씻고 배설하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기본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온전히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몸에게 이런 삶의 경험은 어떤 감각을 가지게 할까? 장애여성공감 활동 현장에 경험에 비추어보면 평생 길들여진(폭력과 돌봄이 때론 분리하기 어렵게 뒤엉켜 있는) 손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훨씬 더 큰 공포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도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의지는 시설이라는 집단거주의 형태가 바로 폭력임을 온몸으로 말한다. 나의 몸을 돌보지만 나를 바라보지 않는 곳. 그저 숨 쉬는 덩어리 중 하나로 덩그러니 시간을 살해하는 곳. 모든 가능성과 미래조차 감금된 채 이곳에서 살아가라는 명령은 시설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도 유지된다.

 

이곳 또한 지옥, 그러나 나의 전장(戰場)인 ‘나의 지옥’

화면 속 시설의 한 선생은 박동수에게 말한다. “어디 구석방에, 다락방에서 시들어 가는 줄 알았더니” 요보호자, 수용의뢰서, 전원 조치 단어들은 박동수의 몸을 여전히 다른 언어로 얽어매고 있다.

“지옥 같은 이런 곳에서 살면 내가 죽겠더라고, 내 시로 다른 세상을 만든 것 같아. (나와서는) 여기는 도망갈 데가 많으니까” 박동수의 독백은 이곳 또한 도망가야 하는 장소임을 고백한다. 어느 공간에서도 박동수의 몸은 환대받지 못한다. 욕망과 욕심, 삶의 켜켜한 의지는 채워지지 못한다. 그의 자위는 집에서도 성공하지 못한다. 비장애 동료의 청첩장을 받고 떠올리는 거절의 연애편지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말한다. 이기적인 하나님은 시설 밖에서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사람들은 그가 어느 구석진 방에서 시들어갈 것이라 무례하게 말한다. 선별되는 몸, 부정되는 몸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었으리라.

박동수는 괴롭고 허무하고 외롭고 다채로운 이유로 삶이 괴로우며 동시에 충만하다. 이 시간은, 그리고 싸움은 명확하게 박동수의 것이다. 그것은 시설 안에서의 싸움과 유사하지만 다르다. 이곳에서는 맞붙어 싸울 구체적 실체가 있다. 너무나 많은 삶의 과제가 그의 실패와 승리와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박동수는 그 몫을 온전하게 자신의 몫으로 움켜쥐고 있다. 갈 수 있는 미용실, 반찬가게, 옷 가게, 맞추고 긴장해야 하는 활동 보조인 이 모든 것은 싸움이고 승리의 결과이다. 이 모든 시간이 그의 전장(戰場)에서 획득된 것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시가 아님을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글로 쓰는 시가 어려워진다는 박동수의 말은, 그의 모든 시간이 시로 쓰이는 그리고 분투하는 시간임을 마주해야 한다는 말과 같이 들렸다. 그는 백지 대신 사회라는 이 확실한 공간에서 관계와 울분과 분노와 공허와 외로움과 그리고 그 모든 삶의 시간으로 시를 쓰고 있다.

아름다움을 영위하기 위해 수조에 갇힌 코리도라스를 소유하는 그의 방은, 그의 존재로는 아름다워질 수 없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또한 그가 선택한 아름다움이 그의 방에 놓일 수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불가능과 선택이 바로 그의 시임을 이제야 비로소 시작된 그의 싸움이지 않을까. 그 전장에서 스스로 마침내 아름답기를 연대로 대하며 응원하자. 그 싸움에 연대해야 할 이들은 오늘도 지하철 투쟁을 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투쟁 열차에 함께 탑승한 시민일 것이다.

진아(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공감 https://wde.or.kr/
장애여성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장애여성을 배제하는 제도와 기준이 가진 문제에 공감하고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1998년에 창립했습니다. 장애여성공감은 장애여성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존중받고 장애여성의 선택과 결정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며,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는 움직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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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당신과 나를 잇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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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를 잇는 법>은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 앞 농성에 돌입하던 2021년 11월 8일의 기억을 소환한다. 비가 내리는 날, 국회 앞에 모인 이들은 무지개 우산을 기둥 삼고 테이프로 붙인 비닐을 지붕 삼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우리만의 비닐 농성장을 세웠다. 농성 천막 반입을 막으려는 공권력의 필사적인 방해 속에서 ‘평등의 원칙’을 요구하며 비닐지붕 아래 함께 서 있던 ‘우리’는 누구였을까, 또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2030 퀴어/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공유하는 다섯 감독들의 이야기는 ‘차별에 맞서는 우리’를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경계일 뿐인가, 누군가의 존재와 목소리를 삭제하지 않고 ‘다룰 수 있는’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람답게 살 권리’를 외치는 나는 누구와 함께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은가.

기본적으로 당사자 운동에서 정체성, 이름짓기의 정치학은 보편의 이름으로 차이를 삭제 혹은 융해시키려는 시도, 차별의 구세주 혹은 대리인 역할을 자처하는 국가 및 지배 권력에 대항해 당사자의 경험과 관점, 주체성을 삭제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여성’이라는 정체성 역시 성별 권력관계의 불평등에 분노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많은 여성에게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너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 사건 직후 남겨진 한 장의 포스트잇은 한국 사회의 젠더폭력에 맞서고자 하는 여성들의 대표적인 강력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시와 정체성에 기반한 저항의 언어는 항상 긴장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너’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선언하고 동일시할 수 있는 ‘나’는 누구인가?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나’로서 승인되고 대표되는가? 여성주의 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듯, 여성이 ‘여성’이라는 젠더 경험으로만 환원될수록 다른 억압체계로 인한 차별을 경험하는 여성들 내부의 차이(동일시할 수 없는 세계)는 가시화되기 어렵다. 또한 당사자 혹은 피해자로서 여성 정체성의 단일성이 강조될수록, 이를 해결해야 하는 주체의 자리에 ‘여성/자신’만이 남게 되기 쉽다.

동일성에 대한 긴장과 대표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성별 권력관계에서의 약자로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 성차별을 경험하는 대다수 여성의 피해 경험을 부정하거나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차별 운동의 역사에서 이는 여성 및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문화를 부정하고, 차별의 위계와 소수자 낙인을 이용해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의 문제를 회피하며, 보호와 처벌로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에 대한 요구를 잠재우려는 지배 권력의 근본적인 문제를 더 깊고 너르게 다루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러한 지배 권력의 폭력에 공통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부정의를 공통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저항을 재구성하기 위한 출발이다. 차별과 불평등에 기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부정의를 바로잡고 할 때 우리에게는 정상성의 기준을 질문할 수 있는 힘, 이를 함께 제기할 수 있는 더 많은 동료를 필요로 한다.

몽(차별금지법제정연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https://equalityact.kr/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차별의 예방과 시정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이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행동하는 연대체로, 2022년 9월 현재 167개 인권시민사회단체와 15개의 지역 네트워크가 함께 하고 있다.

47인권해설

인권해설: <로힝야를 거닐다>

인권해설

지난 5년간 미얀마 로힝야족 90만 명이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 생존해 있다. 이들은 2017년 미얀마 정부가 인종청소를 시도하자 피난처를 찾아 국경을 넘었다. 300여 마을을 봉쇄한 군인들은 민간인을 살해, 강간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해 갔다. 사망자만 수만에 이른다. 로힝야의 생활 터전과 역사, 경제적 토대와 정신적 근간이 되는 종교시설도 모두 파괴했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이를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이자 범죄로 알려진 집단학살(Gonocide)이라고 규정했다.

집단학살은 단기간에 발생하지 않는다. 로힝야족의 경우, 지난 60년 동안 박해받으면서 천천히 진행됐다. 예컨대, 토착 민족인데도 정부가 국적을 박탈했다. 로힝야들은 신분증이 없다. 셋째로 태어나면 그 아이는 가족부에 등록할 수 없었다. 2~3명 이상의 자녀를 낳게 되면 잡혀갔다. 이웃 마을과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려면 여행허가증을 발급 받아야 했다. 검문소에서 항상 괴롭힘을 당했다. 5명 이상 모여 예배를 볼 수 없었다. 결혼도 군·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았다. 학교 교육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고 아파도 병원에 가는 과정이 힘들었고 병원에서도 제대로 치료해 주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고 강제 뇌물도 줘야 했고 구금됐다.

난민캠프에서도 사정은 녹록지 않다. 좁고 허름한 텐트를 지어 임시로 생활하고 있다. 사생활 보호는 어렵다. 더위와 홍수에 취약하고 산사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40만 명의 아동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경제활동이 금지되어 있고,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캠프 밖을 이동하는 것도 제약이 있다. 캠프는 펜스로 둘러싸여 있어 열린 감옥을 연상케 한다.

로힝야들은 국제인권법이 보장하는 시민·정치적 권리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전면적으로 침해됐다. 또 2017년에 발생한 참혹한 범죄는 국제형사법에서 처벌하는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 집단학살에 해당한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미얀마 정부의 집단학살 방지협약 위반의 건으로 재판이 진행 중이고,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식 수사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하지 않다. 300여 마을에서 발생한 학살에 대해 손도 못 대고 있다.

로힝야 피해생존자들은 진실과 정의를 원한다. 국가폭력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을 바란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권 회복과 차별적 제도 및 관행을 시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고향으로 돌아가서 로힝야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되는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우리는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60년간 잊힌 이들은 다시금 잊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럼 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김기남(사단법인 아디)


사단법인 아디 www.adians.net
사단법인 아디는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피해자와 피해커뮤니티의 인권침해를 기록, 옹호하고, 심리트라우마 힐링 및 경제적 자립 등 지속가능한 커뮤니티 회복을 위한 활동을 해 오고 있습니다. 2016년 설립된 아디는 미얀마 평화도서관프로그램, 로힝야 인권기록사업, 로힝야 여성난민심리지원사업,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 및 트라우마힐링센터, 티베트 인권기록사업 등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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