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왈로펜도

인권해설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의 역사는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은 아직까지 제도적·관습적 차별로 인해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향유하지 못한 채 ‘있지만 없는’ 소수집단(minority)으로 살아가고 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낙후된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은 더 이상 여론의 주목조차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가는 실정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을 강타한 경제위기로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한국인 노동자들보다 더한 실업과 빈곤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값싼 노동력을 수입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현행 연수취업제는 이주노동자들에게 2년간의 기술연수 후에 1년간의 취업의 기회를 부여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기술연수는커녕 곧장 3D업종의 단순노동에 투입되며 연수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저임금 착취를 당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주노동자들에겐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이다. 그들의 빈곤과 차별의 문제는 한국의 노동자와 빈민의 문제이며 한국사회가 풀어나가야 할, 고질적인 불평등의 문제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좀먹는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이주노동자와 한국인간의, 인간 대 인간 간의 결연한 연대의식이다. 그들이 더 이상 경제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한국인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이주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될 때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자의 인권은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

<김경태/인권운동사랑방>

13인권해설

인권해설: 이란식 이혼

인권해설

사람들은 왜 이혼을 말할 때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문제시하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영웅호색’이라는 말과, ‘여자팔자 두레박 팔자’라는 말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이혼은 여성이 해서는 안될 실패를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는 사회에서는 이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혼 여성의 인권 문제를 보고자 할 때는 각 사회 문화가 여성과 결혼을 어떻게 관련짓고 있는지를 보아야만 그 사회가 이혼 여성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비로소 그녀들이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든가,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가진다’는 말은 다양한 집단이 어떤 방식으로 권리에 대한 침해를 당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무의미한 수사에 불과하다. 이것이 이혼 여성의 문제가 그 사회의 특수한 문화적 관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이다. 이혼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 사회와 혼인 형태의 자유로움이 나름대로 굉장히 진전되어 있는 사회, 또는 우리 사회처럼 여전히 편협하고 이혼을 인정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며, 그와 관련된 모든 책임과 낙인을 동시에 여성에게 주고 있는 사회 등. 한국사회에서 이혼 여성들은 관계로부터의 고립과 비난, 노동권의 상실로 인한 위협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단독비행을 할 수 있는 항로에 대해 배려하지 않고 심지어 그 항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것조차 막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가 만들고 있는 문화 현실이다. 그녀들의 인권을 말한다는 것은 이렇듯 사회가 부여하고 있는 성적 편견을 제거하고 생존할 수 있는 권리와 방식을 제공할 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정연/또 하나의 문화(여성과인권 연구회)>

17인권해설

인권해설: 우리 집에 불이 났다

인권해설

미국은 매우 다양한 피부색·국적의 사람들이 자유로이 살아가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미 정부의 허가를 얻지 못한 채 매일을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의 이민관리국(Immigration & Naturalization Service)은 불법이민자들에 대한 냉혹한 정책으로 악명이 높다. 최근 이민관리국은 멕시코와 미국 간 국경경비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멕시코-아리조나 국경 지역에서 1999년(10월 현재까지)에만 보란듯이 불법이민자 47만 449명을 체포했다. 이민관리국에 의해 적발되는 불법 이민자들은 구금 과정에서 줄곧 비인간적인 처우를 호소하곤 한다. 또 이민관리국의 수용인원이 넘치면, 정당한 재판도 받지 않은 채 일반 교도소로 옮겨진다고 인권단체들은 알리고 있다. 불법이민자들은 노동 현장에서도 저임금과 인종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3∼4백 명에 달하는 불법이민노동자들 대부분은 일용직에 근무한다. 이들에겐 아무런 서면 계약서도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일을 하고도 임금을 못 받는 경우가 흔한데, 이들은 이민관리국에게 발각될 것이 두려워 임금을 받지 못하고도 혼자 끙끙 앓아야만 하는 처지다. 그리고 고용주들은 노동허가증을 가져온 후에나 임금을 줄 수 있다며, 오히려 불리한 처지를 이용하곤 한다. 불법이민자들이 겪게되는 차별은 그들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가족들에게까지 이어진다. 공립학교에 갈 기회가 차단된다거나, 응당 누려야 할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예다. 이제 이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악몽에 불과하다.

<이주영/인권운동사랑방>

12인권해설

인권해설: 생일 축하합니다, 모그라비씨

인권해설

20세기 말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는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협상이 재개되고 있다. 95년 이스라엘 극우파에 의한 라빈 총리의 암살 이후 중단되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이 99년 7월 에후드 바라크 신임 총리의 취임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아랍전쟁의 영웅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92년 취임과 함께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추진하여 95년에는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 점령지역 일부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가 시작되었고, 이스라엘군의 철군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95년 11월 라빈 총리의 암살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협상과 이스라엘군의 철군도 중단되었다. 99년 7월,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취임 이전 네타냐후 총리 시절에는 이전의 라빈의 협상을 무위로 돌리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는 취임 직후 와이버리협정(와이Ⅱ 협정)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내 이스라엘군의 11%를 2000년 연초까지 단계 철수, 팔레스타인 수감자 3백50명 석방, 팔레스타인 지위협정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99년 11월 2일에는 오슬로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인정, 군사력의 보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1백60여개에 이르는 이스라엘 정착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국경선 확정 문제 등을 다루는 협상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인정 등 팔레스타인의 지위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이 예루살렘을 분할해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반면,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양보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이-파간의 평화협상은 정치·군사 문제에 있어 진보는 보이겠으나, 수천년 동안 갈등의 근원을 형성해온 종교 문제는 여전히 분쟁의 불씨로 남아있다. 물론, 이-팔간의 정치적, 군사적 평화협상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와이Ⅱ협정 체결에 반대해 버스폭탄테러를 저지른 이스라엘 극우파,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인 하마스의 반대는 결코 만만치 않다. 여기에 PLO 아라파트 의장의 독재에 대한 높아지는 비판의 목소리, 아랍국가들과 미국의 이해관계 등은 오랜만에 조성되는 이-팔간의 평화협상에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중동 갈등의 핵심인 이-팔간의 오랜 반목과 갈등은 점차 평화를 위한 이행단계로 접어들었다. 라빈이 뿌려놓은 평화의 씨앗이 이제 피로 얼룩진 사막에서 싹트고 있는 것이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14인권해설

인권해설: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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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러시아의 농지는 스탈린에 의해 1929년부터 강제적으로 실시된 농업집단화 정책을 통해 집단농장(콜호즈)과 국영농장(소브호즈)에 귀속되었다. 농업집단화의 명분은 토지를 개인이 아니라 전 인민의 소유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토지는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토지의 매매는 금지되었다. 그런데 60년대에 접어들어 집단적 농업경영이 생산성의 저하를 보이자, 농지의 소유형태를 다양화하자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농지의 소유관계와 관련해 구체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농지소유의 근본적인 변화는 소련 붕괴이후에 이루어졌다. 옐친 정부는 집권초기에 “토지개혁 실행에 관한 긴급조치”(1991.12.27)라는 대통령 포고령을 발표했고, 이어서 정부령 86호인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재조직에 관한 규정”이 이틀 뒤 발효되었다. 이로서 농지에 대한 소유권은 인민대표 소비에트에서 각 지방의 “토지개혁 및 토지자원 위원회”에로 이전되었다. 위의 두 포고령에 따르면, 1993년 1월 1일까지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토지와 재산은 구성원들에게 무상으로 배분되며, 농민들은 이 기간 내에 사적 소유, 집단?분할소유, 기타 소유를 결정해야 했다. 급진개혁가들은 농지의 탈국유화와 농업생산의 탈집단화를 통해 생산성의 향상과 생산의 증대, 농업부문에 대한 정부보조금 삭감 등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이들은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탈취된 토지를 농민에게 반환해야한다는 점에서 농지 사유화의 명분을 찾았다.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인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러시아의 농민들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자신의 토지를 소유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영농을 인정한 1861년의 농노 해방이후 반세기가 지난 20세기초에야 비로소 유럽지역 농가의 24%(약 2백40만)정도가 자영농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절반은 1908∼1915년에 자신들의 토지를 다시 매각하고 임금노동자로 전락했다. 농지의 사유화는 급진개혁가들의 예상과 달리 농민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다. 94년 1월 1일 현재 전체 농장의 95%가 재등록을 마쳤는데 이중 자영농에게 불하된 토지의 비율은 불과 3.8%에 불과했다. 농민들이 토지소유를 꺼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농장의 탈퇴에 따르는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독립 이후 예상되는 불확실한 이익보다 집단농장이 확실하게 보장하는 수입을 선호했다. 이러한 우려는 근거가 있다. 집단농장에서 독립한 소수의 농민들은 당초 약속되었던 저리융자나 세제혜택 같은 정부의 금융지원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정부는 1993/1994년의 농산물 수매이후 인플레이션 억제를 구실로 대금지불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상당수의 자영농이 파산하거나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자영농민들은 집단농장에 잔류했더라면 분산되었을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러시아 농민들이 집단농장을 탈퇴하지 않는 것은 경험에 근거한 판단이다.

과거의 농민공동체 미르가 혹독한 자연조건에서 발생하는 재난에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안전장치였다면, 소비에트 정권의 강압적 농업정책의 결과였던 집단농장은 현재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경제난국에 처해있는 농민들에게 안식처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농민들이 살아온 질곡의 역사가 이들을 이처럼 안전에 민감하게 만든 것이다.

<윤용선/외국어대 강사>

13인권해설

인권해설: 국가의 살인 – 사형제도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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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폐지의 논거는 명확하다. 사형은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없는 국가가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행위라는 점 그리고 재판은 오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인간의 일이며, 더욱이 사형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폐지가 요구되고 있다. 또한 범죄자의 교화와 사회복귀에 역점을 두어야하는 국가가 오히려 합법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사형제도는 결코 교육적이지도 못하며 범죄방지적 효과도 역시 크지 않다는 통계가 사형폐지의 이유를 더욱 분명히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해방 후 건국과정에서 사형제도에 대한 아무런 비판이나 검토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사형이 받아들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형이 법정형으로 규정된 범죄는 ‘형법’에서 살인죄 등 약 20여개 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에서 약 20여개, ‘군형법’에서 반란죄등 약 40여개 죄에 달하며 개정 내지는 폐지의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에서도 반국가단체구성죄등에 사형이 법정형으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 나라는 사형이 인정되는 범죄 자체도 많지만 그 선고율도 아주 높은 편으로 일반 법원에서만도 (년)평균 20건 정도의 사형이 선고되고 있는 형편이다.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에 대한 위헌여부심판에서 원칙적으로 사형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선언하였다. 다만 오늘의 우리 나라 사회실정에 비추어 사형폐지는 시기상조라 하고 사회여건이 이루어지면 폐지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999. 11 현재, 세계각국의 사형제도 동향 역시 ‘폐지’ 쪽으로 가고 있다. 1989. 5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발족 당시 사형폐지가 79개국, 사형존치가 101개 국이었던 것이 1999. 6. 4 러시아의 사형제도 폐지를 포함하여 사형폐지국은 106개, 사형존치국은 89개국으로 그 수가 역전되었다.

사형은 「부적절하고, 불필요하고 부당한 또 하나의 악」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살인범과 같은 흉악범일지라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으로 이들의 생명을 포옹해 주는 성숙한 의식이 필요하다. 사형의 야만성, 비효율성, 악용 가능성을 자각하고 사형폐지에 동참하는 학생, 주부, 직장인등 시민의 휴머니티가 결국은 사형제도 폐지 운동의 성패를 가름할 것이다.

<이상혁/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긴급구조전화 02-599-9413)>

19인권해설

인권해설: 황제의 새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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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4년 1월 1일 발효된 나프타는 무역장벽과 노동 및 환경적 제한조치를 제거하기 위해 미국의 주도로 캐나다와 멕시코를 포함한 3국간의 자유무역을 위한 조약이다. 자유무역의 옹호자들이 나프타가 미국에는 해마다 20만 건의 새로운 일자리, 멕시코에는 높은 임금, 국경지역의 환경개선 등을 약속했지만, 이것들 가운데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98년 12월 미국의 시민운동단체인 Global Trade Watch는 94년에서 99년까지 5년에 대한 나프타의 성적을 F학점으로 처리했다. 고용, 농업, 환경, 공공보건, 미국과 멕시코의 생활수준, 멕시코의 경제발전과 생활수준, 경제주권과 민주주의, 마약과 밀수, 노동 및 환경 부속협정 등의 모든 세부항목에서 역시 F학점의 평가가 나왔다. 지난 93∼96년간 미국의 노동자들은 나프타로 인해 39만4천8백35개의 일자리를 잃었고 실질임금은 4%나 감소했으며, 이는 특히 멕시코 접경지역에서 더욱 심하다. 이 지역의 실업률은 93년 10.4%에서 98년 13.5%로 늘어났고, 미국내에서 최저 개인소득순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접경지역에서 악덕기업에 의한 폐기물의 투기가 급증하여 이 지역의 환경을 극도로 악화시키고 있다. 한편, 저임금 착취노동으로 악명높은 멕시코 마킬라도라 지역의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는 94년 54만6천4백33명에서 98년 4월 98만3천2백72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그렇지만 마킬라도라 지역의 고성장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 일당 3.40달러 이하를 버는 멕시코인의 숫자는 93년 620만명에서 97년 7백77만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마킬라도라의 노동자들은 미국의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시간당 17.70달러를 받는데 비해, 시간당 겨우 1.21달러를 벌고 있을 뿐이며,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하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기본적 권리마저 철저히 탄압받고 있다(한영노동자들의 투쟁을 기억하라).

<원영수/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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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멈추지 않는 대량학살 : 대인지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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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지뢰는 전세계 60여 나라에 1억 1천만개 가량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인지뢰로 인한 사상자는 연간 1만여명이 넘는다.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도 약 백만개의 대인지뢰가 매설되어있다. 대인지뢰는 무차별성과 영구성 때문에 불법적인 무기가 되었으며 남녀노소,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하게 피해를 준다. 그래서 대인지뢰를 눈이 없는 초병이라고 한다. 실제로 대인지뢰로 피해를 본 사람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가 대다수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매설한 지뢰에 의해서 미군 병사가 피해를 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인지뢰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대인지뢰금지운동은 인권운동이면서도 평화운동이다. 프랑스에서는 1차대전 때 매설한 대인지뢰를 아직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전차나 소총은 철거했지만 대인지뢰는 전쟁이 끝나도 제거를 할 수 없다. 캄보디아, 앙골라, 보스니아 등 전쟁이 끝난 지역에서 여전히 피해자가 속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1997년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ICBL)과 그 대표인 조디 윌리암스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1999년 3월 1일에 대인지뢰금지 협약이 국제법으로 발효되었다. 대인지뢰금지운동은 미국 등 강대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간이 중심의 단체들이 유엔과 각국 정부를 움직여서 만들어낸, 평화운동 그리고 인권운동의 멋진 성과이다. 그 결과 핵무기, 화학무기, 생물무기가 불법이듯이 이제 대인지뢰를 사용하는 것도 불법이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대인지뢰가 합법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미국이 대인지뢰금지협약에 가입하지 않는 것도 한반도의 분단을 핑계로 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대인지뢰 금지협약에 가입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 인권을 신장하는 길이다.

<이창수 /민족회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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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슬픔과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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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란쯔만의 기념비적 영화 <쇼아>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슬픔과 연민>은 2차대전 와중 프랑스의 당시 분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변절과 협력, 저항과 해방이라는 민감한 주제들을 바탕으로 구성된 대담들은 귀중한 자료화면들과 함께 논쟁적인 이 시기에 대한 회고 및 재해석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하고 있다. 국시를 ‘자유, 평등, 박애’에서 ‘노동, 가정, 조국’으로 바꾸어놓았던 비쉬(Vichy) 정권, 독일의 반유태주의 법률보다 더욱 지독했던 프랑스의 당시 반유태주의적 법률, 어린이들을 학살수용소로 보내는 문제에 대해 결정내리기를 주저하는 게슈타포의 우유부단함에 대조되는 프랑스 경찰의 적극적 협력 등,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는 주제들이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작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 1968년 5월 사태 이후 프랑스 내의 이차대전에 대한 해석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국민적 통합을 위해 드골이 주창하던 ‘프랑스의 영광’이라는 구호는 과거를 냉정히 직시하려는 움직임으로 대치된다. 레지스탕스의 영웅적 투쟁에 대한 일방적 강조는 비쉬 정권에 의한 대독 협력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로 바뀌게 되며, 이 역사는 차후 가장 수치스러운 프랑스사의 한 부분을 구성하게 된다. 분위기의 반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책은 미국학자 로버트 팩스턴(Robert Paxton)이 저술한 {비쉬 하의 프랑스La France de Vichy}이다. 팩스턴은 이 책 속에서 비쉬 정권이 1936년의 좌파 정권인 인민전선(Front Populaire)과 공화국에 복수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영화 쪽의 본격적 접근이 바로 [슬픔과 연민]이다. 이 영화를 통해 오퓔스는 맹목적 국수주의를 비판하면서, 신중한 기다림 속에서 매일을 영위하던 프랑스인들의 일상을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솔제니친이 2백27명의 수용소 체험자들의 증언을 종합하고 있는 작품 {수용소군도}를 통해 소련 치하의 수용소를 다성악적(多聲樂的)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이 영화를 통해서도 유사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상황 속의 인간’의 드러냄에 대단히 성공한 이 영화 속에서는 시종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으며, 각종 자료화면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당시의 역사에 실증적으로 동참하게 해준다. ‘유태인 학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슬픔과 연민> 역시 유럽적 상황과 무관한 우리에게 시종 객관적 거리를 확보케 해주지만, 역설적으로 아직도 그 반성이 지지부진한 우리 자신의 과거 문제를 진지하게 반성케 한다. 독일 치하의 프랑스라는 무대 설정을 훨씬 뛰어넘어, 모순적이고 모호한 상황들로 점철된 이 영화는 프리모 레비(Primo Levi)가 주창한 ‘회색지대’의 개념을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을 통해 드러난 인간 군상의 적나라하고도 정직한 모습에 다름아니기 때문이고, 그 보편적 해석으로부터 우리가 늘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빈 / 한국외대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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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세계인권선언의 역사

인권해설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장은 전 인류의 경이로운 성취로 기록될 사건으로 술렁였다. “모든 민족과 모든 국가가 성취해야 할 공동의 기준”으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순간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들의 조직체인 국제 기구가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권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그에 대한 헌신을 다짐한 문서를 만든 것이다. 이 선

언의 등장으로 자국민을 대우하는 문제가 해당 국가만의 관할사항이라고 말할 근거를 설자리를 잃게 되었고 인권의 국제적 보장은 필연적 추세가 되었다. 세계인권선언의 모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반인권적인 전쟁이었다. 약 5천만 명에 이르는 생명을 앗아간 2차대전의 참상과 나치가 저지른 만행은 국내에서 자국민의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는 언제든지 전인류의 인권과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이 교훈에 기초하여 45년 창설된 유엔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과 준수”라는 목적과 그 성취를 위한 행동서약을 헌장에 담았다. 유엔은 이 약속을 지키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46년 1월에 열린 제 1차 유엔총회는 기본적인 인권에 관한 문서를 기초하기로 했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유엔인권위원회를 설치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인권의 일반적인 원칙 또는 기준을 담은 ‘선언’과 구체적인 권리와 제한범위를 명시한 ‘조약’ 둘 다를 만들어서 ‘국제인권장전’으로 이름 붙이기로 하고 따로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부터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을 만들어서 회원국의 서명을 받아내는 일에 비해 선언을 만드는 일이 훨씬 쉬워 보였다. 선언은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로 삼아야 할 지침을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속도가 붙은 것은 선언의 채택이었다. 그래서 48년에 선언만이 유엔총회에 제출되어 표결에 부쳐졌고, 결과는 찬성 48, 반대 0, 기권 8이었다. 기권표는 세계인권선언의 의의를 인정하는 속에서도 불충분하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권을 인권으로 명시(제17조)한 점이나 사회권 보장에 대한 권리가 충분치 않다는 점 등이 구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기권표를 낳았다. 이는 선언의 기초 과정에서 가장 뜨거웠던 논쟁 즉, 보편적인 인권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한정되느냐, 아니면 경제적·사회적 권리도 포함하느냐는 논쟁의 일면을 보여준다. 긴 산고 끝에 탄생한 세계인권선언은 뒤따라 만들어진 국제인권조약들의 뿌리가 되었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로, 소위 인권 분야의 헌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인류는 선언이 채택된 12월 10일을 ‘인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류은숙 / 인권운동사랑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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