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해고자

인권해설

-전해투

5·6공하에서 전국적으로 노동 운동과 관련해 5,200여명이 해고되었다. 그 속에서 1992년「전국 구속·수배·해고노동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가 결성된다. 이들은 1987년 이후 노동 조합 운동을 주도해왔던 조합 간부들이 모인 것이며, 개인의 해고 문제 해결에 머물기보다는 해고 문제의 근본적 해결과 노동 운동 탄압을 분쇄하여 노동 운동을 강화·발전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1993년 해고 노동자는 3600여명에 이르는데, 전해투는 1993년 60여일에 가까운 단식·삭발 투쟁을 1,2차에 걸쳐 벌였으며, 청와대·노동부·그룹본사 등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직 싸움을 벌였다. 그 해 노동부에 복직 신청을 한 해고 노동자가 1599명인데 반해 복직 해결자 수는 586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민 정부 들어 노동자들이 복직되기는커녕 노동법 개정을 기다리는 노동자에게 공권력이 투입된다. 1994년 철도 민주화를 위한 전국기관차협의회 노동자들의 합법적인 농성에도, 정상적인 절차를 밟은 지하철 파업에도 대규모의 공권력이 투입된다.

1995년 4월 전해투 노동자들이 부상당해 입원한 사당 의원에 경찰이 난입하는가 하면, 5월 한국통신노조의 준법 투쟁을 ‘국가 전복 기도’라고 규정하며 탄압한다.

그리고 현대 자동차 해고노동자 양봉수씨의 분신을 계기로 한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대량 구속, 6월 대우 그룹의 신경영 전략을 비판한 대우 조선 박삼훈씨의 분신, 12월 병역 특례 해고 노동자 조수원씨의 자살 사건 등 복직 싸움은 길고 험난하다.

전해투는 1995년 11월 11일 역사적인 민주 노총 출범후 이름을 민주노총 산하 「해고자 복직 투쟁 특별 위원회」로 바꾼다. 1996년 6월 10일 현재 공공 부문 해고 노동자는 242명, 이중 문민 정부 들어 해고된 노동자 162명으로, 이는 6공 정권 5년 동안 해고된 83명의 2배에 해당한다. 아직도 공공 부문 해고자 560여 명을 비롯해 1천여 명의 해고 노동자가 일터로 돌아가길 희망하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15인권해설

인권해설: 당신의 이웃집 아들

인권해설

고문은 구시대적 인권 침해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현상이다. 합법적인 ‘수사’와 ‘고문’사이에 뚜렷한 구분선이 없기 때문에 고문의 문화는 한 사회에서 얼마든지 쉽게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통제와 가정·학교에서의 가혹한 훈육이 당연시되는 문화적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는 번창할 수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경찰서와 감옥에서의 잔인성과 가혹 행위가 문제제기 없이 받아들여지기 쉽기 때문이다.

구타와 불로 지지는 고문, 전기 고문이 가장 보편적인 고문 형태로 남아 있을 뿐더러, 자취가 안남는다는 이유로 잠안재우기나 고통스런 자세를 장시간 취하게 하는 고문 등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1995년 1월 유엔 고문방지조약의 당사국이 된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안기부와 수사 기관의 변호사·가족 접견 금지, 잠 ?안 재우기, 집단 구타 등의 관행이 계속 되고 있다. 소위 인권 선진국들도 예외는 아니다. 오스트리아·독일·프랑스 등에서는 비유럽인이나 인종적 소수자, 망명처를 구하는 난민들에 대한 경찰의 가혹 행위, 부당한 총격과 살상 행위가 경적을 울리고 있다. 영국은 전기 충격 곤봉과 다리 족쇄의 수출로 자국 인권 단체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미국은 경찰의 과다 폭력으로 매년 시당국이 수백만 달러의 배상금을 피해자에게 물어주고 있으나, 책임자가 형사 처벌된 예는 드물다.

어떤 예가 되었든간에 고문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비인간화시키는 행위이다. 고문피해자는 이렇게 울부짖는다.

“그짓(고문)을 받아들일 때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부터 수치심을 느꼈다. 나는 내 존엄성을 지키고 싶었다.”

<인권운동사랑방>

14인권해설

인권해설: 숨겨진 이미지

인권해설

‘실종’은 1974년 라틴 아메리카의 언론과 인권 단체가 처음 쓴 말로 단순한 행방 불명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실종자 가족 연합의 정의에 따르면, “실종은 정부 기관원, 공무원 또는 정부의 지원 또는 묵인하에 행동하는 사적 집단의 조직원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억압, 방지, 방해할 의도로 행하는 것으로, 실종자의 운명을 그의 가족, 친구, 지지자들이 모르게끔 감추기 위해 의도된 모든 행위”를 의미한다.

실종에 관한 1995년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1994년에만 적어도 20여 국에서 실종이 발생했으며, 1980년부터 유엔에 보고된 실종 건수만 4만 5천 1백 34건에 이른다. 그러나, 이 수치는 실종자 가족이 보복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관련 단체에 보고한 경우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실제 숫자는 이를 훨씬 웃돌 것이 확실하다.

‘왜, 어떻게, 어디에’를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실종의 특성 때문에 실종자 가족들이 빠지는 고통의 늪은 깊기만 하다. 한 실종자의 어머니의 말을 통해 그 고통의 언저리를 짚어볼 뿐이다.

?”내 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면, 나는 그애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잊거나 잊을 수는 없겠지만 시간과 더불어 그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거리에서 그애를 데려 갔다면, 그애가 맞았다면, 그리고 그 이후 아무도 그애를 보지 못했다면, 뭘 먹는지, 추운지, 잘 곳이 있는 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은 끔찍하다. 사악한 무리들의 손아귀에 내아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찌 참을 수 있는가? 그들이 그애에게 무슨 짓을 할지를 생각하면서 어머니가 뭘 느끼는지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느냐?”

<인권운동사랑방>

12인권해설

인권해설: 악마의 자식들

인권해설

르완다의 학살은 20세기 인류 최대의 비극으로 불리우고 있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채 3개월도 못되는 기간 동안에 50만명에서 1백만명 사이의 인명이 집단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극의 원인은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종족 갈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집단 학살’의 연구자들은 르완다의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 투치와 후투간의 종족 갈등의 씨앗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이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 종족의 차이를 불거지게 한 주범으로서, 두 집단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를 통치전략으로 삼은 식민주의를 비판한다.

투치인인 소수 지식인이 전체 인구의 85%에 해당하는 후투인을 지배하면서 후투인은 정치·교육·경제적 무대에서 완전히 배제당해야 했다. 독립후 후투인의 쿠데타와 투치당국의 보복, 갈등과 두려움의 확산, 또다른 살인과 보복이 꼬리를 물게 되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학살의 무대를 연출하게 된 것이다. 상대 종족의 여성에 대한 강간과 살인은 이러한 무대의 보조 장치였다.

<인권운동사랑방>

10인권해설

인권해설: 우리는 왜 노래하지 않는가?

인권해설

-대만 현대사의 ‘그늘’, 2·28사건과 백색 테러

15-17세기에 걸쳐 대만에 들어간 중국인을 원류로 하는 대만인을 본성인(本省人)이라고 부른다. 청일 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은 2차대전의 결과 1945년에 중국으로 복귀했으며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만을 장악하면서 대륙에서 속속 ‘外省人’이 대만으로 들어갔다. 이런 배경에서 1947년 2월 27일, 본성인과 외성인의 충돌로 야기된 대규모 유혈사건이 바로 ‘2·28사건’이다.

타이페이의 야시장에서 단속경찰이 담배를 암거래하던 여성을 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에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함으로써 시민 1명을 사망케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항의하는 ‘본성인’의 시위는 삽시간에 전국에 확대되었으며 대륙에서 급거 증파된 장개석군은 이를 철저히 탄압, 2만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본성인’의 대규모 저항을 탄압한 국민당 정권이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에 쫓겨나 중앙 정부를 대만으로 옮긴 직후인 1949년 5월에 계엄령 (이것은 1987년까지 38년간이나 계속되었다)을 선포하면서 대규모 ‘빨갱이 사냥’을 벌이는 데 1953년 말까지 계속된 이 백색 테러의 진상은 지금도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반에 걸쳐 일어난 이 광적인 과정은 지금도 대만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1988년, 이등휘 정권이 출범한 후, ‘2·28사건’의 진상조사가 진행되었으며 백색 테러의 생존자들이 화소도(火燒島=정치범 유배지)에서 모두 석방되었다.

당시 국민당 정권은 정권 유지의 차원에서 체포 영장이나 절차없이 사람들을 끌어갔고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해 이들을 살해하고 자루에 담아 매장하거나 수장하였으며 심지어는 국방 의학원의 해부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했던 2·28 사변의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증언을 듣는 이 영화는 화려한 영화적 수사를 배제하고 담담한 증언에 의존하고 있다. 관 샤오렁이 만든 이 영화는 우리에게 대만의 역사적 비극을 다룬 또 하나의 영화 <비정성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비정성시>가 당시의 사건을 극화해서 보여준 것이라면 이 영화는 역사 속에 실존하는 피해자들이 증언하는 진실인 것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비정성시>를 떠올리는 또 다른 이유는 <비정성시>의 감독인 후 샤오센이 바로 이 영화의 공동 제작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

14인권해설

인권해설: 한 민족의 죽음

인권해설

-동티모르

최근 한국의 언론은 동티모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는 다름아닌 올해의 노벨평화상이 벨로 동티모르 카톨릭 주교와 동티모르 독립 혁명 운동 대변인 조세 라모스 오르타에게 돌아간 탓이다. 그러나 이미 3년전인 93년부터 「한국인권단체협의회」등은 동티모르 독립을 위한 운동을 벌여왔으며, 그 결실로 최근 「동티모르연대모임」이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티모르인들의 운명이 뒤틀린 것은 서구열강이 진출하면서부터인데 16세기 말경 티모르 섬의 서쪽은 네덜란드가, 동쪽은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삼았고 이 상황은 1949년 인도네시아가 서티모르를 포함한 네덜란드령을 영토로 하여 독립할 때까지 이어졌다. 동티모르는 1974년 포르투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진 것을 계기로 이듬해 11월28일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해 12월7일 새벽, 미국과 호주의 묵인과 지원하에 무력 침공이 시작된다. 인도네시아 군대에 강력히 맞서 동티모르는 1978년 말까지 3년 동안 전투를 치룬다. 이 과정에서 전체 인구의 1/3인 20만명이 살해되거나 굶어 죽었다.

이런 동티모르 문제가 국제 사회의 관심을 되살리게 된 것은 1991년 11월12일 수도 딜리에서 벌어진, 최소 271명이 죽고 250여명이 실종된 산타크루즈 학살 사건이다. 지금도 동티모르인들은 언제든지 고문, 살해, 강간을 당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군대는 동티모르 여성들로 ‘정신대’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14인권해설

인권해설: 하비 밀크의 시대

인권해설

1995년 6월 26일 한국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5개 남녀 동성애자 인권 단체가 「한국 동성애자 인권 운동 협의회」발족한다. 6월 27일은 전세계 동성애자들의 기념일이다. 동성애 운동의 시작은 1969년 6월27일 스톤월 항쟁에서 시작된다. 이는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에 의한 최초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희생양’으로 쓰여왔다. 1969년 6월 미국 뉴욕시장 선거에 나선 공화당원 존 린드레이는 재선되기가 어렵자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강력한 가부장이미지를 창출하는데 이를 통해 동성애자에 대한 대대적 단속이 벌어진다.

1960, 70년대도 마찬가지. 성혁명, 성개방이라는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백인중산층 남성을 중심으로 당시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기 탈출구는 동성애였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에이즈라는 불치병이 사람들에게 위협적 존재로 등장하자, 미국 사회는 동성애에 대한 공포증으로 그 화살을 돌린다.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이 현대에 재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게이적 폭력을 통해 인권 운동 세력은 동성애자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국가적 권위를 빌린 여러 가지 폭력이 동성애자들에게 가해졌는데, 이것이 동성애자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동성애를 소수 민족, 소수 집단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식 전환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

이제껏 우리 사회에 있어 동성애 문제는 남의 문제로 취급되어왔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동성애자들이 갖고 있는 성적 지향성,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강제 구금되거나 고용 기회를 위협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없다. 이제 한국에서의 동성애 운동의 시작은 “너만의 방에서 나오라”(Coming Out)는 구호 속에서 문제제기를 던지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16인권해설

인권해설: 지하의 민중

인권해설

구아라니, 파라카나, 콜라, 토바, 오고니, 리수…. 이 생소한 이름들은 무엇일까?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왔으나, 이제는 발붙일 곳 없는 땅끝에서 살아가야 하는 선주민의 이름들이다. 북아메리카에 150만,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에 1300만 등 현세계에는 3억 정도의 선주민 인구가 살아가고 있다. 유럽인들의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 이주에 뒤이은 세계시장의 발전으로 이들의 삶은 황폐화의 길을 걸어왔다. 전쟁과 질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토지와 다른 자원을 빼앗겨야 했으며, 오늘날 그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로,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고 있다. 한 예로 미의회의 알라스카 선주민에 관한 보고서는 “선주민은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며, 질병과 알콜 중독, 자기파괴적 행동, 문화적 붕괴, 자존감의 상실로 고통받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다수 주민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가장 격렬한 대립은 보통 땅을 둘러싼 것이다. 많은 선주민에게 땅은 그들 전래의 생존 방식, 사냥이나 채취를 위한 대상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땅은 그들에게 정신적, 심리적 안정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에게 남아있는 얼마 안되는 땅조차 자원을 개발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국가와 다국적 기업의 끊임없는 침탈로 위협받고 있다. 따라서 선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에 대한 통제권을 얻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유엔은 이들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하여 95년부터 10년간을 유엔이 정한 ‘국제선주민의 해’로 정했다. 이 기간이 끝날 때면 선주민 인구가 그들이 속한 국가와 평화로운 대화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인지, 이들의 땅에 가해온 다국적 기업의 끊임없는 자원 착취에 있어 어떤 태도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선주민이 자신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하며 살 수 있기 위한 국제적 지원이 있을 것인지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들은 땅끝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인권운동사랑방>

13인권해설

인권해설: 변화의 초상

인권해설

올해 4월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카톨릭 모든 관구의 정의평화위원회 앞으로 보내온 한 장의 편지는 브라질의 경찰 폭력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그것은 폭력의 수준을 넘어서서 계획적 살인에까지 이른다. 편지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사랑하는 형제, 저는 지금 막 브라질에 도착했고, 여기 상황은 대단히 심각합니다. 파라(PARA)주 경찰이 19명의 토지 무소유 농민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표적 학살이라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이 비극적인 소식에 관하여 수상한 점은 지금까지 성인 남자의 시신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린이들과 여자들의 시신은 살해자들에 의해 감추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학살은 브라질에서 토지를 둘러싸고 발생한 일련의 충돌중에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 브라질에서는 부유층의 20%가 전체 토지의 88%를 소유하고 있고, 극빈층의 40%가 단지 1%를 소유하고 있다. ‘불평등과 경찰 폭력’의 관계는 불의한 권력이 힘으로 다수를 누를 수밖에 없는 데서 빚어내는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14인권해설

인권해설: 전장의 여인들

인권해설

-일본군 위안부

일본은 식민지 또는 점령지의 13-18세 사이의 여성들 약 10-20만명을 강제로 취업을 시켜준다고 속여 군이 직접 나서거나 그리고 민간업자를 시켜서 강제적으로 모집한다. 그리고 군의 엄격한 통제하에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가하면서 성노예 생활을 강요했고, 패전 후에는 이 여성들을 유기, 살상하였으며 기록을 없애 역사 속에 폐기처분하려 했다.

이제 한국, 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중국 등지에서 그 피해자들이 나서 과거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1990년 11월 국내에서 일본군 정신대 문제를 제기하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발족한다. 정신대 문제가 밝혀지면서 진상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1991년 봄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과 더불어 신고센터가 개설되어 많은 사례가 접수되기 시작했다. 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되어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수요시위는 10월 23일로 238차를 맞았다. 수요시위 등 정신대 할머니들과 정대협의 용감한 투쟁으로 1996년 4월 52차 유엔인권위에서는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이행할 것을 권고하기에 이른다. 앞서 2월에는 ILO 전문가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성적 노예로 강제 노동을 금지하고 있는 ILO조약 제29호를 위반한 것이며, 일본 정부는 피해 여성들에 대한 보상을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게 된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반성과 사죄는커녕 국민의 후원금으로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위로금을 전달하겠다고 나서는데 이러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 크게 반발하여, 1996년 10월 18일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시민연대」가 발족한다. 온국민의 힘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선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

10인권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