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여름, 정리해고가 처음으로 적용되는 대기업 사업장이었던 울산 현대자동차에서는 노동자, 민중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과 정권의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들의 뜨거운 한판 승부가 벌어지고 있었다. 파업 36일째를 맞던 8월 24일 새벽, 노사 합의안이 극적으로 타결되었지만 그해 여름의 ‘대타협’은 노동자들의 쓰라린 패배로 귀결되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98년 7월 16일, 사측은 IMF 한파에 따른 내수 급감과 가동률 저하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2천7백여명에 달하는 정리해고자와 9백명의 무급휴직자 명단을 통보했다. 이미 사실상의 정리해고인 희망퇴직을 통해 8천여명의 노동자를 정리한 후였다. 해고 대상자 중에는 노조의 핵심 활동가도 160명이나 포험되어 있어 ‘노조 죽이기’전략이라는 혐의도 매우 짙었다. 2천 5백억원의 임금삭감, 노동시간 단축과 순환휴가제를 통한 일자리 나누기 등 파격적인 고통분담안까지 제시한 노조의 협상노력은 사측의 대화 거부로 벽에 부딪쳤다. 20일부터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돌입하자, 사측은 노조간부들에 대한 무더기 고소, 고발로 응수했고, 검찰 또한 “정리해고는 경영자의 고유한 권리이므로, 이를 이유로 한 파업은 불법”이라며 경찰력 투입이라는 으름장을 놓으며 노동자들을 압박했다 .회사 정문앞을 에워싼 1만여 경찰병력이 언제 투입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정부 여당의 중재로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노사협정은 24일 새벽의 극적 타협안을 탄생시켰다. 타협안의 주요 내용은 노조는 정리해고를 받아들이고 사측은 2백 77명으로 대상자 수를 최소화한다는 것이었다. ‘타협’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는 가혹한 희생이 ‘강요’됐다. 무급휴직자까지 합치면 불과 4개월 사이에 1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른바 ‘불법파업’을 주동했던 노조간부들에 대한 검거와 징계가 잇따르면서 노조의 힘은 무력화되기 시작했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자진출두했던 김광식 노조위언장에게는 징역 2년이 선고됐다. 정리해고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남은 노동자들도 무리한 인원감축 후 강화된 노동강도로 감각마비와 통증에 시달렸고 만성적 고용불안으로 위축됐다. 그리고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와 ‘충분한 해고회피 노력’등 정리해고의 요건을 규정한 근로기준법을 비웃듯, 무분별한 정리해고의 광풍은 전국을 휘몰아쳤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더욱 가속화됐다. <배경내/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해설: 먼지의 집
인권해설
석탄감산정책은 말 그대로 석탄생산량을 감축하는 탄광회사에 대해서 감축하는 양만큼 지원금을 준다는 정책인데, 흔히 탄광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석탄산업 말살정책이라 불린다. 이는 졸속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10년 전인 1989년부터 시행된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332개에 달하던 국내 석탄광은 1995년까지 7년 동안 3백5개가 문을 닫고 불과 27개의 탄광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합리화 정책으로 인해 89년 4만8천명에 달하던 탄광노동자는 1만1천7백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뒤이은 석탄감산정책은 경쟁력없는 석탄을 최대한 줄여 불필요한 정부지원을 줄이고, 석탄의 수요와 공급을 균형적으로 유지하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추진되고 있다. 이런 명분의 뒤에는, 산업전사로 떠받쳐져 온 탄광노동자들의 급속한 몰락이 숨겨져 있다. 1995년 당시 감산정책이 시행되면서 5백70만 톤에 달하던 석탄생산량은 2년 만인 1997년 4백30만톤으로 대폭 감축되었다. 그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2천명 정도를 고용하는 대규모 탄광 2개 이상이 폐광되었고, 이는 곧 지역 경기의 몰락을 야기했다. 1995년 만천7백명이었던 광산노동자들은 1997년에 7천명 수준으로 급격히 줄었다. 결국 광업권자는 감산을 하면서 정부로부터 연간 수십 억원의 감산지원금을 받아 일방적인 혜택을 얻은 반면, 광산 노동자들과 그 가족에겐 벗어날 수 없는 빈곤의 굴레가 덧씌워졌다. <먼지의 집>의 배경이 되는 동원탄좌 하청업체인 제일기업 폐업은 이런 배경 속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사태였다. 10여 개의 하청업체를 거느리고 있는 동원탄좌는 먼저 하청업체 정리를 통해 감산과 정리해고를 밀고 나갔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된 것이 제일기업이었다. 노동자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일기업은 폐업되었다. 석탄감산정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수년 뒤면 석탄산업은 년 3백만톤 생산규모에 2천∼3천명의 탄광근로자만을 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것이다.
<김창완>
인권해설: 또 하나의 세상
인권해설
강제철거는 개인이나 가족 공동체의 의사에 반해 적절한 보호장치 없이 행해지고 있어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심각한 주거권 침해로 보고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강제철거는 주거권뿐만 아니라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사생활 등 다른 권리들마저 위협하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개발이란 이름으로 강제철거가 진행됐지만, 특히 80년대 합동재개발의 도입과 전문적으로 폭려글 사용하는 철거용역회사의 등장은 강제철거를 더욱 가속화했다. 철거로 인해 저소득층의 살만한 주거공간의 수는 줄어들고, 주변지역 전월세값도 올라 이들 대부분은 지하실이나 옥탑, 시외곽 등으로 이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이시기 철거반대운동도 활발히 진행됐지만 철거원의 폭행, 부상, 성추행 등의 문제도 끊이지 않았다. 98년 한국도시연구소는 86년~98년 사이 철거와 관련한 사망경위를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철거도중 부서지는 집더미에 깔려서 사망한 경우, 철거에 항의하다가 사망한 경우, 철거이후 천막생활을 하다 사망한 경우, 집주인의 퇴거요구나 강제철거를 비관해 자살한 경우, 철거지역에서 놀다가 벽이 무너져 사망한 아이들 등 다양한 죽음이 철거와 관련해 일어났다. 90년대 들어 정부는 재개발지역 일부 세입자에게 영구임대 아파트를 제공하는 정책을 폈지만, 수요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설령 영구임대주택 입주권을 획득한 후에도 철거민들에게는 임시주거지 확보가 남아있어 이들은 순환식 개발을 통한 가수용단지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인권해설: 기차길 옆 공부방
인권해설
기차길 옆 공부방이 있는 인천 만석동은 일제시대 때부터 형성된 빈민지역으로 대우중공업, 동일방직 따위의 큰 공장들과 부두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만석동 주민들은 대개 한국전쟁의 피난민과 60, 70년대 충청, 전라지역에서 이농한 사람들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큰 길가에는 빌라들이 들어섰지만 아직 동네 안쪽에는 판자나 시멘트 블록촌이 형성되어 있다. ‘기치길 옆 공부방’을 주도하고 있는 ‘만석동공동체’는 87년 4월 맞벌이 부부와 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으로 시작했다. 빈민 지역민들의 정서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자극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을 행동강령으로 삼은 이 공부방은 지역공동체의 성공사례가 되어가고 있다. 초창기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은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가 되었고 더불어 공부방 활동가가 되어 이 지역공동체의 한 주체가 되었으며 자원봉사 대학생들도 가정을 꾸려 하나 둘 이 곳 주민이 되었다. 이들 공동체의 이념은 밥, 집, 평화를 나누는 것. <인권 영화제>
인권해설: 꼭 한 걸음씩-청구성심병원 탄압과 투쟁 보고서
인권해설
건립이래 증축을 거듭하면서 고속성장한 청구성심병원은 은평구 유일의 종합병원으로, 중소병원으로는 드물게 경영 상태가 양호한 병원이다. 그러나 97년 12월 병원측은 IMF사태를 이유로, 상여금 지급불가, 직원 100명의 정리해고 방침을 발표한다. 이어 병원측은 임금 체불, 부부 직원이나 자매 직원에 사직강요, 임시직 해고 등을 강행하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이하 노조)을 협박과 폭력으로 탄압한다. 이로 인해 청구성심병원은 민주노총으로부터 ‘부당노동행위 사업장 1호’로 지목되고 지방노동위원회의 권고를 받았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탄압은 계속된다. 98년 8월, 노동조합 임시총회 전야제에 병원측이 동원한 용역깡패들의 오물세례와 식칼테러 등 무시무시한 폭력이 등장하기까지 한 것이다. 사태가 악화되자, 노사정위원회가 중재에 나서 98년 9월 가까스로 합의를 보았지만, 병원측은 곧 일방적으로 이를 거부한다. 그 후 강요된 희망퇴직으로 수십 명이 사직했고 병원측은 이를 거부한 조합원 10명을 98년 12월 불법적으로 정리해고한다. 이로 인해 97년 직원의 40%가 넘는 165명이 퇴직하게 된 것이다. 폭력과 협박 속에서 힘겨운 복직투쟁을 벌인 노동자들은 99년 4월 투쟁 1백일만에 병원측의 복직 통보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치위생사를 경비원으로 발령하는 등, 원직복직이 아니었으며 노조 파괴공작 역시 지속된다. 이에 노동자들은 지역주민, 학생, 여타 다른 노동자들로 구성된 청구성심병원 지원대책위 활동을 비롯한 연대투쟁을 강화한다. 청구성심병원 노동자들의 투쟁은 결국 99년 7월 ‘해고자 원직복직, 체불임금 지급, 민형사상 책임불문’ 등의 노사간 합의를 이루어낸다. 정부가 부당노동행위 근절을 선언한 98년 5월까지 양노총이 제기한 부당노동행위 사업장은 모두 598곳에 이른다. 그러나 노동부에 따르면, 이와 관련한 사업주 구속은 98년 16명, 99년 들어 6월 현재 8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들은 대부분 영세한 소기업 사업주이고, 이중 ‘부당해고’로 구속된 사업주는 지난해 2명, 올해 1명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대검찰청은 노동쟁의와 관련해 구속된 노동자 수는 98년 219명, 99년에는 6월 현재 72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하경/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해설: 프리야
인권해설
인류는 1934년에 인공방사능 물질을 만들어낸 후 1945년에는 급기야 미국의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대량 인명살상을 목적으로 한 핵폭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인류는 인공방사능 물질이 얼마나 인간과 생태계에 치명적인 것인지 알지 못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국정부는 거대한 군수기업체를 해체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핵발전소 개발에 엄청난 예산과 인원을 투입했다. 핵에너지는 그 탄생부터 정치권력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유착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초창기 과학자들은 통제만 잘한다면 핵분열물질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러나 1979년 미국의 드라마일섬 핵발전소와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를 겪게 되면서 서구 선진국들은 핵발전소의 추가건설을 중단하게 되었다. 체르노빌 참사로 인한 희생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중이며 그 본격적인 피해증상은 2010년경에나 드러날 것으로 UN의 조사결과 밝혀졌다. 최근에는 일본 토카이무라에서 대규모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이 죽음의 에너지는 계속 생명을 연장하고 있따. 국제적으로는 아시아, 동유럽과 같은 제3세계에, 국내적으로는 소숭니종지역이나 농어촌지역과 같은 정치적 약자의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미 14기가 가동 중에 있으며 정부는 계속 추가증설할 계획이다. 20세기 낡은 유산인 핵에너지가 21세기의 자원에너지 중에서 이미 경쟁력을 획득하고 있는 태양, 풍력 에너지와 같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의 개발에 큰 장애물로 버티고 서있는 꼴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섬짓함을 불러일으킨다. <최경송/청년생태주의자KEY>
인권해설: 콜롬비아 치욕의 전쟁
인권해설
콜롬비아, 아직도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35년간의 내전으로 민초들의 삶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다. 지난 한해 동안만 보안군과 민병대에 의해 죽은 민간인의 숫자는 천명을 넘는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죽기 전 고문당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 실종자의 숫자도 최소한 1백50명에 이른다. 이러한 인권침해의 대부분은 보안군과 민병대에 의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민병대의 활동은 1989년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반정부 게릴라 지역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늘고 있다. 이는 정부와 민병대 간의 검은 거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일례로 지난해 5월 한 민병대 그룹이 가난한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 11명을 죽였고, 이들이 떠난 이후 25명이 실종된 것으로 드러났다. 민병대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그 공격을 주도했다고 밝혔고, 정부 당국에 실종자들의 시체가 어디있는지도 알렸다. 그러나 정부는 민병대에 의해 끌려간 이들의 석방에 대해 애쓰지도 않았을 뿐더러 죽은 사람들의 시체도 확인하지 않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진 것은, 콜롬비아 보안군 관계자들 또한 그 학살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인권운동가들에 대한 위협과 공격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만 최소 6명이 살해당했다.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변호사 호세 에두아르도 우마나 멘도자도 그 명단에 속해 있다. 그는 20년이 넘도록 정치범, 노동조합활동가 그리고 실종자들의 친척들을 변호하고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들을 조사해 온 콜롬비아의 대표적 인권운동가였다. 인권침해 사건들을 조사하는 사법부 관리들, 기자, 정치운동가, 노동조합활동가들 또한 표적 대상이다. 노동조합대의원회 부의장인 조지 오르테가 가르시아 씨는 10월 총에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됐다. 죽기 전 수차례의 보호요청은 경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올해 초 기대를 모으며 시작됐던 정부와 반정부 게릴라간의 평화협상은 결렬된 상태다. 반정부 게릴라의 주된 요구는 △토지의 공정한 재분배 △민병대의 해체 등이었다고 한다. 평화협상 결렬 이후 총성은 다시금 높아지고 있다. 과연 콜롬비아 민중들이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끼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이주영/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해설: 소리 없는 흔적
인권해설
어린이들이 가족과 헤어지게 되는 경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 단 한 명의 어린이도 사회의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1990년대 어린이의 생존, 보호, 발달을 위한 세계 정상 선언 및 행동계획) 여기서 말하는 ‘최선의 노력’얼스턴 무엇일까?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너무 쉽게 ‘입양’으로 대치시켜 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동의 최상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 위에 서있는 유엔 어린이·청소년권리조약(1989년 제정)의 관련 규정을 살펴보자. 이 조약의 입양관련 조항(제20조, 21조)은 아동이 친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경우에 국가가 취해야 할 조치에서 입양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든지 부모의 보호를 박탈당한 아동은 국가로부터 ‘특별한 보호와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특히 국제입양은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조치로서 다뤄야만 하고 여타의 모든 가능성이 고갈되었을 때만 아동 보호의 대체 수단으로 조명될 수 있다고 본다. 현실 속에서 입양을 둘러싼 강력한 보호막의 형성은 난관에 부딪치기 쉽다. 입양 아동이 ‘자신의 친부모를 알 권리’와 ‘입양 기록의 비밀성과 가족 사생활의 보호’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입양되는 아동 자신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는가? 과연 몇 살부터 어느 정도까지 그 의견은 고려될 수 있는 것인가? 입양을 촉진하기 위해 입양 가정에 재정적 원조를 제공하는 방식의 도입이 권장할 만한 일인가? 양육 위탁된 아동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검사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표 하나 하나마다 아동의 최상의 이익이 위협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최선의 노력은 이런 물음표에 대한 진지한 고민부터가 아닐까?
<류은숙/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해설: 피로 물든 청춘
인권해설
15~17세기에 걸쳐 대만에 들어간 중국인을 원류로 하는 대만인을 본성인이라고 부른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은 2차대전의 결과 1945년에 중국으로 복귀했으며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만을 장악하면서 대륙에서 소속 외성인이 대만으로 들어갔다. 이런 배경에서 1947년 2월 27일, 본성인과 외성인의 충돌로 야기된 대규모 유혈사건이 바로 ‘2.28사건’이다. 타이페이의 야시에서 단속경찰이 담배를 암거래하던 여성을 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에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함으로써 시민 한명을 사망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항의하는 ‘본성인’의 시위는 삽시간에 전국에 확대되었으며 대륙에서 급거 증파된 장개석군은 이를 철저히 탄압, 2만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본성인’의 대규모 저항을 탄압한 국민당정권이 대륙에서 중국관당에 쫓겨나 중앙정부를 대반으로 옮긴 직후인 1949년 5월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대규모 ‘빨갱이사냥’을 벌이는데 1953년 말까지 계속된 이 백색테러의 진상은 지금도 어둠속에 감추어져 있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중반에 걸쳐 일어난 이 광적인 과정은 지금도 대만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1988년 이등휘 정권이 출범한 후 ‘2.28 사건’의 진상조사가 진행되었으며 백색테러의 생존자들이 화소도에서 모두 석방되었다. 당시 국민당정권은 정권유지의 차원에서 체포영장이나 절차없이 사람들을 끌어갔고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해 이들을 살해하고, 자루에 담아 매장하거나 수장하였으며 심지어는 국방의학원의 해부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인권해설: 장신구와 구슬
인권해설
땅의 영혼을 믿으며 땅과 호흡했던 사람들, 그러나 자신이 살아왔던 땅에서 추방당한 사람들. 세계 인구 가운데 3억을 차지하는 원주민(indigenous people)들은 ‘국가’의 탄생에 의해 땅에서 쫓겨난 이후 문화적 차별과 생존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고래잡이를 생업으로 살아온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70년대에 제정된 캐나다 연방어획규제에 의해 고래잡이를 금지 당했다. 원주민들의 땅에 석유탐사와 대량벌목이 이루어져 삶의 터전이 망가지고 있지만 땅에 대한 원주민들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고 있고, 발전에 대한 혜택마저도 모두 부유한 엘리트층에 집중돼 원주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인디언의 아동과 유아들에게는 공인되지 않은 실험용백신이 투여됐고 수천명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동의없이 불임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것을 반증하듯 미의회가 만든 알래스카원주민위원회는 94년 연구보고서를 통해 “원주민은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고 질병과 알콜중독, 자기파괴적 행동, 문화적 붕괴, 자존감의 상실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자인한 바 있다. 원주민 문제의 핵심은 국가가 땅에 대한 원주민들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원주민을 국가의 테두리 안에 넣으려 하는데 있다. 이에 따라 유엔은 원주민에 관한 인권선언을 채택하는 한편 지난 95년부터는 ‘국제선주민의 10년’을 선포해 적극적인 원주민 권리보호와 자결권 획득에 나섰다. 하지만 국가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원주민이 자신들의 땅으로 되돌아갈 날은 아직도 멀기만하다.
<유해정/ 인권운동사랑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