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뱃속 아기는 잘 자라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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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과 끝은 대리 출산을 의뢰한 이들과 대리모의 살가운 화상통화 장면이다. 의뢰인들은 대리모의 부른 배를 보며 경탄한다. 그녀가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기를 바라고, 가족들이 보고 싶다는 말에 안타까워하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서로의 호의로 가득한 두 번의 통화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대비된다. 그 사이에 우리는 화상캠 시야 바깥의 사실들을 목격한다.

 

수요와 공급이 국경을 넘나드는 지구화된 시장에 상업화된 의료 영역도 들어와 있다. 낮은 가격으로 높은 기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제 3세계’는 의료 관광의 주요 행선지가 되며, 영화의 배경인 인도는 특히 보조생식기술 분야의 국제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리고 ‘불임클리닉’의 성장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대리모까지 제공하는 ‘산업’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병원에 고용된 중개인들은 여성들에게 대리모가 되는 것을 설득한다. 공장 일만으로는 집세, 학비,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는 여성들은 대리모로 지원한다. 영화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이런 현실에서 인도 여성들의 삶에 ‘의료’가 어떤 얼굴로 개입하고 또 등을 돌리는지, 대리모 당사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의미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먼 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도 ‘대리모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러하고, 그것은 중요한 진실이다. 한국 사회도 전 지구적 시장 경제의 일부다. 국내에서도 암암리에 대리모가 중개되지만,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난자 거래나 대리모 매매가 이루어진다. 일국의 규제로는 한계가 있고, 관련된 사안들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부족하다.

 

그러나 ‘무엇을 문제로 볼 것인가’를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할 때, 영화의 메시지는 ‘대리모 문제’와 표면적으로 무관한 대다수 사람들의 코앞에 들이밀어진다. 가족의 유지와 국가의 재생산을 위한 ‘몸(자궁)’으로 존재해온 여성들. 의료의 ‘대상’이 되어 자기로부터 소외된 몸들. 특정 기술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주류 규범을 강화하고 부작용을 축소 광고하는 의료 현실. 전제된 권력 구조는 은폐된 채 선택지란 미명으로 여성들에게 제시되는 어떤 실천들.

 

기술과 시스템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생겨나며 발전한다. 그러한 ‘정치’ 속에서 어떤 것은 강화되고 어떤 것은 보이지 않게 된다. 영화는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대한 여성들의 증언이다. 그리고 화상캠 시야 바깥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진실들이 존재하듯이, 이 영화의 프레임 바깥에,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 속에 이미 ‘대리모 문제’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여성 몸의 문제들이 존재한다.

제이(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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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자, 이제 댄스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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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인공임신중절은 형법으로 처벌된다. 모자보건법에 적시된 극히 협소한 사유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닌 모든 ‘낙태’는 원칙적으로 범죄이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낙태’의 만연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한편 1960년대에는 인구관리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임신중절을 종용하기도 했다. 그때도 형법상 낙태죄 처벌조항이 있었지만, 많은 여성들이 암묵적인 허용 하에 여러 차례 수술대에 올랐다. 최근까지도 낙태죄는 사문화된 법이었다.

 

2010년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이 임신중절 수술을 한 병원을 고발하며 ‘낙태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마침 정부도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낙태’의 엄중 단속에 나섰다. 몇 개월간 시술 비용이 10배 넘게 뛰었다. 중국으로 ‘낙태’하러 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언론에서 노골적인 비난조로 다뤄졌다. 음성적인 시술을 받던 중 목숨을 잃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민우회로도 상담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을 문의하는 여성, ‘낙태’를 강요받고 있는 여성, 남성 파트너에게 낙태죄로 고발당한 여성 등 다양한 처지의 여성들이었다. 최근엔 특히 남성이 ‘다시 만나달라’거나 돈을 요구하며 여성을 낙태죄로 협박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임신중절은 생명윤리의 문제도 아니고, 여성의 ‘선택권’의 문제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낙태’를 하고 싶어서 하는 여성은 없다. ‘낙태’를 ‘선택’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피임 교육의 미비, 아이를 낳아서 양육하기 힘든 사회경제적 조건, 비혼으로 아이를 낳아도, 장애아를 낳아도, 여아를 낳아도 차별받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말하기에 앞서 여성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려 처벌하는 것은 국가 폭력이다. 여성들을 처벌하여 낙태율을 낮추겠다는 것은 현실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외면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현실을 얘기하면 ‘그럼 낙태를 찬성하는 것이냐’는 반문이 되돌아온다. 이 영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찬반론에 묻혀서는 안 되는, 생명과 선택의 이분법에 갇혀서는 안 되는 여성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있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생명’으로서, 태아를 포함하여 이 세상과 연결된 존재로서 자신의 몸과 성에 대한 권리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곳에서 모든 논의가 출발해야 한다.

 

제이(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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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자매에게 정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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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과테말라시티에서 열린 ‘국제여성폭력근절의 날’, 이 날 행사에 참가한 여성들은 ‘696’이라는 숫자를 쓴 촛불들 앞에서 함께 하늘을 향해 풍등을 날렸다. 이 숫자 ‘696’은 2013년 과테말라에서 살해된 여성들의 숫자이다. 과테말라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여성 살해 수치가 가장 높은 나라이다. 2000년에서 2008년 사이에 4,159 명의 여성들이 살해되었고, 2008년에서 2011년 사이에는 2,900명의 여성들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2012년에도 살해된 여성들이 600명에 달했다. 물론 이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숫자에 불과하다. 실제 살해, 미수, 폭력 사건들은 훨씬 더 많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끔찍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2009년 4월에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과 인권활동가들의 수 년 간의 노력 끝에 ‘여성살해 범죄에 대한 처벌법’이 제정되었지만, 통계에서 드러나듯이 여전히 수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여성살해’(Femicide)라는 용어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여성혐오로 인해 발생하는 살해의 맥락들을 드러내기 위한 용어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여성들이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거나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았거나 남자 같은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이유로, 또는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가족, (전)남편, (전)애인, 혹은 무작위의 남성들로부터 심각한 구타와 신체 훼손, 염산테러, 강간에 시달리다 죽어가고 있다. 이 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여성살해의 유형은 ‘가정폭력’과 남편/애인, 전 남편/전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다. 특히 중남미의 경우 여성살해 범죄들이 더욱 조직화되고, 대규모로 벌어지며, 정부와 공권력은 이를 제대로 조사하거나 처벌하지도 않아 중남미에서는 이러한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femicide’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feminicidio’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과테말라는 36년에 걸친 오랜 내전 동안 여성들을 폭력적으로 강간해 온 역사가 있는데다가, 1980년대부터 강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양극화와 실업문제가 심화되면서 가부장적 폭력이 더욱 심각해졌다. 대체로 집안과 마을에 머물며 가사노동이나 가내수공업을 하던 여성들이 직접 일자리를 찾아 멀리까지 나가서 자신의 일을 하고 일터와 공적 영역에서 힘을 확보해 나가자, 이러한 여성들에 대한 일종의 가부장적 처벌로서의 혐오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 보고에 의하면 11살 이하의 여자아이들을 엄마와 함께 살해하는 사건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여성들이 처한 빈곤과 열악한 사회적 환경은 이런 상황들을 더욱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2009년 관련법이 제정되었어도 좀처럼 살해 수치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 태도를 가지고 가해자들을 제대로 조사하거나 처벌하지 않는 경찰 당국과 사법부의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여성들이 처해 있는 심각한 사회적 조건과 환경들에 대해 정부가 제대로 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레베카의 싸움은 단지 동생 아델을 위한 싸움만이 아닌, 이 거대한 가부장적 공모의 세계에 맞서는, 과테말라의 모든 여성들과 함께하는 싸움인 것이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GP네트워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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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모타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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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감>에서 여성인권을 주제로 작은 세미나를 했는데, 논쟁이 있었다. 한국은 과거에 비해 여권이 신장되었으며, 오히려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문제된다는 의견으로 촉발된 논쟁이었다. 과연 한국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문제될 만큼 평등한 국가가 되었을까.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3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성평등 순위는 136개국 중 111위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순위는 아랍 국가들과 비슷하였다. 한국은 여전히 경제 참여와 정치권력 등에서 심각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이러한 한국의 성평등 순위에 대한 인식조사를 하였는데, 남성응답자와 여성응답자 사이의 의견 차이가 컸다. 남성의 경우 성차별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한국이 하위권이라는 점을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많은 반면, 여성의 경우 성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고 아직 한국은 미흡한 수준이라고 느꼈다. 현실과 인식 차이의 간극이 크다. 저성장의 경제 상황 속에서 취업난을 겪고 있는 남성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위기감이 ‘남성에 대한 역차별’ 때문이라고 오조준된 것은 아닐까. 과연 이 지구상에서 여성들은 자유와 평등을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여성에 대한 억압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다. 2009년, 아프가니스탄은 시아파 가족법(shia Family Law)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의하면 여성은 남편의 허락 없이 외출할 수 없으며, 남성의 성적 요구에 대해서 거부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득세하며 여성에 대한 억압이 강화된 것은, 서구국가들의 침공 영향이 크다. 영국군이 점령하였을 당시 영국 군인들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프가니스탄 문화 속에서 낯선 경험이었고, 아프가니스탄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존중과 보호’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다. 여성들의 권리,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면 서구세력의 추종자들로 매도한다. 한 사회의 지배세력은 자신들의 통치체제와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서 전통과 종교, 사회규범 그리고 법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회의 취약한 집단을 억압한다.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은, 그래서 여전히 불온하고 급진적인 투쟁이다.

 

장서연(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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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발렌타인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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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게이 같다”가 흔한 놀림거리가 되는 공간이다. 게이로 커밍아웃했던 래리에게 괴롭힘과 따돌림은 이미 일상이었다. 그러나 래리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젠더정체성을 탐색하고 드러내기에 이른다.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은 더 심해졌지만, 그/녀가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귀걸이를 하고 학교에 가는 일은 ‘래리’가 아닌 ‘래티샤’와 ‘라토냐’로 살기 위해 중요해 보였다. 자기 옷차림과 행동을 통제하려는 교사들 앞에서, 래리는 어떻게든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실천으로 맞섰다. 그런데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래리가 좋아하던 브랜든에게 데이트신청을 하자 친구들은 브랜든마저 놀려댔다. 모욕감을 느낀 브랜든은 래리의 머리에 두 발의 총을 쏘았고, 래리는 이틀 뒤 발렌타인데이에 사망했다.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과 브랜든에 대한 재판을 전후로 교사와 배심원, 변호인, 그리고 유력 언론사들은 래리의 “위험할 만큼 주목을 끄는” 젠더 표현에 초점을 맞춘다. 교사들은 래리가 ‘남성’임에도 과장된 여성적 꾸밈과 행동을 드러냈으며 이것이 브랜든을 포함한 다른 학생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했는지 증언한다. 배심원들은 래리의 행동으로 인해 브랜든이 “게이공포”에 빠졌다는 식의 변론에 공감하며 그를 동정하고, 심지어 무고하다고 여긴다. 언론은 결국 성소수자 혐오로 인한 살인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개인의 특이하고 반사회적인 성향이 부추긴 살인사건으로 희석시키려 한다.

 

래리의 죽음과 브랜든의 재판을 둘러싼 일련의 반응들이 곧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를 가능케 하는 사회의 단면이다. 혐오범죄는 이름붙이는 일만도 여전히 논란거리가 된다. 래리가 ‘헛된’ 죽음에 이르도록, 동성애자를 놀림거리로 삼고 트랜스젠더의 삶을 모욕하게끔 만드는 공간은 누구에 의해서 구성되고 유지되는가? 학교는 래리를 지지했던 교사를 해고했고, 래리를 추모하는 나무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래리는 ‘별종’이 아니다. 브랜든이 ‘악마’인 것도 아니다. 이들의 성장배경은 학교 안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절실했으리라는 점을 말해줄 뿐, 어떻게 성적지향이나 젠더정체성이 살인의 이유가 되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마르타 커닝햄 감독은 사건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을 그저 목격하게 해주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서 래리의 죽음에 함께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 법정에 서야 할 대상은 차이와 관용을 가르치기에는 이미 너무도 불관용한 어른들이다. 두 어린 학생의 삶을 망가뜨리고도 시치미 떼고 안타까워만 하는 이 사회다.

 

래리가 죽고 난 이듬해에, 한국에서는 한 남자고등학교에 다니던 청소년이 동성애자로 소문이 나면서 괴롭힘을 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소수자 혐오와 이로 인한 죽음은 우리에게도 너무 가까이에 있지만, 혐오는 여전히 어쩌지 못하는 일처럼 남아있다. <발렌타인 로드>는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혐오범죄가 먼저 제대로 말해지고 기억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동성애자였을까, 트랜스젠더 여성이었을까? 이들의 삶과 자기표현, 그리고 행복에 어떠한 관련이 있었을까? 이들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죽어갔나? 이들이 지금까지 단지 살아있기라도 하기위해, 우리 사회에 무엇이 필요했을까? 질문을 던져보자.

 

야릉(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

34인권해설

인권해설: 모두가 괜찮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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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고 설거지하고청소하고마당에서 담배 피우고식물을 기르고걱정하고 안아주고어디가 불편한지 물어보고중요하고 시시한 이야기를 하고 듣고농담하고 장난치고친구가 찾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여기는 ” 입니다안전한 집살아 있는 집웃음소리울음소리가 들리는 집그래서 자연과 같은 집긴장하지 않고 일상을 영위하는 집쉼터는 이런 곳입니다그런데 우리말로 쉼터라고 쓰고 읽으면 몸과 마음의 안식처라기보다 왠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좋은 곳으로 생각되지는 않은지요?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충격적인 경험을 하면서 살아갑니다그 경험은 몇 날 밤 자고나면 생각나도 별스럽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하고강하지만 일시적인 스트레스로 왔다가 곧 사라지기도 하고기억의 저편에서 있다가 어느 사이에 눈앞의 생생한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그래서 과거의 시간 속에 있는 그 경험그때의 감정은 현재의 나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줍니다같은 경험에도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는 것은 왜 일까요성공적인 결과를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는 의식이 보편적인 곳에서는그 경험을 한 사람의 의지가 약하거나 강해서 혹은 원래 현명하거나 바보 같아서 라고 말하는 예가 흔합니다그러나 이런 이유들은 트라우마 생존자의 치유를 어렵게 하는 선입견입니다.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그 트라우마가 발생하는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제대로 사과를 했는지공동체의 공적이고 사적인 관계에 있는 구성원들이 생존자의 고통을 인정하고 공동의 책임을 통감하는지생존자가 치유를 위해 노력할 때 그 노력을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나 지지하는지그래서 트라우마의 치유를 생존자 개인의 분투가 아니라 공동체의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지그리고 유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각도로 노력하는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트라우마는 누구나 겪을 가능성이 있으며그 치유에는 이런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친구들에게학교에서지역 사회에서고통을 인정받기는커녕따가운 곁눈질과 수군거림과 내버려둠이 온통 자신을 둘러 쌀 때생존자와 그의 생활 사이에는 커다란 절단이 발생할 것입니다이런 채로 시간마저 무심히 흐르면 그의 고유한 성격도정체성도 변할 것입니다그에게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이음새도 없이 끊어진 생존자의 생활과 공동체적인 관계는 회복되고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끼니를 챙겨 먹고일하고친구와 우스갯소리를 하거나 다투고밤에 잘 자는 일상생활을 다시 이어가는 것과 치유는 서로를 도와줍니다생활을 연습하는 것연습을 통해 익숙해지고다시 자신의 삶을 사는 것그렇게 삶은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래서 트라우마 생존자들에게 쉼터는 삶의 과정 중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중요하지만 평범한 과정의 일부분일 것입니다서로 눈 마주치며 끊임없이 대화하고옆 사람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시간이 흐르면서 스스로 자연과 같이 변하며 나아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는 것은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트라우마를 경험하기 이전으로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간다는 것일까요마음에 고통 한 점 없는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일까요강인한 의지와 굳센 신념으로 치유회복의 성공신화를 창조한다는 것일까요어떤 일에서 결과만 보고그것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트라우마 경험의 유무를 떠나서도 삶을 조급하게메마르게어리석게 만들기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상처투성이 꿰맨 자국이그 이음새가 선명하더라도 계속 그 과정을 찬찬히 살피고 돌보며 이어 나아가는 것회복의 요체는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그러니 모든 것이 괜찮지 않을 거라고(Everything will not be fine) 말할 수 있다면거기에 고개 끄덕일 수 있다면그것이 진정 괜찮은 것이 아닐는지요사족이지만선하고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아직 강한 것이 못된 상태이거나 강한 것이 되어야만 하는 미완성미성숙의 것이 아니라그 자체로 완성된 온전한 것이 아닐는지요.

홍혜선(트라우마치유공동체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

25인권해설

인권해설: 리디아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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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사람들은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 묻는다. ‘대한민국 사람인데요.’ 아이는 당연한 질문을 하는 어른들이 이상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아이는 어른들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를 그리고 자신이 소위 ‘불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때부터 괜히 무섭고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동네에 경찰이 나타나면 겁부터 난다. 누군가 잡으러 올까봐 무섭고, 이제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을 때면 그 질문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서 딴청을 부린다.

 

이 땅에 살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로 여겨지는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적법이 속인주의에 기반하고 있어 부모가 미등록이면 한국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출생등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1991년 가입,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에 의하면 부모의 신분에 상관없이 아동의 체류권, 교육권, 건강권 등은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이다. 안정적인 체류가 보장될 때 차별 없이 신체적, 사회적,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성장, 발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협약을 비준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권리들을 보장하고 있다. 지난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도 ‘부모의 체류자격에 관계없이 모든 이주노동자 자녀에게 부모와 함께 지내며 양육 받을 권리와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양육비와 의료비를 지원하는 사회복지체제를 구축해야 함’을 권고한 바 있다. 그나마 초중등교육법시행령 개정으로 교육제도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지만, 강제추방의 불안과 사회보장의 허점들은 일상의 곳곳에 차별을 드리운다. 수학여행 같은 학교행사에 보험이라도 들라치면 등록번호가 없어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행여 여행지가 제주도나 해외라면 친구들과의 여행은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매일 확인하면서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좌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를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속 리디아 또한 마찬가지이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지만 거주 허가가 없어 경찰만 보면 무서운 생각이 먼저 들고 거주는 불안정하다. 7번의 이사와 전학은 곧 친구와의 이별이고 사람 사이의 관계망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도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는 일만큼이나 힘든 일이기에 리디아는 안정적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노래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문화사회’라는 그럴싸한 구호가 아니라 누구나 국적이나 신분에 차별 없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이다.

묘랑(인권교육센터 들)

23인권해설

인권해설: 유언

인권해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지 3년이 지났다. 아직도 약 27만 명이 피난 중이고, 방사능 오염수는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원전 해체와 복구에 수십 년, 최소 500억 달러(약 53조원)가 필요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언론에서 보도되는 어마어마한 숫자와 금액은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이다테무라 마을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45km 떨어진 지역으로 낙농업을 주로 하며, 마을 만들기 사업이 성공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쿠시마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고, 가족과 같은 소들이 죽는 모습을 참담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012년 3월 반핵아시아포럼을 위해 한국에 방문한 하세가와 겐이치 이장님은 “‘고향’이 가슴 아픈 말이 될 줄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건강 위협 때문에 강제 피난한 사람들은 ‘집’이 아닌 곳에 집단 이주해 살고 있다. 방사능은 노인부터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를 위협한다. 자기 집에 거주할 권리와 일할 수 있는 권리, 건강하게 살 권리, 야외에서 놀 권리 등을 모조리 빼앗긴 이들의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하듯이 이들은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참상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 방사능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다. 하세가와 이장님이 일본 각지를 돌며 핵발전소의 문제점을 알리고 ‘탈핵’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후쿠시마의 교훈을 무시한 채 원전 재가동과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 또한 원전 확대와 수출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23기인 원전을 2035년까지 최소한 39기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한다.

 

영화에서 던져주는 유언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고, 삶과 노동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권승문(녹색연합 에너지기후국 활동가)

24인권해설

인권해설: 레드툼

인권해설

진실의 일부만 드러난 ‘보도연맹 학살’의 진실은?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49년 6월 5일에 일제의 미대화숙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 주로 좌익성향의 인사들을 가입시켰다고 하지만 지역별 할당제로 인해서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도 가입시켜 10대 청소년들마저 가입시켰다. 1949년 말에 30만 명이었다는 통계도 있으니 규모가 꽤나 큰 민간단체 형식을 띤 실제로는 관변 단체였다. 보도연맹원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은 게 아니라 실제로는 종종 소집당해 체벌을 당하면서 극단적인 반공교육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원과 정치범들이 북한과 내응하여 배신할 것을 우려하여 예비검속을 단행하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대전교도소 3천여 명의 학살을 비롯해 인민군 미점령지였던 경상도 일대 지역에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산골짜기, 우물, 탄광 갱도가 주로 이용되었고, 심지어는 경남 일원의 바다에 수장하는 일마저 있었다. 학살은 육군특무대(CIC), 헌병, 경찰 등이 주로 했고, 서북청년단과 미군도 가담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학살당한 수는 10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유족들이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활동을 개시하였고, 장면 정부는 위령제에 위로금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 이후 군부정권은 소급법을 만들어서 유족들을 빨갱이로 지목하여 요시찰 대상으로 지정하여 감시하고, 연좌제를 적용해 고통을 주었으며, 정부의 모든 기록을 소각하게 만들어서 진상을 철저하게 은폐하려 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피해자와 가해자 조사, 유해 발굴 등을 전개했고, 울산보도연맹 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했다. 이를 근거로 유족들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우여곡절 끝에 2012년 국가배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정지된 뒤 국가에 의한 진실규명은 작업은 중단되어 있는 상태다.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

23인권해설

인권해설: 삐 소리가 울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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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은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들지도 않는다. 1968년 이승복 군의 죽음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삐~’ 소리와 함께 하나하나 열거할 뿐이다.

이승복이 살해당할 당시 현장에 있었을 리 만무한 언론은 이 상황을 마치 자세히 본 듯 재연한다. 이승복의 입이 찢기고,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여의도 광장을 누비는 학도호국단의 일사 분란한 모습, “때려잡자 김일성”을 외치며 혈서를 쓰는 청년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살벌한 구호들이 난무하는 대규모 반공시위, 사살되어 헬기에 매달린 채 날아가는 공비의 시신, 이승복 동상, 이승복 추모제, 이승복 기념 웅변대회… 화면은 1982년 세워진 이승복 기념관을 찾은 전두환을 비추고, 여전히 줄을 잇는 추모인파를 보여준다. 이승복은 세세토록 ‘반공’의 영웅이 되어간다. 그 사이 시원하게 뚫린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정말 잘 사는 나라”가 됐다.

 

오랜 세월, ‘반공’은 이 사회를 유일하게 지배한 광기였다. 반공에서 승공으로, 승공에서 멸공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이 나라 국민들은 ‘반공을 위한 삶’을 살았다. 영화는 증오에 가득 찬 반공 이데올로기를 위해 한 어린이를 우상으로 만든 시대의 초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오늘’을 말하거나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주 강렬한 데자뷰(deja-vu)를 느끼게 한다. 1968년 ‘반공’은 2014년 ‘종북’으로 부활한다. 이승복 영화와 반공궐기대회는 기득권 언론의 요란한 여론재판으로 대체되었다.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는 ‘탈북자 간첩’으로 재현된다. 대통령은 아버지에서 딸로 바뀌었다. 단도직입적이고 펄펄 끓는 광기는 사그라졌을지 몰라도 적대와 증오, 배제의 논리는 여전하다. ‘종북’이라는 마법에 걸려들면 국회의원도 내란죄인이 된다. 정당도 해산되어야 한다. 그리 판단할 만한 정당한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다고 굳게 믿는 ‘주술’이기 때문에 애당초 소통은 불가능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대는 분명 광기에 가득 찬 반공의 시대다. 그 시대를 역사의 강물로 흘려보냈다, 고 단언하기엔 우리 사회는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내면화 되어 있다. 레드에 대한 과장된 두려움, 부풀려진 걱정. 그로 인한 절대적인 편견.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강박증적인 행태. 사실적인 실체에 대한 정당한 공포가 아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잣대에 의한 불안 증세다. 거기에 갇히는 순간, 이성은 거처할 곳이 없다.

과거에서 자연스레 현재가 그려지는 이 영화는 그래서 유쾌할 수 없다. 이 ‘유쾌할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할 이유가 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다시 기억하자고 하는 것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이유를 대면하고 직면해야할 필연성 때문이다.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도 볼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다시 떠올리려 하는 것은, 다시는 우리 사회가 그 위험성에 감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광기의 시대를 잊는 것은, 언제고 다시 그 광기의 시대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국민들이 항상 리더의 명령에 따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정에서 헤르만 괴링(나치정권 2인자, 강제수용소 창설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처형 직전 음독자살)이 남긴 말이다. 내가 아는 말 가운데 가장 모욕감을 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 본질의 가장 어두운 측면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깊이 새긴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을 알기도 전에 ‘증오‘부터 배워야 했던 야만의 시대는 단 한번으로 족하지 않은가.

송소연 ((재)진실의힘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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