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외투

인권해설

세계적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양심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폭력(자기 방위의 경우는 제외)을 사용하거나 주창하지 않은 경우로서 정치적·종교적·기타 양심상 견지된 신념 또는 인종적 기원, 성별, 피부색, 언어 등의 이유로 투옥, 구금, 기타 신체적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 우리 사회에서도 양심수란 용어는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이다. 70-80년대의 군사 독재 정권은 사상을 이유로, 표현을 이유로, 그리고 결사와 집회를 이유로 숱한 양심수를 배출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군사 독재의 터널을 빠져 나온 현 문민 정부 하에서도 양심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5백여 명에 달하던 양심수는 97년 8월 현재 9백여 명 선으로 늘어난 것으로 집계된다. 이 가운데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김성만, 사노맹 사건의 박노해·백태웅, 방북사건의 서경원·황석영 씨 등 문민 정부 이전의 구속자 58명도 여전히 포함되어 있다.

이렇듯 양심수들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각종 악법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구속자와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에 의한 구속자, 그리고 노동 쟁의와 관련한 노동 운동 구속자들은 매년 수백 명씩 양산되고 있으며, 특히 김영삼 정부 초기 줄어드는 듯 하던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정권 말기에 이르러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사상·표현 등을 이유로 갇혀 있는 양심수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수준을 재는 척도이다. 따라서 양심수의 석방 운동과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등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한 핵심적 과제인 것이다.

<이창조/인권하루소식>

17인권해설

인권해설: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인권해설

태평양 전쟁의 패전이 임박해서 일체의 지원이 끊긴 뉴기니아 전선 일본 잔류병들은 견디기 어려운 처참한 상황에 빠졌다. 굶주림과 말라리아, 동료들의 죽음은 잔류병들을 극심한 공포속으로 내몰았다. 태평양 전쟁 중의 뉴기니아 전선과 버마 전선이 병사에게 베트남 전쟁보다 더 가혹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백인을 ‘흰 돼지’, 흑인을 ‘검은 돼지’라고 부르면서 먹던 일본병들이 아군 병사마저도 먹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오쿠자키 켄조 (奧崎謙三)는 제2차 대전 중 독립 공병대 36연대의 병사로서 격전지 동 뉴기니아로 파병된다. 이 부대는 패주를 거듭하면서 지리멸렬이 되어, 결국 살아 남은 것은 1천명 중 36명에 지나지 않았다.

오쿠자키의 경력은 화려(?)하다. 부동산업자를 ‘과실치사’ 시켜 10년이라는 세월을 독방에서 보내는 동안 그는 자신의 진정한 표적은 천황임을 깨달았다. 출옥 후인 1969년 1월, 오쿠자키는 신년 하례 행사로서 황거(皇居-천황의 거처) 밸코니에 서서 국민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천황을 향해 “야마자키! 천황을 쏴라!”며 전사한 전우의 이름을 부르면서 새총으로 4개의 빠

찡코 알을 날렸다. 다시 독방행. 이 사건은 일본 패전 후 처음으로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한 직접 행동으로서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후 이른바 ‘황실 포르노 삐라’를 뿌리고 다시 독방으로 갔으며, 출옥 후에는 전 수상 다나까를 표적으로 삼았다. 이 영화는 그 무렵부터 약 5년에 걸쳐 촬영·편집된 것이다.

1983년에 오쿠자키는 과거 뉴기니아에서의 중대장 아들을 권총으로 쏘아 13년형을 받게되는데, 이 때 그의 표적에는 자민당 다나까 파 국회의원이나 남경 대학살 관계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준식/집행위원장>

14인권해설

인권해설: 갈릴리에서의 결혼

인권해설

2차대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그 자리에 나라를 건설한 이스라엘은 이후 아랍 여러 나라들과 빈번한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자리잡았다.

1967년의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고란 고원(시리아), 시나이 반도(이집트), 요르단강 서안 지대, 가자 지역을 점령했다. 이들 지역에 이스라엘은 자국민을 이주시켜 정착촌을 세웠고,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 이스라엘 투쟁에 대해 무력 진압으로 일관해 숱한 사상자를 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과의 오랜 반목은 세계의 화약고로 중동을 지목하는데 그 누구도 주저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런 중동에서 평화의 기운이 비로소 싹튼 것은 1992년 이스라엘 총선거에서 라빈이 이끈 노동당이 승리하면서부터다. 라빈 정권은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의 8개월간에 걸친 협상 끝에 이스라엘과 PLO와의 상호 승인, 가자지구 및 에리코에서의 팔레스타인의 잠정적 자치 시작, 자치 지역 확대를 위한 교섭, 점령 지역의 최종적인 지위를 5년 이내에 결정하기 위한 교섭 등에 합의했다. 이런 합의에 기초해 1994년에는 가자 지구와 예리코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가 시작되었고, 1995년에는 헤브론 지역을 제외한 요르단강 서안의 6개 주요도시와 450개 마을에서 27년만에 이스라엘군이 철수했다.

하지만, 중동 평화 협상의 주역이었던 라빈 이스라엘 수상이 1995년 11월 평화 협상과 철군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파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그후 이스라엘 우파 정부의 이스라엘 군 철수 연기와 협정 위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아라파트 대통령의 독재와 이에 따른 하마스 등 강경파의 투쟁 등이 뒤엉켜 중동에는 테러와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재연되고 있어 여전히 세계의 화약고로 남아 있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12인권해설

인권해설: 르완다 대학살

인권해설

한반도의 1/9밖에 안 되는 영토와 인구 7백만 명에 불과한 아프리카의 소국(小國) 르완다. 세계는 르완다를 끔찍한 학살과 내전의 나라로 기억한다.

94년 내전의 발발로 1백만 명이 학살되고 2백만 명의 난민을 떠돌게 된 르완다의 비극은 소수 종족(인구의 15%)인 투치족과 다수 종족(인구의 84%)인 후투족 간의 종족 분쟁의 결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식민 통치의 잔재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이해 관계라는 측면을 무시하고 르완다 내전을 논하기는 어렵다.

1차 대전 이후 르완다를 식민통치한 벨기에는 소수족인 투치족에겐 특권과 지배를 보장해준 반면, 다수족인 후투족에 대해선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는 등 철저한 분리 통치 정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증폭된 두 종족간의 갈등은 1990년 투치족 주도의 르완다 애국 전선과 후투족 정부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93년 한때 내전이 진정 기미를 보이기도 했지만, 94년 4월 6일 하비아리마나(후투족)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내전은 다시 확대되기에 이른다. 내전을 통해 정권은 다시 투치족에게 장악됐고, 후투족들은 대거 국외를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르완다 내전에서 프랑스는 친프랑스 정권인 후투족을 지원해 왔다. 프랑스의 목적은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하비아리마나 정부에 6백만 달러에 달하는 무기 구입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비아리마나의 독재에 불만을 느낀 후투족의 일부도 애국 전선에 참가하게 되었고, 94년 내전은 단순한 종족간 분쟁을 넘어 독재 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된다. 실제로 후투족 정부는 투치족과 후투족에 대한 구별없이 반정부 세력에 대해선 닥치는 대로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창조/인권하루소식>

20인권해설

인권해설: 사랑해요

인권해설

세계적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양심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폭력(자기 방위의 경우는 제외)을 사용하거나 주창하지 않은 경우로서 정치적·종교적·기타 양심상 견지된 신념 또는 인종적 기원, 성별, 피부색, 언어 등의 이유로 투옥, 구금, 기타 신체적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 우리 사회에서도 양심수란 용어는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이다. 70-80년대의 군사 독재 정권은 사상을 이유로, 표현을 이유로, 그리고 결사와 집회를 이유로 숱한 양심수를 배출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군사 독재의 터널을 빠져 나온 현 문민 정부 하에서도 양심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5백여 명에 달하던 양심수는 97년 8월 현재 9백여 명 선으로 늘어난 것으로 집계된다. 이 가운데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김성만, 사노맹 사건의 박노해·백태웅, 방북사건의 서경원·황석영 씨 등 문민 정부 이전의 구속자 58명도 여전히 포함되어 있다.

이렇듯 양심수들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각종 악법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구속자와 집시법(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에 의한 구속자, 그리고 노동 쟁의와 관련한 노동 운동 구속자들은 매년 수백 명씩 양산되고 있으며, 특히 김영삼 정부 초기 줄어드는 듯 하던 국가보안법 구속자는 정권 말기에 이르러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사상·표현 등을 이유로 갇혀 있는 양심수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수준을 재는 척도이다. 따라서 양심수의 석방 운동과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등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한 핵심적 과제인 것이다.

12인권해설

인권해설: 유토피아를 찾는 사람들

인권해설

군인 출신 정치가로서 1946년에 대통령선고에 당선된 독재자 후안 도민고 페론(1895-1974)은 반공의 바탕 위에 초등교육 확장 등 개혁 정책을 단행하면서 민족주의적 경제 체제를 세웠다. 결국 그런 정책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 외관상의 개혁적·민족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아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페론주의’라는 아르헨티나에 특유의 사상·정치 운동이 발전되었다. 이 세력은 1955년 군부 쿠데타로 페론이 실각·망명한 뒤에도 군사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 무시 못할 세력으로 남아 군사 정권과 각축을 벌였다.

1970년대 들어 정치적 폭력과 민중들의 항쟁이 악순환을 거듭하는 가운데 페론주의자와 급진파의 연합은 군사 정권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망명중이던 페론의 귀국을 추진, 1973년에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1974년에 페론 사망). 그러나 혁명과 반혁명 양세력의 폭력적 갈등은 고조되고 경제가 악화되면서 이 민간 정부는 위기를 맞게 되어, 결국 1976년의 군사 쿠데타를 초래하게 된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계속되는 군부 통치 기간, 아르헨티나는 암흑의 시기였다. 좌익 게릴라 소탕을 구실로 군사 정권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테러 (‘더러운 전쟁 (dirty war)’)를 감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암매장되었으며,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1만 명, 그러나 비공식 집계에 의한 사망 및 ‘실종’자수는 3만 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1983년, 대통령이 된 급진시민동맹 (UCR)의 알폰신은 과거 청산 작업에 착수했다. 연방 고등 법원은 군정 초기 대통령인 비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하는 등 일부 군인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군부 세력의 강한 저항을 받아, 많은 군인들의 인권 범죄를 불문에 붙이는 방향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나마 처벌받아야 할 나머지는 89년에 정권을 잡은 페론주의자 메넴에 의하여 모두 사면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문민 시대’는 아직도 진정한 민주화와는 먼 거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13인권해설

인권해설: 쇼아

인권해설

제2차 세계 대전에 있어, 나치의 최종 목적은 전 유럽에 패권을 확립한 다음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게르만 민족이 지배하는 광대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었다. 이것이 나치의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1933년에 정권을 잡은 나치는 밖으로 전쟁의 수행, 안으로는 이 최종 목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정치적, 유전적, 인종적 요소를 제거해 나가는 계획을 놀라운 합리성을 가지고 추진시킨다. ‘홀로코스트'(유태인에 대한 대량학살)라고 불리는 역상 미증유의 학살 사건은 이렇게 하여 준비되었다.

1. ‘T4작전’ -“생존할 가치가 없는 존재”의 말살

암호명 ‘T4작전’은 나치의 대량 살인과 생체 실험의 출발점이었다. 1939년부터 준비된 이 신심 장애인 말살 작전은 독일 전국에서 “생존할 가치가 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신심 장애인들을 6개 ‘안락사 시설’로 집결시킨 다음 2년 동안에 7만명 이상을 살해했다. 이들에 대한 생체 실험을 거쳐 1940년에 이들을 처음으로 일산화탄소로 살해할 것을 결정한 나치는 패전까지 약 20만명의 장애인들을 살해했다. 나치의 대량 가스 살인은 약자와 국외자(동성애자 등)를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2. 동부전선 – 공산 당원, 지식인, 유태인, 신티-로마(집시)민족에 대한 즉시 학살

동부전선 전반에 걸쳐 나치는 비밀 기동 부대를 투입하여 점령 지역의 포로, 주민 중에서 공산 당원, 신티-로마 민족을 색출, 집단적으로 총살했다. 독소전 초기 10개월 동안에 55만 명을 넘는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배기 가스를 이용한 살인 트랙도 이 때 대량 투입되었다.

3. 유태인에 대한 압박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1933년부터 보이콧이라는 형태로 시작한 유태인에 대한 압박은, 시민권 말살이나 유태인과의 혼인 금지를 규정한 뉘른베르크법(35년)으로 합법적 모습을 띠고 본격화한다. 이것은 1938년의 ‘수정의 밤’ 사건(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조직적 테러 시작)으로 이어지는 데, 이날 밤 방화된 유태인 교회(시나고그)는 265개에 이르며, 그 무렵 생긴 수용소로 납치된 유태인만도 3만명에 이른다. 1939년에 시작된 독일 국내에서의 유태인 강제 이송은 1940년 들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완성과 더불어 확대되고 동시에 독일 점령지인 우지, 바르샤바에서 유태인 게토(도시의 일정 구역에 유태인을 가둬버림)가 생긴다.

4.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

독일의 전 점령 지역에서의 유태인과 신티-로마(집시)민족 절멸 작전이 벌어지게 되는 데 나치는 이것을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이라고 불렀다. 1942년의 반제이 회의는 ‘최종 회결’을 전 유럽적 규모로 조직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한 실무 회의였으며 유태인 학살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했다. 이 회의에서 모두 1천1백만 명의 유태인이 절멸 대상으로 정해졌고 실제로는 6백만 명이 학살당했다. 나치가 실행한 ‘절멸’ 방법은 4가지가 있었다. 곧 ① ‘게토’에 봉쇄하여 기아와 전염병으로 사멸 ② 동부 전선 특수 부대에 의한 대량 총살 ③ 강제 수용소에서의 가혹한 노동을 통한 절멸 ④ 절멸 수용소에서 치사성 가스로 절멸이다. 즉각 ‘T4작전’ 경험자가 조직되어, 이미 존재하던 아우슈비츠 외에, 폴란드 동부 베우제크, 소비보르, 트레블린카에 절멸 수용소(순수한 살인 공장)가 건설되었다. 영화 <쇼아>는 이들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상세히 추적하고 있다. 화물차로 이송되어온 유태인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소수의 ‘노동 가능자’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스로 살해당했다. (아우슈비츠의 경우 최대 8천의 시체를 24시간 내에 소각할 수 있는 소각로를 보유하고 있었다.) ‘노동 가능자’는 동포의 시체 처리를 강요받는 ‘특별 노무반’을 형성하지만 이들 역시 나중에 총살당했다. 가스실은 자동차나 탱크의 배기 가스(일산화탄소)를 사용하거나 ‘치클론 B’라는, 강력 살충 소독제를 (정신 장애자에 대한 실험을 거쳐)학살에 응용했다. ‘치클론 B’ 50그램만 있으면 몸무게 50킬로의 인간 1천명을 죽일 수 있다. (별표 참조)

5. 그 많은 죽음, 그리고 완전범죄의 기도

나치의 절멸작전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곧 ① 대규모 가스실 ② 피해자에게 범죄를 협력케 하는 체계(유태인 ‘특별 노무반’) ③ 증거 인멸이다. 증거인멸 작업은 벌써 1942년 6월부터 ‘1005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시체를 캐내고 소각하여, 남은 뼈와 재를 묻은 후 정지작업을 하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는 작업이다. 전쟁 말기에는 절멸수용소들을 폭파해서 현재 절멸수용소는 남아 있지 않다. 나치스에 의한 전 유럽 비전투원 희생자수는 최하 1천3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는 유태인이 6백만명, 신티-로마민족 50만명이 포함되며, 가스실에서 죽은 350만명 중 90%가 유태인이었으므로 유태인 희생자의 반수가 가스에 의한 희생자인 셈이다.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작전명·수용소명

추정 희생자수

살해 수단

T4작전 (그 뒤를 이은 ’14f13작전’ 포함)

200,000

일산화탄소 가스실·차

대 소련전선 후방 및 발칸

연구 진행중(2백만 이상

추정)

일산화탄소 가스차

절멸수용소 -폴란드

 

일산화탄소 가스실

크름호프(헤움노)

225,000

 

베르제크

600,000

 

소비보르    

250,000

 

트레블린카

974,000

 

강제수용소 내 절멸공장 -폴란드

 

치클론 B 가스실  

마이다니크

50,000

 

아우슈비츠

1,150,000

 

구 독일령(1938) 내 강제수용소

12,000

치클론 B 가스실

(마우트하우젠, 노이엔가메, 나츠바일러, 작센하우젠, 라벤스브뤼크, 슈트트호프)

총계

3,461,000

 

18인권해설

인권해설: 시가라키에서 불어오는 바람

인권해설

세계보건기구(WHO)는 장애인 영역을 ①운동 및 감각장애 ②정신지체 ③정신병 ④만성 알콜중독 및 약물남용 ⑤만성 심장 및 폐질환, 만성 장기손상, 피부질환, 암, 만성통증 ⑥노인 등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중 ① ②만을 인정하고 있다.

선진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는 장애인 유형의 수가 적고 범위도 협소하다. 이렇나 장앵니정 범주의 차이는 장애인구비율에서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실제 장애인구비율은 미국 17.2%(91ㄴ연), 영국 14.2%(87년), 호주 15.6%(87년), 일본 4.8%(95년), 독일 8.4%(91년)인데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 장앵니출현율은 2.35(1백5만명, 95년 보건사회연구원 조사결과)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애인단체 및 장애인복지 관련 기관에서는 장애인구수를 4백50만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낮은 장애인 출현율 추정은 그나마 밑바닥 복지예산에서 장애인의 몫을 줄이고 있는 것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장애인 1천5만3천4백689명중 재가장애인은 1백2만8천8백37명(시설장애인 24,631명). 이들 재가장애인 중 지체장애인은 가장 많은 6만8천7백60명을 차지했으며, 그다음은 중복장애(196,742명),. 청각장애(111,461명), 시각장애(57,541명)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 지체장애인의 교육정도는 대체로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초등학교만을 졸업한 경우 30.1%, 안다닌 경우 28.8%, 고등학교를 졸업한 경우 17.8%이었다. 취업정도는 31.5%에 불과했으며, 62.7%가 일상생활에서 경제적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지체장애인의 발생원인 중 선천적 원인이 1%에 불과한 반면 후천적 원인은 95.7%를 차지한다는 조사결과는 정부의 장애인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부분이다.

13인권해설

인권해설: 루치아

인권해설

15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쿠바는 1899년 1월 1일부터 미국의 군사 점령을 받게 된다. 쿠바는 1902년 5월 20일 미국의 점령 체제로부터 독립하지만 헌법에 미국의 내정 간섭권과 군사 보호권을 허가한다는 내용을 담은 플렛 조항을 부칙으로 넣어야했다.

1934년 이후 정치적인 배후로 있던 바티스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54년 3월 10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폭압 정치를 강화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청년 변호사 피델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정권의 위법성을 법원에 제소하지만 기각되고 학생, 청년을 규합하여 1953년 7월 26일 동부 산디에고 데 쿠바에 있던 모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카스트로는 체포되었지만 1955년 5월 사면으로 석방, 멕시코로 망명하여 “7월 26일 운동”을 조직했다. 카스트로는 1956년 12월 82명의 청년들과 함께 요트 그람마호로 쿠바 동부에 상륙, 바티스타 군에 공습에도 살아남은 동지와 함께 마에스타라 산맥속에 들어가 게릴라전으로 정부군을 타격했고, 1959년 1월 1일 하바나에 입성했다.

1959년 수립된 혁명 정부는 농지 개혁 과정에서 미국계 기업의 토지를 몰수하여 미국과 대립한다. 1961년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선언하여 미국으로부터 경제 봉쇄를 받았고,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쿠바는 △외국 자본 도입 △직접 선거제 도입 △달러 소유 합법화 △개인 영업 완화 △농산물의 자유 시장 등을 허용하게 된다.

그래도 국민의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았고 94년에 공공 요금을 인상한 직후 망명을 요구하는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기도 했으며 뗏목을 이용하여 미국으로 향하는 난민이 3만명을 헤아렸다. 1995년은 경제가 성장하기도 했으나 빈부격차는 여전하다.

<최은아/인권운동사랑방 자료실>

12인권해설

인권해설: 브라질 에비뉴

인권해설

브라질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영토와 남미국가들 중 최고의 자원 보유국으로 알려져 있는데, 1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성장해온 경제 발전에 힘입어 개발 도상 국가들의 선두그룹을 주도하고 있다. 세계 경제 위기가 브라질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극소화하기 위해 변화되어 왔던 경제 정책들 속에서도 국가 경제에 대한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과 국내 시장 확대와 보호주의 경향의 수출 촉진 정책은 비교적 일관되게 추진되어 왔다. 브라질 정부의 이러한 국내경제 발전을 위한 노력은 해외 차입의 증대로까지 이어졌고 세계 경기 침체의 지속은 브라질의 수출입 중 2/3를 외채변제에 사용해야 하는 남미 최고의 외채 부담국으로까지 만들었다.

50연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온 급속한 성장과 장기적 불황과 침체의 기간동안 뒤따랐던 각기 다른 정치 세력의 부상과 숙청 그리고 국가 통제의 억압적 사회 구조 속에서 많은 ‘정치적 반대자들’과 ‘진보 세력’들이 처형되었고, 권력 부패와 빈곤층의 확대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사회 범죄와 부패, 공권력에 의한 살인까지도 묵인되게 했다.

게다가 브라질 사회에 존재하는 ‘인종 차별주의’는 절대 빈곤층, 저소득층의 대다수가 16-17C 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된 노예 노동자들과 그 혼혈 후손이라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빈곤층 극대화’와 ‘소득 불균형 확대’의 저변에 깔린 흑인 이주자들에 대한 정책적 차별과 이들이 브라질 사회 범죄의 희생자로 남아있는 현실은 브라질이 안고 있는 또 다른 인종 분쟁의 씨앗으로 보여진다.

상파울로 거리에는 여전히 관광객들의 호주머니에 의지하는 어린아이들이 가득하고 국가 공금 횡령으로 기소된 콜로르 전 대통령의 퇴진 이후에도 위정자들과 공무원의 부정 부패와 인권 유린은 계속되고 있다.

<박의영/인권운동사랑방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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