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나. 우리가 광장이다.

프로그램 노트

2020년 9월 30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7일에 걸친 청와대 앞 농성을 마쳤다. “성역 없는 진상규명”. 이번 농성에서도 가족들의 요구는 똑같았다. 촛불의 힘으로 정권을 바꾼 지 3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이란 단어는 뉴스에서 사라졌고, 세월호 참사 피해자 유가족은 여전히 청와대 앞에 서있다. 세상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기억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광장에서 함께 약속했다. 겨울의 추위도 이겨낸 약속이었다. 따뜻한 봄을 되찾겠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길 몇 차례. 광화문 광장을 지키던 노란 리본은 광장 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광장을 채우던 백만 개의 촛불을. 며칠 전 거리에서 마주쳤던 노란 리본을. 4월이 되면 잊지 않고 ‘세월호’를 말하는 사람들을. 그렇기에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라는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노란 리본 곁을 지키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 근무하는 학교에서 매해 학생들과 416기억행사를 열던 선생님은 5년 만에 처음으로 동료 교사와 함께 행사를 준비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뜨거운 물과 라면을 준비했던 카페 사장님은 오늘도 노란 리본을 붙인 빵을 판매한다. 애써 뉴스를 피하고 수능을 준비하던 고3 학생은 지금 대학교에서 기록관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도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하루를 시작한다.

세월호 광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잊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광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내어 세월호 광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낸다. 코로나19로 인해 서로를 경계해야 하고 사람이 사람 곁에 다가갈 수 없는 요즘, 광장은 사라진 것 같다. 사람이 없는 공터는 ‘광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사람이 있는 곳은 언제든 ‘광장’이 될 수 있다. 서로의 온기를, 그 연결을 잊지 않는 한 우리의 광장은 다시 가능하다. 당신, 나. 우리가 광장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64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당신의 사월>은 어떠했느냐

인권해설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만 6년이 훌쩍 넘었다.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났지만 4월 16일 그날의  아침은 여전히 분초 단위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만 그럴까 싶어 주변에 물어보면 대부분 자신도 그렇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다함께 지고 가야 할 십자가여서 그런 것일까. 그날을 지나 온 우리는 모두 세월호 참사의 목격자이자, 당사자이다. 영화 <당신의 사월>은 그런 우리들, 나,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이다.

감독이 영화 출연을 제안 했을 때 거절할까도 싶었다. 세월호 참사 작가 기록단으로 <금요일엔 돌아오렴>과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를 통해 유가족의 목소리가 이 사회에 들리도록 하려고 했다지만, 지금은 ‘참사의 해결은 누구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다’ 생각하고 지낼 뿐, 실천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절을 못한 이유는 바로 동일한 이유, 즉 실천적 활동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마음의 무거움 때문이었다. 미안함에 지지 않으려고 참여했다. 미안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실의 배를 더 침몰시키는 게 아닐까.
사실 많은 이들이 열심히 투쟁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끄럽다며 계속 삼킨다면, 침묵만 하나 하나 쌓여갈 것이다. 그러다 결국, 우리가 함께 했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노래와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 물거품으로 되지는 않을까. 사람은 미안함이 크면 처음엔 숨을 쥐구멍을 찾다가, 미안함이 계속되면 결국 자신을 합리화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우리 모두 항상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위해 크고 작은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가. 진실의 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오늘도 작은 실천들로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노란 리본을 달고 붙이고, 노란 팔찌를 끼는 등. 그 작은 움직임들이 모이다 보면 언젠가 거대한 파도가 될 수 있을지도! ”<당신의 사월>은 어떠했느냐”고 영화는 묻는다. 영화를 보며 답하자. 아직도 우리는 그 사월에 살고 있으며, 잊지 않을 것이고, 그 사월을 가린 장막을 걷어낼 때까지 끈질기게 그날의 기억을 가져갈 것이라고.

정주연

55인권해설

이방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프로그램 노트

매년 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오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코로나19 상황은, “이방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코로나19라는 ‘적’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우리’에, 한국에서 거주하고 일하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포함되지 못했다. 코로나19가 우한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었고, 이주민들은 초기에 공적 마스크를 살 수조차 없었다. 영주권자가 아닌 경우에는 재난지원금을 받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주민들이 모국어로 된 보건 및 방역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무엇을 특별히 ‘바꾼’ 것은 아니다. 어느 이주노동자들은 원래부터도 거주지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비닐하우스에 살았고, 한국인 노동자들보다 강도 높은 노동을 일상적으로 요구받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채로 살아왔다. 코로나19 위기는 그 모든 차별에 또다시 새롭고도 서러운 차별들을 덧대었을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 ‘지금’, ‘이곳’을 떠나야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세계 속에서 ‘나’의 장소는 어디일까? 한국인의 아메리칸 드림, 혹은 서구에 대한 선망은 어떤 식의 응답을 받아왔나? <야간근무>에서 공장장은 한국인 노동자 연희와 이주노동자 린을 나란히 두고 “열심히 하면 연희에게는 관리자 직급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옆에서 ‘남의 떡’일 뿐인 기회에 관해 듣고만 있어야 하는 린은 마치 투명인간 같다. 하지만 연희는 린처럼 한국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할 수 없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려 한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캐나다로, 프랑스로의 이주를 꿈꾸는 여느 한국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호주에서도, ‘이방인’으로서 연희의 삶은 녹록지 않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감할 수 있다. ‘호주 괴담’을 우려스럽게 전하는 연희 어머니의 표정은 심상찮다.

코로나19를 통해 유럽 각국에서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아시아인에 대한 적대와 테러를 보라. 어느 사회에나 ‘우리’라는 관념이 존재하고, 바깥의 존재들은 ‘우리의 몫’을 빼앗거나 위협하는 존재로 쉽게 간주되면서 그 입구를 뚫지 못한다. 헌데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매일매일의 상호작용이다. 개별의 삶이 구체적으로 상상되지 못하고 이방인(Stranger)이라는 납작한 이름만이 남을 때, 그들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주민들이 가족과 고향에 대해 품는 그리움, 교육에 대해 갖는 열망, 우정에의 희망, 그 모든 ‘서사’가 뒤로 밀려날 때, 이주민은 그저 투명인간으로 남겨진다.

분명 ‘우리’의 원을 더 넓혀가려는 시도들은 존재한다. 가령 포르투갈 정부는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이주자와 난민에게 일괄적으로 임시 시민권의 지위를 부여하기로 했다. 모두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방역이라는 목표를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이주자와 난민들에게 ‘지금-여기에 속해있다’는 안전한 느낌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공동체의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또 어쩌면 누적되는 피로와 불안이 ‘치안’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그들은 영리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당신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 ‘조건부 환대’로, 아직은 옆의 존재에게 완전한 곁을 내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들은 손을 내밀었고, 그로부터 우정과 연대의 가능성이 피어오르게 되었다. 다시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볼까? 아직도 공적 마스크조차 살 수 없는, ‘미등록’된, ‘불법’의 존재들은 그렇게 ‘이기적인 조건부 환대’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심지

61프로그램 노트

(공동성명) 서울인권영화제의 <제3의 성(Third Person)>(2015) 작품 상영 취소와 함께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을 선언합니다.

소식

(공동성명) 서울인권영화제의 <제3의 성(Third Person)>(2015) 작품 상영 취소와 함께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BDS운동을 선언합니다.

Korean Film Festivals and Civil Movement join the Palestinian BDS Campaign against Israel – along with the cancellation of Israeli film by SHRFF

1. 21회 서울인권영화제의 <제3의 성(Third Person)>(2015) 작품 상영 취소

 2016년 3월 31일, 서울인권영화제는 ‘인터섹슈얼(intersexual)’을 소재로 이스라엘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 <제3의 성(Third Person)>(2015)을 21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으로 기정한 계획을 전격 취소했습니다. 이 결정은 이스라엘 영화 한 편에 대한 단순한 거절이나 거부가 아닙니다. 이 결정은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하는 점령과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이고, 점령과 차별에 공모하는 문화 창작물에 대한 우리의 보이콧 행동을 촉발하게 된 계기입니다.

서울인권영화제가 <제3의 성(Third Person)>의 상영 취소를 결정한 이유는 이 영화의 제작·배급에 대한 다음의 사실들이 그대로 말해줍니다. <제3의 성(Third Person)>은 이스라엘 정부의 외교·문화·군사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National Lottery, CoPro 재단, Gesher 재단의 지원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National Lottery는 이스라엘 정부가 관할하는 복권 사업 기관이며, CoPro 재단은 이스라엘 외교부의 보조금으로 자국 영화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기관입니다. 영화제작 지원사업을 운영하는 Gesher 재단은 “유대주의 비전” 아래 이스라엘을 “유대인 국가이자 민주 국가”로 홍보한다는 사업 목표를 홈페이지에 명시할 정도로 현재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넘는 비유대계 사람들에 대한 차별 노선을 당당히 밝히는 기관입니다. 이 기관은 이스라엘 군(IDF)에 장교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상의 사실에 기초해 서울인권영화제는 <제3의 성(Third Person)> 상영 취소 결정이 점령국이자 인종차별 국가인 이스라엘을 보이콧하는 행동의 일환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 상영 취소 이유: 팔레스타인의 BDS운동 요청과 그에 대한 응답

 서울인권영화제의 <제3의 성(Third Person)> 상영 취소 결정은 이스라엘을 반대하고 압박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조직된 BDS(Boycott·Divestment·Sanctions, 보이콧·투자철회·제재) 운동에 대한 연대 행동이기도 합니다.

1967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서안지구, 가자지구)와 예루살렘을 무단점령해 군사통치와 식민화를 시작한 이래로 지금껏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삶의 터전, 가족, 친구, 그리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꿈과 희망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은 한때 자살폭탄 공격이라는 끔찍한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팔레스타인 시민사회는 ‘팔레스타인 BDS 민족위원회(Palestinian BDS National Committee)’를 발족해 BDS운동이라는 새로운 저항의 시작을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국제법에 의거해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본권을 존중할 때까지 이스라엘 보이콧, 투자철회, 제재를 위한 행동을 조직해줄 것을 전세계 시민사회에 요청한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 요청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은 반식민주의와 비폭력의 가치를 지키면서 이스라엘에 직접 행동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연대와 진보의 틀을 제공했습니다.

<제3의 성(Third Person)> 상영 취소 결정은 BDS운동 중에서도 학술·문화 분야의 보이콧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참조했습니다. ‘이스라엘 학술·문화 보이콧을 위한 팔레스타인 캠페인(Palestinian Campaign for the Academic and Cultural Boycott of Israel·PACBI)’이 오랜 논의와 의견수렴을 거쳐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이러합니다.

 

▲ 가장 중요한 일반 원칙은, 그렇지 않다고 판명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데 이스라엘 문화 기관들이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모 양상은 침묵하는 것에서부터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 및 인권 침해를 정당화·은폐 또는 그 사실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데 적극 가담하는 것까지에 걸쳐 있다.

▲ 가장 중요한 일반 원칙은, 그렇지 않다고 판명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데 이스라엘 문화 기관들이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모 양상은 침묵하는 것에서부터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 및 인권 침해를 정당화·은폐 또는 그 사실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데 적극 가담하는 것까지에 걸쳐 있다.

▲ 이스라엘 공공 기관에서 위탁한 생산물, 혹은 ‘브랜드 이스라엘(Brand Israel·점령 은폐를 위한 이스라엘 정부의 국가 브랜드 이미지 캠페인)’ 및 그와 유사한 프로파간다에 봉사하는 비(非)이스라엘 기관이 의뢰한 문화 생산물은 보이콧 대상이다.

▲ 이스라엘 공공기관 또는 이스라엘 공모 기관의 후원을 받은 문화 행사∙활동은 보이콧 대상이다.

▲ 이스라엘 국가, 이스라엘 공모 기관, 이스라엘 관련 로비 단체의 기금을 받은 진실규명사절단과 연구순방은 보이콧 대상이다.

(전문 링크: http://www.pacbi.org/etemplate.php?id=1047)

 

위 내용에 따르면 <제3의 성(Third Person)>은 보이콧 대상 조건에 완전히 부합합니다.

 

3. <제3의 성(Third Person)> 측과 이스라엘 대사관의 반응

서울인권영화제가 <제3의 성(Third Person)> 측에 상영 취소 결정을 통보하자마자 이 영화의 배급사와 제작사는BDS운동에 대한 비난·폄훼와 함께 영화제의 상영 취소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을 수차례 전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배급사 담당자는 “팔레스타인이 여성, 퀴어,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루는지 아느냐”고 물으며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것은 퀴어나 여성 인권에 반하는 행위라고 이메일에 적기도 했습니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도 영화제에 연락을 해왔습니다. 대사관은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결정 재고를 요구했고 공관차석과의 미팅도 제안했습니다. 4월 11일 발송한 이메일에서는 “BDS는 아파르트헤이트보다 더 심한 범죄 행위”라고 명시된 영문기사를 첨부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제3의 성(Third Person)>을 상영작으로 선정한 시점에도 대사관은 서울인권영화제의 계획에 없는 감독 초청 행사를 직접 지원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배급사, 제작사 그리고 대사관이 영화 한 편의 해외상영을 성사시키고자 이처럼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 한 편을 상영하지 않겠단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독해되고 힐난되는 이 상황은 해당 영화를 반드시 상영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음을 예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퀴어 인권에 대한 영화를 적극적으로 상영하는 것이 제작사나 배급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점령과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4. 이스라엘의 ‘핑크워싱’과 그 문제점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은 문화 다양성을 장려하는 민주 국가’라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퍼트리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대외정책엔 세계 각국의 대사관이 직접 동원됩니다. 성소수자와 관련된 자국 영화를 해당 나라 영화제들에 추천하면서 이스라엘이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중동의 유일한 나라라는 국가 이미지를 꾸미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핑크워싱’으로 불리는 이러한 대외 활동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점령하고 차별하는 지점들을 흐리게 합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성소수자 인권과 이스라엘의 성소수자 인권을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팔레스타인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더욱 부각시키는 행태입니다. 즉 ‘핑크워싱’은 점령국의 불법적·비인도적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이스라엘의 허울이자 프로파간다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회가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데 선진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다음의 간단한 사실로 답하겠습니다. 이스라엘 관광부는 자국 LGBTQ 커뮤니티에 지원하는 금액의 10배에 달하는 290만 달러를 ‘핑크워싱’을 위한 대외 홍보비로 지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양성을 장려하는 핑크빛 국가’라는 이미지가 이스라엘에 얼마나 중요하고 또 절박한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LGBTQ 커뮤니티에서도 자국 정부가 자신들의 존재를 점령과 인종차별에 이용하는 현실을 꿰뚫어 보고 ‘핑크워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참고기사: http://972mag.com/did-the-israeli-government-just-admit-to-pinkwashing/119691)

아울러 이스라엘 사회가 설사 팔레스타인 사회보다 성소수자와 여성의 권리를 중시하고 그와 관련해 더 좋은 영화를 배출한다고 하더라도 점령국의 위치에 있는 이스라엘은 피점령지인 팔레스타인 내부의 인권 실태를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한 비판 시도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사회와 정치 현실을 스스로 논쟁하고 바꿔나갈 수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한 현실을 재차 정당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5. 이스라엘식 ‘표현의 자유’와 그 문제점

 <제3의 성(Third Person)> 상영 취소가 ‘아파르트헤이트보다 더 심한 범죄 행위’라고 비난한 이스라엘 대사관의 당당한 발언은 BDS운동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일반적인 이스라엘 옹호 주장을 더욱 구체적으로 비판해야 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성소수자와 여성을 대상으로 최근 한국 사회에서 불거진 혐오 표현 사례들이 ‘표현의 자유’의 의미를 한층 정교화하고 재구성할 필요를 알렸듯이 말입니다.

 먼저 강조할 점은, 문화예술 분야의 BDS운동이 창작자 개인의 정체성(시민권, 인종, 젠더, 종교 등)에 근거하는 보이콧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작자 개인의 성취와 자질뿐 아니라 창작물 자체의 예술적 가치 또한 보이콧 여부를 결정하는 데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BDS운동은 단순히 몇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보이콧이 아닙니다. 창작자 개인이나 창작물 자체의 내용이 아닌 그 창작물이 생산되고 지원·지지를 받는 권력 구조에 대한 반발이며, 그것에 주목하자는 의지의 요청입니다. 아무리 허울 좋은 작품이라도, 그것의 제작과 배포가 결과적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권력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지고 그것에 공모한다면, 내용에 앞서 그 구조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대자본을 벗어난 창작 활동이 점차 어려워지는 요즘의 현실에서는 특히 어떠한 자본이 그 구조 안에 들어와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서울인권영화제가 <제3의 성(Third Person)>을 상영 취소하기 위해 제작에 들어간 지원금 출처에 주목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점령-자본 권력은 문화 창작물의 제작·배급 과정에 매우 구체적으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은 이스라엘의 국가 이미지를 세탁하는 문화 기획의 주요 실행자로서 그동안 한국의 몇몇 영화제들에 이스라엘 영화 추천 목록을 보내고 행사 진행을 위한 비용 부담까지 약속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어떨까요? 창작 및 해외행사 참여 비용을 외교부의 지원 사업으로 충당하려는 이스라엘의 예술가, 작가, 문화 노동자들은 지원금 수급과 함께 자신이 “문화예술을 통해 이스라엘의 긍정적인 이미지 창출에 기여하는 것을 포함해 이스라엘 정책상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기대 역할을 잘 인지하고 있으며 이에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부단하게 최상의 직업 서비스를 외교부에 제공할 것”을 서약하는 계약서에 서명해야 합니다.

 이상의 현실에서 BDS운동, 그리고 서울인권영화제의 <제3의 성(Third Person)> 상영 취소 결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 차별, 박탈에 비폭력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운동의 방법론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연대의 기회입니다.

 지금껏 서울인권영화제는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일절 받지 않는다는 활동 원칙을 고수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고 증진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자부심은 점령과 인종차별을 정당화·은폐하기 위해 대규모 자본과 인력을 투입하고 ‘표현의 자유’ 개념을 멋대로 가져다 쓰는 이스라엘의 행태를 좌시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입니다. <제3의 성(Third Person)> 측과 이스라엘 대사관이 수차례 접촉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인권영화제를 설득하거나 협박하지 못한 것도 서울인권영화제가 지켜온 ‘표현의 자유’를 와해시키기엔 그들이 표방하는 ‘표현의 자유’가 단지 거대한 폭력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온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6. 우리의 약속과 연대 요청

 이스라엘식 ‘표현의 자유’에 반대하며, 서울인권영화제의 이번 <제3의 성(Third Person)> 보이콧을 시작으로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BDS운동 요청에 응답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다음을 약속합니다.

 

▲ 우리는 이스라엘 정부가 영화제·문화제에 대한 지원과 개입을 통해 이스라엘의 국가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정책에 기여하지 않겠습니다.

▲ 우리는 영화 자체의 내용과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공공기관으로부터 자금지원 또는 추천을 받은 영화를 상영하지 않겠습니다.

▲ 우리는 이스라엘 공공기관 또는 이스라엘에 공모하는 기관의 후원을 받지 않겠습니다.

▲ 우리는 국제법에 명시된 피점령국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균형과 동가라는 잘못된 전제에 근거해 이 둘이 ‘분쟁’에 똑같은 책임을 지닌다고 가정하는 모든 문화예술 활동, 프로젝트, 행사, 생산물을 거부하겠습니다.

▲ 우리는 한국 사회에 BDS운동의 가치를 알리고 연대를 확장하는 데 함께하겠습니다.

 

 위의 약속은 우리가 호응한 팔레스타인인들의 BDS운동 선언이 이스라엘에 촉구한 다음의 내용이 실현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모든 아랍 땅에 대한 점령과 식민화를 끝내고 ‘분리장벽’을 해체할 것

▲ 이스라엘 시민권자인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본권을 존중할 것

▲ UN 결의안 194에 따라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과 재산권을 존중·보호·촉진할 것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국의 영화제들이 서울인권영화제가 처음 <제3의 성(Third Person)> 섭외를 시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영화 자체가 담고 있는 이야기만을 가지고 상영 결정을 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울인권영화제의 이번 상영 취소가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영화를 상영하는 행위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함께 논의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또한 영화를 선택하는 행위가 그 영화가 만들어진 구조를 승인하고, 또 그 영화의 제작자 및 제작공간의 프로파간다를 널리 배포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는 한국과 해외의 모든 영화제들에 팔레스타인 시민사회가 요청한 BDS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문화예술계에 이스라엘의 점령과 인종차별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들이 자라나는 것을 함께 막아낼 수 있기를 요청합니다.

 

 

2016년 7월 26일

서울인권영화제, 강릉인권영화제, 강정국제평화영화제, 광주인권영화제, 인천인권영화제, 전주인권영화제, 정동진독립영화제, 창작집단3355, 한국퀴어영화제, FiSahara, 국제민주연대, 노동당 성정치위원회,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운동사랑방, 전북인권교육센터, 진보네트워크센터,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20소식

인권해설: 4월 9일

인권해설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인혁당 사건’을 발표한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배후 조종했다는 ‘인혁당’. 그러나 당시 사건을 담당하던 검사(이용훈, 김병리, 장원찬)들은 어떠한 증거물도 없다는 이유로 공소를 기각한다. 언론에서 터져 나온 고문 조작 사실들, 일각에선 중앙정보부 해체론까지 나오게 했던 1964년의 ‘인혁당 사건’은 애초의 연루자 47명 중 13명에 대해서만 유죄가 선고됐고, 도예종에 대한 3년형을 최고로 일단락됐다.

다시 10년 뒤….. 인혁당 사건은 1974년 ‘인혁당 재건위’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유신반대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에 학생들은 전국적인 학생데모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 시도들은 박정희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놓은 유신헌법의 수호 무기인 긴급조치에 의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바로 ‘민청학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와 일본 공산당계가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다.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은 ‘민청학련’과 함께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이 가운데 8명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정은성/천주교 인권위원회>

11인권해설

인권해설: 바람과 함께 오고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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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장애인을‘무능력(disable)자’가 아닌 ‘다른 능력(different able)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장애인을 무능력자로 보는 시각은 이들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또는 크고 작은 시설에 수용된 채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어떤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조건은 역으로 이들이 그들 삶의 주인으로 설 수 없게 만들었다. 장애인 스스로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이들의 삶을 변두리 인생으로 내몰았다.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여기며 사회로부터 배척받으며.

하지만 자신의 자존심을 스스로 지키며 장애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자립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희망의 씨앗을 본다. 장애인들 스스로가 서로 다른 능력을 발휘하며 조화롭게 그리고 당당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경쟁과 효율을 앞세우는 이 사회에서 하나의 대안적인 공동체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애인은 공동체 생활 속에서 스스로 가치 있다는 것과 자기도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삶의 주인으로 성장해간다.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교육과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함으로서 지역사회에서 자연스런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이 사회에서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삶은 그들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다른 능력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시설비리와 수용시설 내 인권침해가 언론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우리에게 장애인 자립공동체가 스스로를 꾸려가는 방식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최은아/인권운동사랑방 자료실>

14인권해설

인권해설: 사라 바트만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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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경 사라 바트만의 ‘이상한 쇼 freak show’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상한 쇼’는 1400년경 프랑스왕실에서부터 기원한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다른 것’은 반드시 왕실로 가져와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동물은 물론 사람도 그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왕실의 이러한 취미는 대중들에게 전달되어 ‘이상한 쇼’로 발전(?)한다. 사라가 처음 전시되었던 런던 윌슨스뮤지컬 근처에는 이미 이 쇼가 번성하던 곳. 이곳에서는 신체부위가 크거나 작은, 그리고 불구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밥법이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형의 동물들에게 여자 옷을 입혀 전시하고 돈을 벌기도 했다. 현재 이 곳에서는 포르노쇼 극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 코이코이 부족이었던 사라에게 붙여진 애칭은 ‘호텐토트(열등 인종) 비너스’. 영국의 식민지 침략으로 당시 많은 서구인들이 인류학자, 여행가의 이름으로 빈번히 남아프리카를 왕래했다. 이들은 유목민이었던 코이코이 부족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우수한 원숭이’쯤으로 생각하고 이들의 생식기관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신체의 특정부위를 과장되게 묘사해 서구에 퍼뜨림으로써 사람들에게 성적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했다. 엄청나게 큰 가슴과 툭 튀어나온 엉덩이를 코이코이 부족의 특징으로 묘사한 그림은 그것을 말해준다. 사라의 나체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둔 것은 이 때쯤. 실제로 사라의 신체가 서구인들에 비해 기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관련 사가들의 증언이다.

한편 영국 재판부는 사라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사라는 돌아가서 ‘노예’가 되거나 질병에 대한 ‘면역 상실’로 죽게될 것을 두려워해 그것을 거부했다. 사라는 사리를 분간할 줄 아는 영리한 여자였다.

<김정아/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영화제>

13인권해설

인권해설: 바그다드의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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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동안 최소한 수십만 이상의 어린이가 굶어죽거나 병들어죽었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가 낳은 참상이다. UN 식량농업기구(FAO)의 95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56만 명의 이라크 어린이가 사망했으며, 국제보건기구(WHO)도 이라크에서 6분마다 1명꼴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라크 당국이 밝힌 지난 10년간의 아사자는 무려 135만 명에 이른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파괴용 무기의 전면 폐기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한 ‘봉쇄’를 풀지 않겠다고 하지만, 문제는 경제봉쇄의 최대 피해자가 힘없고 가난한 이라크 민중들이라는 데 있다. 이미 걸프전 과정에서 주요 산업시설과 사회기간시설들이 초토화되고 상하수도, 전기, 병원, 교통 등 사회기반이 거의 붕괴된 상황에서, 이라크 민중에게 식량과 의약품마저 부족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경제봉쇄’조처였다. 따라서 이라크 경제봉쇄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고조되고 있으며,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이 경제봉쇄조치의 해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의 축출에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국은 무고한 어린이와 민중들을 상대로 한 ‘대량살상극’을 멈추

지 않고 있다.

미국에 의해 ‘경제봉쇄’를 당하고 있는 나라 가운데는 북한도 있다. 미국의 비위를 거스른 죄로 북한의 ‘민중’들 역시 궁핍과 고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위해 지금 전 세계 수천만의 민중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이창조/<인권하루소식>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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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마리아나의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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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서는 1980년대 초, 중반에 대체로 군사정권에서 민간정부로의 이양이 완료되었다. 1970년대에서 80년대 초까지 폭압적인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자행된 실종과 테러 등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는 흔히 ‘더러운 전쟁’으로 불린다. 특히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더러운 전쟁의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아르헨티나의 20세기는 독재의 시기였다. 세기초부터 군사쿠데타가 여섯 차례나 일어날 정도였으며, 그때마다 등장한 군사정권들은 정권안보를 이유로 국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시기는 보통 1976년부터 1983년까지의 마지막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해당하는데, 이때 실종자만 3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어두웠던 이 시기에, 군부정권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뱃속의 태아까지 살해했으며 또한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강간, 고문, 폭행을 자행했다. 이후에 일부 밝혀진 것처럼 집단 암매장과 바다에 수장하는 등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83년 알폰신 민간정부는 군사정권 지도자들이 자신들에 대해 발령했던 사면조치를 무효화시키고, 1984-5년의 더러운 전쟁에 대한 광범한 증거들을 수집하는 데 성공하여 과거청산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곧 이어 알폰신 정부는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1987년 ‘직무준수법’을 만들어 군인들을 면책시켰으며, 대법원도 이를 인정하였다. 이후 메넴 정부에서도 주요 범죄자들의 사면이 속속 진행되면서 ‘더러운 전쟁’ 기간 중에 저질러진 범죄의 진상도 완전히 밝혀질 수 없었으며, 가해자들의 처벌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정부들에 맞서 실종자들의 가족으로 구성된 ‘오월광장 어머니회’는 1977년부터 매주 목요일 대통령궁이 마주 보이는 오월광장에서 ‘정의와 진실’을 위해 침묵의 원을 돌면서 아르헨티나 양심에 경종을 울려왔으며, 그들은 지금도 오월광장에서 침묵의 원을 돌고 있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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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베트남 : 마지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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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물러난 뒤 인도차이나반도에 민족자주적인 정권이 들어서자 그 연쇄파급효과를 두려워한 미국은 남베트남의 고딘디엠 정권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베트남에 끼어들게 된다. 그러나 부패와 폭정으로 이미 베트남 민중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고 있던 고딘디엠 정권은 오히려 공산주의계열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의 전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게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결국 더 이상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고딘디엠이 미국의 묵인하에 사살됨으로서 그의 10년 독재정치는 마감된다. 그러나 이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면서 미국은 베트남에 대해 직접적 개입이라는 강수를 두게 된다. 1965년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미국은 25개국에 참전을 요청하였으나 너무나 명분이 부족한 전쟁이었기에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대만, 필리핀, 타이, 영국, 한국등 단 7개국으로부터만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나마 전투병력을 파견한 나라는 한국뿐이었으며 당시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박정희정권은 개발독재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 받는 조건으로 미국의 참전요청을 받아들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32만명이라는 젊음을 죽음의 계곡으로 내던지게 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은 1965년부터 68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미국의 요청으로 참전했던 한국군은 왜 그처럼 민간인학살을 저질렀는가? 여기엔 크게 두가지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 첫째, 한국전쟁은 병사들에게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되는, 아니 반드시 죽여야만 되는 존재라는 극단의 반공이념을 각인시켰고, 이 병사들에게 베트남의 모든 인민들은 베트콩이거나 잠재적인 베트콩의 협조자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둘째, 미군이 주로 대량폭격을 이용한 주요거점 작전에 투입되었다면 한국군은 베트콩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많은 수색작전에 주로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이 베트남전에서 단지 우방 미국을 도우러 갔던 한국군을 가장 잔인한 군대로 기억하게 만든 것 아닐까. 그리고 미국은 이 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 아닐까.

베트남정부와 한국정부가 조사한 공식 집계에 의하면 약 5,000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1975년 ‘미국친우봉사회’가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베트남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총 5개 성에서 80여 건의 피해가 발생하였는데 희생된 민간인 숫자만 해도 약 9,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김숙경/국제민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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