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그 시각 다른 곳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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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되어 독일과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1945년 9월 2일에 끝난 전쟁, 연속적으로 맞부딪친 군사적·정치적 갈등으로 세계의 눈물과 피를 쏟은 사건을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 부른다. 6년간 지구상의 6개 대륙과 모든 바다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4천만에서 5천만 명에 이르는 인류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대부분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대표적인 참상으로 흔히 유태인 학살을 꼽는다. 그것은 일시적 흥분 내지 광분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대 계급’을 청소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계획적이고 의도된 방식으로 장기간의 감독과 감시 속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그것은 전문가 뿐 아니라 ‘보통’ 사업체와 기관, 평범한 개인들의 협력 또는 방관에 의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주는 비극은 이런 사실에서 더 극대화되고 ‘타민족과 인종에 대한 혐오’, ‘성가시게 여겨지는 계층에 대한 반감’이 어떤 모습으로 전쟁에 기여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꺼지지 않은 전쟁의 불씨라 할 수 있고 아직도 살아있는 불씨인 것이다.

<류은숙/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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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우리친구 월드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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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국제금융기구(IMF)는 경제위기에 대한 ‘가혹한’ 처방의 대명사다. 자매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세계 은행도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악명이 높다.

세계 은행은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의 산물로서 전후 유럽 재건 과정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제3세계 개발을 촉진하는 기구로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최근엔 주로 채무국에 구조조정 차관을 제공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세계 은행은 구조조정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하는데 여기서 ‘구조조정’이란 말은 일견 중립적인 듯 하지만 실은 신자유주의적 발전 계획을 채택하도록 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외채 부담에 시달리는 국가들은 자금에 접근하기 위해 선택의 여지없이 △무역장벽의 철폐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규제 해제 △공기업 민영화 △사회복지를 비롯한 공공부문의 축소 등의 요구사항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세계 은행의 정책가들은 이러한 구조조정이 경제 회생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구조조정을 수용한 대부분의 중동과 아프리카 나라들은 경기 후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이들 국가들은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한 세계시장의 전장으로 내몰린 채 서구의 초국적 자본들에 시장을 잠식당했다. 생필품의 가격 상승과 사회복지비의 축소 등으로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됐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이렇듯 구조조정이 역효과를 드러내자 세계 은행과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문제점이 최근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비판이 거센 만큼 앞으로 세계은행과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개혁 가능성도 점쳐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 은행의 정책 결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은 개혁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이주영/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하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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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십자가를 진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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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세계는 폭력과 범죄, 약물 남용과 자살 등의 위협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범죄의 증가는 곧 사회적 불평등과 소외, 억압적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와 희망 없는 내일에 대한 절망감이 증폭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급속한 체제 붕괴를 경험하고 있는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혼란과 절망감이 더욱 극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경제 위기와 빈부 격차의 심화로 인한 생존권 위협, 그리고 사회주의적 가치관의 해체와 정치적 대안의 부재로 인한 사회 해체 과정은 필연적으로 범죄나 매매춘과 같은 구조적 사회악을 증가시킨다. 이는 생존권과 삶의 뿌리를 위협받는 사람들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양은 사회적 약자인 빈곤층 아이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가는 이들을 희생양이기보다는 격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아이들을 범죄라는 절망의 늪으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한 대안을 수립하기는커녕, 사회 불안 요소인 범죄소년들을 격리 수용함으로써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통제 전략만을 구사할 뿐이다. 게다가 소년 교도소의 가혹한 통제와 억압은 교정의 역할보다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아이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키우기만 할뿐이다. 그러기에 감옥은 아이들에게 자유의 박탈뿐 아니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과 내일에 대한 희망을 거세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유엔·어린이·청소년 권리조약’은 아이들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항상 최후의 수단으로서만 고려되어야 하며, 인권과 자유에 대한 존중감 고취와 사회 복귀가 처벌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범죄에 쉽게 근접할 수 있는 사회적 위험에 처해 있는 아이들, 즉 학대와 방임, 빈곤 등으로 인한 주변부적 삶을 강제당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를 마련할 책임이 국가에게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배경내/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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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전투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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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이란 성을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가해지는 모든 신체, 언어, 정신적인 폭력을 의미한다. 즉 강간뿐만 아니라 성희롱, 성추행, 음란전화, 음란통신, 성기노출, 아내구타, 인신매매, 강제매매춘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는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음란한 말이나 눈짓, 정신적인 학대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검찰집계에 의하면 1980년에는 연간 5,614건이던 강간범죄가 89년에는 6475건, 90년에는 7,322건으로 늘었고 1997년 성폭력상담 또한 1만 2,540건으로 96년 7921건에 비해 58%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성폭력이 크게 문제되는 것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성폭력을 범죄행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 이것은 여성을 인간으로서 여기지 않고 성적 대상물 혹은 노리개로 취급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가해남성들은 성폭력을 용기있고 남성다운 행동으로 여기거나 한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로 넘어갈 뿐이다.

따라서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두려움과 몸조심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폭력 피해여성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남자들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한다. 우울과 좌절, 불안감을 느끼며 한편으론 가해자에 대한 적개심, 복수심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폭력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즉,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죄’로 새롭게 규정을 함으로써, 성폭력이 인간의 성에 대한 폭력이며 인권에 대한 침해임을 인식해야 한다.

<최은아/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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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아프리카 견딜 만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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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에서 기아의 문제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1983년 이후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수단에서는 120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으며, 극심한 가뭄으로 파종할 씨앗까지 먹어버린 탓에 기아 문제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결과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어린이 중 1/3이 영양 실조에 걸려 있고, 유엔을 비롯한 구호 활동에도 불구하고 기아문제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15∼49세의 성인 4명중 1명이 에이즈나 이를 유발하는 HIV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세계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3천만명 중 2,100만 명이 아프리카인이고 남부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다. 짐바브웨에서는 15∼49세 성인의 26%가 에이즈에 감염됐고 이중 대부분은 젊은 산모들이어서 수많은 고아가 양산되고 있다. 아프리카 동부 및 중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다른 대륙에서는 소멸된 것으로 판단됐던 소아마비, 콜레라, 말라리아, 결핵 등 각종 질병들의 창궐로 예상 수명이 최근 6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으로 급격히 줄었다.

또한, 최근 유엔 통계 자료에 따르면 세계 난민 수는 2,600여만 명으로 보고되었는데, 이중 아프리카지역에 만 900만 명의 난민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난민의 증가는 뿌리깊은 분쟁 때문이다. 알제리, 부룬디, 나이지리아, 케냐 등 아직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아프리카 대다수 국가에서 독재 권력과 소수의 외세 자본과 결탁한 매판 자본가들의 압정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아프리카 일부 나라들에서는 무궁무진한 천연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경제 개발이 붐이 일어나면서 부정부패와 환경 오염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광산은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우라늄 광산에서는 방사선 물질이 유출되지만 규제되지 않고 있다. 더구나 경제 개발의 성과는 거대 다국적 기업과 독재 권력이 독점한다.

아프리카 전문가들은 아프리카에서 죽음의 비극이 종식되기 위해서는 각 나라에 민주 정권이 들어서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강조한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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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5월 광장 어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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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민간 정부인 이사벨 페론 정권을 축출하고 호르헤 비델라가 집권한 후 1979년까지 좌익 척결을 명목으로 군사 정부가 벌인 ‘추악한 전쟁’ 당시 실종된 재야 인사와 학생, 정치인, 외국인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공식 발표로는 9천여 명, 인권 단체의 비공식 집계로는 3만여 명에 달한다.

군부가 자행한 이 ‘추악한 전쟁’에 대해 1983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라울 알폰신 정부는 군정 지도자들을 전원 기소했다. 그는 자신의 공약대로 군정 청산에 착수해 비델라를 비롯한 군정시절 대통령 3명과 당시 각군 수뇌부로 구성된 군사평의회 지도자 9명을 불법 감금과 납치, 고문 등 인권 유린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특히 비델라 전 대통령에게는 살인 혐의가 추가됐다. 1985년 12월까지 3년간 진행된 재판에서 비델라 전 대통령과 마세라 전 해군참모총장에게는 무기징역, 비올라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17년이 선고되는 등 370여 명의 군정 관계자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알폰신에 이어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쿠데타 기도가 이어지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자 1990년 12월 ‘추악한 과거를 잊자’며 국민 대화합 차원에서 군정 관계자 전원에게 사면조처를 내림으로써 과거 청산의 기치는 꺾이는 듯했다. 하지만 1998년 6월 9일, 비델라 집권 기간에 5명의 어린이가 납치당했다는 한 어머니의 기소 내용을 연방 법원이 받아들여 비델라를 아동약취 등의 혐의로 체포함으로써 군부 독재의 인권 유린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진실과 정의를 요구하는 5월 광장 어머니회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군정 아래 실종된 이들 중 대다수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하고 인권을 유린한 자들이 국민 화합이라는 이름 아래 사면을 받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요 집회가 계속된다는 건 아르헨티나에 아직도 불의가 남아 있음을 뜻한다.”는 말처럼 실업과 빈곤이 날로 가중되는 상황에서 실종자들의 자녀 등 젊은 층의 주도로 사회 보장 운동을 자신의 사업으로 껴안기 시작한 5월 광장 어머니회의 목요 집회는 계속해서 아르헨티나 사회 정의 실현을 가늠하는 척도이자 아르헨티나 민주화의 상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서영/인권운동사랑방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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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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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계에는 3억 정도의 선주민 인구가 살아가고 있다. 유럽인들의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 이주에 뒤이은 세계 시장의 발전으로 이들의 삶은 황폐화의 길을 걸어왔다. 식민 전쟁과 질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토지와 자원을 빼앗겨야 했고, 오늘날 그 후손들은 대부분 가난과 차별, 정치적 억압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볼리비아는 어떠한가?

과거에는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으나, 16세기 이후 남미는 서양의 식민지가 되었다. 19세기초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 지도자의 이름을 따 볼리비아를 세웠으나 여전히 백인계가 지배하고 그들과 손잡은 서양 자본이 독점한 이 나라의 광포한 정치사는 인종적, 지리적, 민족적 다양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구의 약 60%를 차지하는 6백5십만이 선주민인 인디안이고, 30%가 혼혈인구이다. 그러나, 인구의 나머지 10%미만을 차지할 뿐인 백인이 볼리비아를 지배해 왔다. 게다가 볼리비아의 지리적 차이는 엄청난 지역 대결 의식을 낳아왔다. 볼리비아의 정치적 갈등은 동부 평야 지대의 백인 거주자와 안데스 고산 지대 인디언간의 분쟁으로 특징화된다.

볼리비아는 1825년 독립이후 50여년의 철권 통치를 겪었고 1879년의 태평양 전쟁 패배로 인해 형식적인 민주 제도를 맞게된다. 그러나, 그것은 주석 수출의 주도권을 쥔 대실업가들의 정부였다. 1952년 노동자와 농민을 주축으로 한 혁명의 기운은 구질서를 몰아내고 주석 산업의 국유화와 대대적인 농업 개혁, 보편적인 선거권을 선포한다. 10년 남짓했던 민주 개혁은 1964년 군부의 등장으로 끝이 났다. 1982년 문민 정부로 이행되기까지 군부 통치는 부패와 파벌주의, 광범위한 인권 침해로 얼룩져 있었다. 새 정권은 이전 군사 정권의 죄상을 조사하기를 거부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미군의 군사 원조를 받아 군부의 요구를 만족시켰으며, 무장 세력은 저지대의 마약 거래와 코카잎 생산계곡에서 날뛰고 있다. 이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군부가 복귀할 것이 염려되고 있다.

<류은숙/인권운동사랑방 교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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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퓨마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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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노벨평화상의 수상자는 과테말라의 여성 인권 운동가인 리고베르타

멘추(당시 33세) 씨였다. 당시 노벨위원회가 멘추를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그가 인디언 원주민의 권익 옹호와 사회 정의 실현에 기여해 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981년 군사 정권의 박해를 피해 멕시코로 망명한 멘추는 본인 스스로가 과테말라 군사 정권하의 최대 희생자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1980년 군부의 탄압에 항의하다 불에 타 죽었고, 어머니와 16세의 남동생도 얼마 후 살해당했다.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은 부친의 저항에 대한 과테말라 당국의 보복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멘추는 ‘원주민 권익 투쟁’이라는 단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수백 차례

의 국제 회의에 참석했으며, 이를 통해 과테말라 인권 유린의 실상을 전세계에 고발해 왔다.

과테말라는 남미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군사 독재 치하에서 숱한 인권 유린을 겪은 나라이다. 군사 정권은 수많은 원주민들을 고문·살해

했으며, 그 과정에서 실종된 사람의 숫자도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따라서 1986년 30여 년간의 군사 독재를 끝내고 민간정부가 들어섰을 때, 이러한 실종과 정치적 살인 행위에 대한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의 문제는 핵심적인 과제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국은 인권 침해 가해자를 거의

조사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이러한 인권 유린 사건과 관련해 유죄 판결 받은 군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과테말라에서 ‘실종’과 정치적 살인이 난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창조/인권하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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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눈물의 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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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잠비크와 앙골라, 두 나라는 노예 무역의 기지로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1975년 포르투갈이 철수한 후 두 나라는 극심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눈물과 한숨의 세월을 보내왔다.

포르투갈이 물러난 모잠비크에서는 좌익 세력인 ‘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이 권력을 이양받아 일당 지배의 정권을 수립한다. 즉시 이에 반대하는 우익의 ‘모잠비크 민족저항운동(RENAMO)’이 게릴라 활동을 시작한다. RENAMO는 당시 좌익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남아공 백인 정권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았다. 남아공의 지원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지만, 1990년 RENAMO는 여전히 모잠비크 내륙부의 넓은 지역을 장악하였다. 다른 아프리카 정부들은 모잠비크 정부에 화해를 촉구했지만, 내전과 가뭄, 잘못된 경제 운용은 국토를 황폐화시켜 대규모 기아를 초래했다. 장기간의 내전에 더하여 1992년에는 가뭄 때문에 1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앙골라 역시 포르투갈 철수 이후 권력 투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세 개의 적대적인 게릴라 그룹, 즉 ‘앙골라 해방민족전선(FNLA)’, 우익의 ‘앙골라 전면독립민족동맹(UNITA)’, 그리고 좌익의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남아공은 UNITA를 지원하고자 군대 파견을 했고, 소련은 쿠바군을 보내 MPLA를 지원하였다. FNLA는 80년대에 세력을 잃었다. 90년대까지 계속된 전투, 앙골라-쿠바-남아공 3국간의 협정과 유엔 평화 유지군의 잠정 배치 등 우여곡절을 거쳐 1994년 MPLA 좌익 정권과 UNITA간에 평화 협정이 조인되었다.

<류은숙/인권운동사랑방 교육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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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명성, 6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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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민주 항쟁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는 반독재민주화 운동이었으며 전국 34개 시, 4개 군 이상의 지역에서 20여일 동안이나 계속된 범국민 운동이었다. 이러한 대중적 민중 항쟁을 촉발했던 표면적 계기는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4월 13일 전두환 씨의 호헌 조치 발표, 6월 9일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이었다. 하지만 6월 민중 항쟁은 86년을 전후로 계속되었던 헌법 개정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군부독재 통치를 거부하는 역사적 흐름속에 있었다.

제5공화국 정권에게 개헌 투쟁은 단순히 ‘헌법을 고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의 집권을 보장해 준 최고의 법률이 폐지됨으로써, 더 이상의 집권이 국민들에 의해 용인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개헌’ 투쟁은 정권에게도 생명을 건 싸움이었지만,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은 직선제 개헌과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일 집회를 했으며 그러한 과정중에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2월 7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고문 치사 항의 경적 시위가 있었다.

계속되는 투쟁을 공권력으로 막아낸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담화를 자청해 “평화적 정부 이양과 올림픽이라는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의 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4·13 호헌 조치는 정권의 국민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고, 2년간에 걸쳐 진행되어 왔던 ‘개헌 논의’를 완전히 무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5월 27일 2천1백93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어 그 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투쟁의 구심 역할을 하는 기구가 탄생하게 된다.

국민운동본부가 이끄는 범국민 투쟁은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선언이 있기까지 계속되었으며 투쟁 중에도 독재 정권은 계엄령 발포와 군투입이라는 위협을 계속 가했다. 6월 26일 전국적·전계층 규모의 대항쟁을 전개한 후 드디어 직선제 개헌안에 의한 연내 대통령선거 실시, 언론의 자유 창달, 지방 자치제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끌어내게 된다.

<엄주현/인권운동사랑방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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