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버마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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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후진국으로 잘 알려진 버마. 군사 정권은 이미지 개선을 위해 1989년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 연합으로 변경했으나 이름을 바꾼다고 진실까지 덮을 수는 없는 법이다.

1988년 민주화 항쟁을 짓밟고 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군부는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 연맹이 90년 자유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집권을 연장시켰다.

강권 통치의 주역인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에 의해 자행된 인권 유린은 1992년 유엔총회에서 결의안을 채택할 정도로 심각하다. 휴먼라이츠워치의 1994년 보고서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약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선 고문이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또 몬, 카렌, 샨 등 버마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소수부족은 버마군의 이른바 무차별적 대반란군 진압 작전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군부의 폭압을 피해 태국으로 국경을 넘는 난민의 숫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한편 1988년 군부의 쿠데타 이후 버마를 탈출한 학생들은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을 조직해 국경 지대에 있는 소수 민족과 연대해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 있지만 버마 정부군의 공세에 대처하기엔 역부족이다. 군사 정권은 반대 세력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춘 데다 독자적 무역권을 미끼로 소수 부족과 하나씩 정전 협상을 맺어나감으로써 버마학생민주전선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버마의 미래가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민주화의 꿈을 버리지 않은 버마 민중들과 그들의 대변자와 같은 존재, 아웅산 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주영/인권운동사랑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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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한낮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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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국민의 10% 정도인 450만 명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장애를 입고 살아가고 있다. 교통 사고, 산업 재해, 환경 문제 등으로 후천적 장애를 입은 사람이 장애인의 95%가 넘는다. 헌법 제34조(생활보장 등)는 국가의 사회 보장 정책에 대한 책임을 명시하여 장애인 복지를 보장하고, 장애인 관련법과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장애인의 형식적인 사회 참여 기회는 넓어졌으나 실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1995년 인구보건연구원에서 발표한 장애인 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재활 치료를 받아보지 못한 장애인은 70%나 되었다. 또 1994년부터 장애인의 의무교육을 보장하고 있지만 1996년 6월 현재 특수 교육을 받고 있는 아동 수는 13.8%(4만 8,073명)에 불과했다. 96년 월평균 실업율이 2.1%일 때 장애인 실업율은 27.8%에 이르렀는데 IMF 체제 1년이 되는 올해 겨울의 상황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96년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펴낸 <장애인복지증진방안연구>에 따르면 장애인들 중 과반수 이상인 57.2%가 평소 여가 활동이나 문화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지체·시각·청각 장애인 612명 조사). 하지만 높은 관심에 비해 장애인의 91.4%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는다고 답함(복수응답)으로써 거의 대부분이 대중 매체에 의존하여 집에서 여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 음악 감상/노래 부르기/악기 연주 등이 60%, 독서/글쓰기가 56%, 운동/등산/낚시 47.6%, 비디오 보기가 40%, 여행 34.9%, 장기/바둑 32.1% 등이었다.

장애인의 교육, 취업 등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기본 문제조차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문화·여가 활동을 말한다는 것이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문화 활동 등은 장애인들이 일반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정상화’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도록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소중하다. 교육, 취업 등의 기본적 문제 해결과 함께 문화 활동 등에 대한 보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수경/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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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리카르도와 미리엄 그리고 피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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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1일,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이 바티스타의 부패한 체제를 무너뜨리고 승리의 팡파레를 울렸다. 그리고 외딴 시골의 산을 근거로 한 게릴라 활동, 사심 없고 대범한 젊은이들에 의해 이뤄진 이 혁명은 당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지식인 투사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는 영웅으로 숭배됐고,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피델이 이끄는 혁명 정권에서 진정한 해방과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다.

반면 미국은 쿠바의 새로운 정권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고 1961년에는 피그스만을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가, 오히려 쿠바 정부를 공산주의로 몰고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 반란자들의 반제국주의적·사회혁명적 전통도 여기에 일조했다.

피델 정부는 주택 공급, 의료 서비스의 개선, 토지 개혁, 무상 교육의 확대 등 급진적 개혁에 착수했다. 경제 봉쇄 조치 등 미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개혁 조치는 성과를 거뒀다. 문맹이 퇴치되었고, 교육 기회가 확대되었으며, 실업은 사라졌다. 의료 혜택은 모든 이들에게 돌아갔으며, 의료 부문에서의 놀라운 발전으로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의료 강국’으로 공인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91년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은 소련의 경제 원조에 의지해 오던 쿠바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줬다. 곧 밀어닥친 석유, 원자재, 소비재의 부족 현상은 곧 쿠바 국민들을 궁핍에 몰아넣었고, 피델은 집권이래 가장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피델의 장기 집권에 맞서 정치자유화의 요구도 함께 터져 나오고 있다. 과거 부모 세대를 혁명 과정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던 피델의 카리스마는 내핍한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 앞에서 그 마력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영/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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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맥도날드 망신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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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는 매년 18억 달러 이상을 광고비에 쏟아붓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우리는 맥도날드의 광고 속에 담긴 ‘미소’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맥도날드에 도전한 사람들은 그 미소 뒤에 엄청난 추악함이 숨어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맥도날드의 음식은 지방과 설탕과 소금의 덩어리로, 섬유질과 비타민은 거의 없으며 다량의 화학 첨가물을 함유하고 있다. 이런 음식은 심장병이나 암, 위산 과다중 등의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둘째,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맥도날드는 잔업 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며, 더 빨리 더 많이 일하도록 노동자들을 압박한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착취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항상 웃을 것을 요구받는다. 이직률이 높은 것은 당연하며,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맥도날드는 언제나 노조에 적대적이었다.

셋째, 빈민을 수탈한다. 빈국의 대부분의 토지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고 서구에서 소비할 작물과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이용된다.

넷째, 환경을 파괴한다. 세계 최대의 쇠고기 소비자인 맥도날드는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산림을 파괴하고 있으며, 그 지역의 거주자를 내몰고 있다.

<류은숙/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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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암살 학교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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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 지역 포트 길릭에 위치해 있는 미 육군 학교(School of Americas, SOA)는 1946년 설립 이래, 수천명의 중남미 군부 지도자를 육성해왔다. 파나마의 전 독재자 미누엘 노리에가, 아르헨티나의 전 독재자 레오폴도 갈티에리, 살바도르 암살대의 창시자인 로베르토 다우부이손 등이 모두 이 학교 출신이었다. 미 국방성은 대외적으로 SOA의 목적을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적 전문성을 강화하고, 다국적 군사 협력을 증진시키며, 미국의 관습과 전통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군대의 이해를 확대시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SOA는 사실상 중남미 지역의 친미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전진 기지 역할을 담당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 온두라스, 칠레, 파나마 등의 쿠데타 주역과 구 독재자들이 SOA를 거쳐갔고, 미국의 지배 체제에 저항해 온 민족 해방 운동 세력이 주요 타겟이 되어왔다.

이 학교의 교육과정이 통신, 엔지니어링, 무기 사용 등 일반 군사 과목 외에 게릴라전, 심리전, 범죄 테크닉(고문 포함) 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이 학교가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영화 ‘암살 학교’는 미 육군학교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과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에서 지속되는 미국의 역할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창조/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하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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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게리와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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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취임식을 가졌다. 342년에 걸친 소수 백인통치와 46년간 유지돼온 인종차별정책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만델라 정권은 백인정권이 저지른 인종차별정책 및 인권유린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1995년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1998년 7월까지 2년여간에 걸쳐 무려 160회의 청문회와 2만1천여 명의 증언을 토대로 백인정권 시절 자행된 고문과 처형, 살인과 성폭행 등 잔혹한 인권탄압의 실상을 하나하나 파헤쳐 나갔다. 그 과정에서 피터 보타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기도 했으며, 흑인살상용 박테리아 개발계획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리고 1998년 10월 29일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한 총 5권, 3천5백여 쪽에 달하는 ‘인권보고서’를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백인정권의 잔혹한 인권유린 실상이 폭로되었지만, 한편으론 이같은 범죄행위를 처벌할 수 없는 현실로 인해 흑백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이는 당초부터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흑백간의 화해’를 도모한다는 목적 아래 ‘보복 없는 과거청산’을 내세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남아공의 과거청산 작업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동양의 만델라라 불린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50년 만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하지만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처절한 울림은 계속되고 있고, 군사정권 아래 고문·투옥된 양심수들이 여전히 감옥에 남아있다. 우리에게도 ‘과거청산’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이창조/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하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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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레지스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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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민중들은 살인적인 만행을 저질러온 두발리에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1985년 봉기를 일으키고, 마침내 1990년 12월 16일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민중 후보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를 67%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그는 재임 초 7개월 동안 부패 공무원의 대대적인 숙청과 군장성 해임을 단행했는데, 이는 보수파들의 저항을 불러와 1991년 9월 30일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사 쿠테타에 의해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후 내부 우익과 결탁한 미국 군대는 3년 동안의 쿠테타 기간 동안 5천여 명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지른다.

아리스티드와 함께 아이티 민주화 운동의 크게 기여한 인물은 앙트완 이즈메리이다. 그는 아리스티드가 축출될 때 함께 망명할 것을 거부하고 아이티에 남아 민주화 운동을 이끈다.

그 과정에서 이즈메리는 친동생을 잃게 되고 그 또한 테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이즈메리의 암살은 대외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미국으로 하여금 아리스티드를 다시 대통령으로 복위시키는 결정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전과 같이 민중의 편에 서서 진정한 민주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정부가 되는 것은 미국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CIA는 아이티에 프랩(Fraph)이라는 괴뢰조직을 만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테러를 사주하면서 아리스티드에게 강요한다. “아이티 민중들이 더 이상 피를 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라.” 아이티는 현재 우리와 마찬가지로 IMF를 맞아 국영 기업이 매각되는 등 국가적 위기에 놓여있다.

<김도형/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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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22일간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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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9월 13일 국가안전기획부는 반핵평화 운동연합 정책위원 김삼석 씨와 김씨와 여동생 김은주 씨를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회합·통신·혐의로 구속했다. 안기부에 따르면 김씨는 1992년 1월 누이 동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74년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의 재일 총책이던 북한 간첩 이좌영 등에게 포섭되어 국내 정세와 재야 운동권 실태 등을 보고하는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을 오가며 공작금 60만 엔을 받고 국내에서 간첩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貧だ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이틀 동안이나 행방을 모른 채 잡혀가 수사과정에서 구타 등의 가혹 행위와 성적 모욕을 당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 사건은 본인들이 혐의를 극력 부인하고 고문을 주장하면서 조작 시비에 휘말렸다.

이 사건은 안기부가 1993년 9월 국가안전기획부법 개정안 상정으로 권한과 위상이 대폭 축소되자 존재 의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조작한 간첩 사건으로 분석된다.

1995년 10월 24일 충남 부여에서 군·경이 남파 간첩 김동식, 박광남(가명)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박광남을 사살하고 김동식을 생포한 ‘부여침투 무장간첩사건’이 발생했다. 김동식은 신문 과정에서 재야 인사 7명을 포섭하고, 이미 포섭된 박충렬(당시 전국연합 사무차장), 김태년(당시 성남미래준비위원회 위원장)에게 무전기를 전달하는 임무를 띠고 왔다고 진술하였다.

이에 따라 함운경, 우상호, 이인영, 허인회 등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각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4명을 간첩 김동식(본명 이승철)을 만났음에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 혐의로 구속하였다. 뒤이어 박충렬 씨와 김태년 씨를 비롯한 50여 명의 재야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계속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증거도 없이 오직 김동식의 진술에만 의거해 재야 인사들을 구속한 뒤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자 다른 사건에 연관시켜 무리하게 기소하였고, 김동식의 기자 회견 형식으로 박충렬 씨 등의 혐의를 텔레비젼으로 중계함으로써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 사건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재야 세력의 정치권을 진출을 차단하고 보수층의 안정 심리를 자극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만들어진 안기부의 정치 공작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18인권해설

인권해설: 전쟁이 일어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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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 최악의 인종 대학살’로 불리는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전이 시작된 것은 1992년 4월 26일이다. 이 날은 보스니아가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기도 하다. 세르비아계는 회교도가 주도하는 보스니아가 총선을 거쳐 독립을 선언하자 신유고연방과 손을 잡고 수도인 사라예보를 공격한다. 신유고연방은 즉시 군대를 철수했지만,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반군은 민병대를 조직해 내전을 벌여 전체 영토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3년 7개월간의 전쟁기간 동안 발생한 사상자는 20여망 명, 난민이 270여만 명에 이른다.

유엔과 서방국가들은 유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번번이 세르비아계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각종 금수조치를 단행했고, 세르비아계는 국제적인 고립과 피폐한 경제, 그리고 세르비아 공화국마저 등을 돌리는 한계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유고 내전은 1995년 11월 내전 당사자인 회교·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가 영토를 51 : 49로 분할해 자치정부를 구성하고, 자유민주선거를 통해 이를 하나로 묶어 느슨한 연방국가로 유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데이턴 평화협정의 체결로 전기를 맞게 되었고, 1995년 12월 14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보스니아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끝났다.

그러나 1998년 2월, 신유고연방에서 독립하려는 알바니아계와 이를 저지하려는 세르비아계의 충돌로 발생한 코소보 사태는 세계의 화약고라는 발칸반도의 불안한 미래를 보여준다.

<최서영 /인권운동사랑방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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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칠레 : 지울 수 없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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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국민 여러분, 방송이 앞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기에 작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서 나는 인민에 대한 충성을 목숨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연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칠레의 군인으로서 맹세를 배반한 자들에게는 도덕적 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들은 힘이 있고 나를 부술 수 있지만 사회의 전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국민들은 역사를 창조할 것입니다…….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누군가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 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칠레여, 영원하라.”

1973년 9월 11일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육군기갑부대가 대통령 집무실로 육박하는 가운데 고별 연설을 마친 65세의 대통령은 차마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한 42명의 경호대와 함께 장렬하게 죽어갔다. 선거를 통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던 칠레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비장의 최후는 인민 연합 정권의 종말을 극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민 연합 정권의 근원적 한계와 오류, 그리고 이후 칠레 민중의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옌데는 1933년 사회당을 창설하였고, 1970년 9월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세계에서 최초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탄생시켰다. 아옌데는 전형적인 식민지 종속국이었던 칠레에 농지 개혁을 단행했고, 임금과 복지를 개선했으며, 칠레 인민의 젖줄인 구리 광산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자국의 30대 다국적 회사 가운데 24개가 칠레에 진출해 있고, 은행을 제외한 칠레의 18대 기업이 모두 이들의 자회사이며, 칠레의 구리 사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던 미국은 두려움을 느꼈다. 미국은 구리 수입을 중단하고 생산재, 생화 필수품의 수출을 중지하여 ‘생산력 감퇴와 실업, 물자난’을 조성하면서 인민 연합 정권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으며, 국내 반혁명 세력을 규합하여 반인민 연합을 결성케 하는 한편 칠레 군부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여 쿠데타를 준비한다. 이에 편승하여 반인민 연합은 운수노동자 파업을 사주하여 경제를 교란하고, 1972년에는 자본가 파업을 조종한다. 결국 미국의 3년여에 걸친 공작 끝에 육해공 경찰군의 합동 쿠데타로 인민 연합 정권은 무너지고 만다.

아옌데에 의해 군참모 총장으로 임명된 지 불과 19일 만에 쿠데타를 일으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17년간의 집권 기간은 암흑의 시대 그 자체였다. 그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콘도르 작전’이란 이름으로 좌익 소탕 작전을 실시하는 등 폭압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3,197명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되고 1,102 명이 실종되었으며, 고문 불구자 10만 명, 국외 추방자 100만 명이라는 통계치가 보여주듯 그는 인간 도살자나 다름없었다.

그는 1988년 집권 연장을 묻는 국민투표가 압도적 표차로 부결된 뒤 1989년 19년만에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반군정파인 아일윈 후부에게 패배하여 1990년 권좌에서 물러나고서도 계속 군참모 총장직을 지키다 1998년 3월 초 퇴임해 종신 상원 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0년 헌법을 바꿔 1998년까지 군총사령관직을 갖도록 규정해놓는 등 치밀하게 퇴임 이후를 대비해놓은 것이다.

1990년 민정으로 복귀한 칠레는 1994년 3월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민정 2기에 들어갔다. 그는 대통령 직속 기구로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정 당시의 사실을 밝히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조사가 실시됐고 수천 명이 증언을 했으며 1천 쪽에 이르는 보고서가 작성됐다. 그러나 조사는 ‘진실을 밝히되 처벌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진행되었기 때문에 희생자의 이름은 기억되었으나 범죄자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프레이 대통령은 과거 군정 관련자들을 정면으로 응징하기보다는 국민들 사이에 깊어진 감정을 끝을 메우는 데 그치고 있다는 지적으로 받았다.

힌편 1998년 10월 16일 독재자 피노체트가 신병 치료차 머물던 런던에서 재임시 200여 명의 스페인을 살해, 납치한 혐의로 체포됨으로써 그는 전세계 양심 세력이 기다려온 인권법정에 오르게 될 것이다.

<최서영 / 인권운동사랑방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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