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노트: 월성

프로그램 노트

월성 주민들이 이주를 요구하는 이유는 월성이 싫어서가 아니다. 월성을사랑하지만 월성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월성원전에서 3.5km 거리에 사는 오순자는 암으로 죽은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월성원전에서 1km거리에 사는 황분희는 손주의 몸에서 성인 평균의 3배에 달하는 삼중수소가 검출되었다며 울먹인다. 월성에서 짧게는 30년, 길게는 70년이상을 산 사람들이 모두 말한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고.

한국수력원자력공사와 국가는 이 긴 세월을 무시하고 숫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든다. 발전소로부터 914m까지만 방사능의 영향권이기에 그 밖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주시켜줄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아픈 몸과 일상을 집어삼킨 불안 같은 이야기는 한수원의 셈과 법원의 판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월성은 핵발전소 부지이기 전에 누군가 일상을 가꾸고 추억을 회상하고,미래를 그리는 삶의 터전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담고 있기에 삶의 공간은 삶만큼이나 무겁고 귀하다. 몸에서 나오는 삼중수소의 기준치, 선고되는 배상금, 핵발전소를 멈췄을 때의 손실액… 이런 숫자들은 ‘안전한 삶’에 앞설 수 없다. ‘산다는 것’의 무게는 ‘손익’의 숫자와 함께 저울에 올라갈 수 없다.

밤낮 없이 서울을 밝히는 불빛은 어디서 온 전기일까.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은 그곳에만 머물지 않고 흘러가서 서로의 공간을 채운다. 월성에서 300km 떨어진 곳에서 쓰는 에너지가 누군가의 삶의 공간을 무너뜨리면서 만들어진 에너지라면, 안전한 삶의 공간과 안전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은 연결되어 있다. 안전한 에너지와 안전한 삶의 공간을 위한 무게를 지는 것은 월성주민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안전한 삶의 터전을 위한 우리의 연대는 거리를 뛰어넘을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7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미래의 집

프로그램 노트

TV에서는 40만 개의 주택이 올라간다는 인공섬 란타우섬의 광고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누구도 40만 개의 주택 중에 ‘내 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의 집>에서 “집다운 집”에 살아본 적 없다는 이들에게 홍콩은 독립을 쟁취해야 하는 터전이기 전에, 월세 60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없어 콘크리트 숲을 헤매야 하는 땅이기도 하다. 노인으로서, 퀴어로서, 여성으로서, 이주민으로서의 삶을 경험하는 공간이기도 하면서, 빈곤을 마주해야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홍콩 아파트의 중위가격은 세계 1위다. 높은 빌딩만큼 거대한 자본이 장벽으로 서 있다. 평균적인 연봉을 받는 홍콩의 직장인은 20.9년 동안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간신히 살 곳을 마련할 수 있다. 세탁기를 놓을 수 있는 집의 가격은 그렇지 않은 집에 비해 다섯 배, 화장실이 있는 집의 가격은 화장실이 없는 집에 비해 열 배 높다. 이런 사회에서 빈부의 격차는 ‘부동산 대란’이라는 다섯 글자로는 담을 수 없다. 주거의 높은 벽은 관계를 쌓고 미래를 상상하는 일을 차단한다. 이러한 삶의 격차는 마침내 이들의 삶을 잠식한다.

그러므로 홍콩의 투쟁은 집이 없는, 집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의 투쟁이기도 하다. 홍콩의 거리를 채우고 경찰의 폭력에 맞서는 민중은 홍콩의 독립을 외치면서 “진정한 평등”을 느낀다. 차별에 맞서, 자본에 맞서 자유와 평화를 찾아오는 주체가 된다. 이 시대가 말하는 혁명이란 거대한 국가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무엇인가가 “없는” 사람으로 존재한 경험이 있다. 그런 우리가 독재로부터, 권력으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서 서로를 마주해야 한다고, 이 시대의 혁명은 외치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5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동지들

프로그램 노트

“홍콩은 한 개의 국가, 두 개의 제도라는 길을 향해 전진한다.” 하지만 현재 홍콩은 체제 내의 어떠한 오류도 지적할 수 없는 독재 권력의 땅이 되어가고 있으며 홍콩을 사랑하는 민주화 인사들은 홍콩을 떠나 타국으로 망명하고 있다. 홍콩 도심의 거리는 연기와 방독면, 고함으로 가득 찼고 평범한 출퇴근 길의 지하철역은 피신의 공간이 되었다. 무엇이 홍콩인들의 일상을 앗아갔는가?
과거, 중국 공산당 정부는 영국 정부와 홍콩반환협정을 맺으며 홍콩이 중국령이 되는 1997년부터 2047년까지 50년간 일국양제, 즉 중국과 홍콩에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그 이후 일국양제의 약속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2019년에 ‘홍콩 범죄인 인도 법안’이 발의되었고 2020년에 결국 홍콩국가보안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안으로 누군가가 홍콩 내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하거나 공산당을 비판하면 범죄인으로 규정되어 처벌 대상이 된다. 또한 처벌의 범위는 개인을 넘어 집단의 행동까지로 넓어졌다. 이러한 홍콩 국가보안법은 홍콩의 입법회를 거치지 않고 중국 공산당의 전국인민 대표 회의에서 처리된다. 홍콩 국가보안법 하에서 홍콩의 민주주의는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 ‘동지’는 자유를 되찾기 위한 홍콩인들의 지난한 투쟁을 기록하고있다. 홍콩은 현재 경찰들의 무력에 구호와 노래로 대항하고, 총과 최루탄을 물병과 우산으로 막아내고 있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그들이 지고중국에 속한다고 해도 그들이 가만히 누워만 있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가, 그리고 우리가 알 것이다. 홍콩인들은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동지’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투쟁에 함께할 ‘동지’들을 부르고있다. 독재 권력에 대항하고 있는 홍콩과 연대하는 우리도 당신들의 ‘동지들’이며 홍콩이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우리가 함께할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6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검은 자형화

프로그램 노트

홍콩인에게는 이제 두 가지 선택지만이 있다. 홍콩에 남아서 그들의 자유와 정체성을 빼앗기거나 홍콩을 떠나는 것이다. 현재 중국 공산당 정부는 홍콩 땅에서 자신들의 ‘중국몽’을 실현하고자 한다. 중국 정부는 선거, 입법, 경제할 것 없이 모든 방면에서 홍콩의 정체성을 빼앗아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항하는 자는 홍콩을 떠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도 홍
콩인들을 홍콩에서 밀어낼 수 없으며, 홍콩인들의 자유와 정체성은 홍콩의 땅 위에서 지켜질 수 있어야 한다.
홍콩은 동남아시아, 중동, 영국, 미국, 일본, 홍콩 등 다양한 전통이 융합된 다문화 사회이다. 다양한 민족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홍콩에 정착하여 홍콩의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왔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홍콩에 중국이민자들을 이주시키고 광둥어 대신 보통화 주입을 시도하는 등 홍콩을 ‘하나의 중국’으로 포섭하고자 한다. 홍콩인들은 그것에 맞서서 자신들의 언어, 문화, 전통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야시장에서 지역 축제를 개최하고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무력으로 진압하는 경찰들에게 저항한다.
홍콩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역사적 의식과 지역주의에서 발현하며, 이로써 홍콩은 존재한다. 지금 이를 지켜내지 않는다면 홍콩은 사라진다는 것을 홍콩 시민들은 알고 있다. 다른 무엇이 이들을 홍콩인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이들은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이기에, 자신들의 홍콩을 지키기 위해 분노할 수밖에 없다. 홍콩 시민들의 투쟁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홍콩을 상징하는 자형화는 홍콩의 민주주의가 지워짐에 따라 어둠 속에서 시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의 쟁취 속에서 자형화는 다시금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4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게임의 규칙

인권해설

성별 구분 없는 공정을 생각해보다

 

요즘 공정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되고 있다. 치열한 경쟁 사회이다 보니 ‘모두가 승리할 가능성을 공평하게 갖는 공정한 룰’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람이 많다.. <게임의 규칙>은 어떤 면에서 보면 공정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기존의 공정을 흔드는 질문을 한다. 공평한 기회를 가져야 하는 ‘모두’에 포함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9.58초 vs. 10.49초, 484kg vs. 384kg, 2.45m vs. 2.09m”

이 숫자는 육상 100미터 세계 기록, 역도 종합(인상과 용상의 합계) 세계 기록, 높이뛰기 세계 기록에서의 남자부와 여자부의 기록 차이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차이는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말해왔다. 태생적인 남녀 간의 차이는 어쩔 수 없으며 스포츠에서 성별을 구분하여 경쟁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것을 상식으로, 명백한 과학적 사실로, 그리고 공정함으로 말해왔다. 세부적으로는 남녀의 근육량과 근력, 호르몬의 차이나 체구와 골격의 차이를 분석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스포츠 영역에서 성별 구분은 변할 수 없는, 변해서는 안 될 공정한 룰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호르몬의 영향은 기록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축적되고 있고, 기록된 숫자들 간 차이는 절대 불변이 아니라 느리고 점진적이지만 점점 간격이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던 룰이 과연 공정한지 되묻게 한다. 영화 속 맥, 새라, 안드레아의 이야기는 기존의 룰이 가졌던 모순을 확연히 드러낸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엄격한 성별구분이 공정함을 담보하는가?’라는 질문은 현대 스포츠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스포츠 분야에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선수는 계속 존재해왔다. 1970년대 트랜스여성 테니스 선수 르네 리차드는 여자 테니스 협회(WTA)의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US오픈 대회에 출전했다. 종합격투기 선수 펠런 폭스는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첫 번째 트랜스여성 선수로서 여성부에서 5승 1패의 전적을 가진 바 있다. 페트리시오 마누엘은 미국의 여성부 아마추어 권투 챔피언이었다가 2018년 남성부로 옮겨 프로로 데뷔한 권투선수였다. 트랜스남성인 크리스 모이저는 2009년부터 여성 선수로서 철인 3종 경기에 참가하다가 2010년 법적/의료적 성별정정을 한 후 전미 철인 3종 경기 남자부에서 1시간 2분 45초의 기록을 세우며 국가대표의 자격을 획득했다. 역사상 최초로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 미국 육상 국가대표가 된 것이다. 베로니카 아이비는 배드민턴에서 사이클로 종목을 변경한 후 2019년 200미터 스프린트 사이클의 연령별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유명한 인터섹스 선수들도 다수 있었다. 1930년대 육상 여성부 100미터 종목에서 세계 기록을 네 차례 경신했던 스텔라 왈시, 1990년대 여성부 유도 선수로 활약하였던 브라질의 에디난시 실바,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800미터 여성부 우승자 캐스터 세메냐 등이 대표적이다. (당연히 언급된 이들이 엘리트 체육에 출전했던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선수의 전부는 절대 아니다.)

201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트랜스젠더 선수의 출전 자격에 대한 규정을 개정하였다. 새 규정에 따라 트랜스젠더 선수 역시 자신의 성별에 따라 올림픽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속 안드레아와 테리가 뛰고 있는 코네티컷주와 유사한 규정이 올림픽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테스토스테론이 공정함을 해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IOC가 규정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변화는 1967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염색체 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선수들을 탈의시키고 육안으로 성별 검사를 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IOC의 규정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트랜스남성은 제약 없이 남자부에 출전할 수 있지만, 여자부에 참가하려는 트랜스여성의 경우에는 지난 4년 간 여성으로 살아왔어야 하고  참가 직전 12개월 동안과 경기 기간 동안의 혈청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10nmol/L 이하여야만 한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존재해왔던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 선수의 역사를 살펴본 이유는 맥, 새라, 안드레아와 테리의 사례가 결코 새로운 것도, 특이한 것도 아니고 근대 스포츠가 시작된 이래로 늘 논쟁적이었으며 스포츠 내 성별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관객들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1) 경쟁을 하는 스포츠에서 성별의 구분은 공정함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맞는가?

2) 운동 능력에 있어, 여성의 신체는 남성의 신체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하는 게 정당한가?

3) 스포츠는 반드시 경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여야만 가치 있는 것인가?

만약 이 영화를 본 당신이 이 세 가지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였다면, 우리는 성별 구분이 아예 없는 스포츠를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제 스포츠 종목 중 성별 구분이 없는 승마, 요트 등 일부 하위 종목, 패럴림픽의 보치아 종목 같은 소수의 예외 사례에서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영역 전반에 걸쳐서 말이다. 

 

준우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 단체 소개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는 트랜스젠더의 인권 향상과 젠더/다양성에 대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조각보라는 이름처럼, 트랜스젠더의 복잡다단한 삶이 얽히고 설키며, 성별정체성의 다양한 모습이 함께 어우러져 각양각색의 색들이 각자의 색깔을 갖되 또 함께 어우러지는 조각보를 한국 사회에 펼치기를 바라는 활동을 펼쳐가려 합니다.

13인권해설

인권해설: 혐오의 시대

인권해설

제니퍼라우데의 죽음은 군사주의, 젠더규범, 계급불평등 등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권력 문제와 얽혀있기에, 또 다른 죽음과 혐오폭력을 상기시키고, 그녀의 죽음을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의미화할 것인지 질문한다.

다큐의 배경은 미군주둔협정이 다시 체결된 시점으로, 일본의 오키나와, 한국의 동두천, 군산, 이태원 등과 같이 미군 대상 성매매 산업이 밀집된/되었던 오래된 미군 기지촌 필리핀 올롱가포시이다. 타 기지촌에도 역시 제니퍼라우데와 같이 미군의 각종 범죄/성범죄에 의한 여성의 피해와 죽음이 보고되지만, 미국의 불공정한 협정으로 사법정의가 제대로 작동한 사례는 드물다. 한국에서 발생한 윤금이씨 사건이나 미군장갑차 사건의 경우,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처럼 피해 여성을 가부장적인 국가의 이해관계 속에 자의적으로 동원하며 훼손된 소유물로 환원하여 죽음을 대하던 태도를 상기시킨다. 더욱이 필리핀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성매매를 금지하는 정책을 펴며 여성들을 처벌하고 낙인을 생산하는 한편, 미군과 함께 기지촌 성산업 형성/유지를 위해 성병 검진을 강제하며 빈곤한 여성들의 몸을 미군에 조달하고 관리해오는 등 인권침해를 자행한 책임이 있다.

다큐에서 필리핀 트랜스여성이자 인권활동가인 나오미는 “트랜스여성이 미용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도록 강요되고 있다. 트랜스젠더 운동은 기본적으로 몸을 팔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없애야 한다. 많은 사람이 성산업에 종사하고, 이를 생계형 성매매라고 부른다”라고 말한다. 트랜스여성이 일을 하며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적 성별과 자신의 성별이 불일치하기에 여타 사회적 자원이 충분치 않다면, 이분법적 젠더 규범이 공고한 노동시장 진입과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사회적 생존을 위해 성별정정을 택한다. 하지만 한국의 성별정정 제도는 SRS 수술을 요건으로 하기에 고비용/고위험을 개인이 오롯이 감당하게 하며 개인의 생식 기능을 제거하도록 강제하고, 트랜스젠더의 건강을 위협하고 빈곤을 추동한다. 트랜스여성‘들’의 성산업 유입은 이른바 ‘게토’로 몰리는 효과, 즉 갖가지 차별과 성별정정 제도 요건이 강제한, 사회적 자원에서 소외된 여성 빈곤의 결과인 한편, 트랜스여성들에게는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판매자에 대한 법적 처벌, 사회적 처벌이라는 낙인, 성산업 내부의 착취와 위계 구조는 성판매자의 기본적인 권리행사를 제약한다. 소위 성매매 ‘2차’과정은 접촉이 쉬운 특성으로 각종 혐오폭력과 범죄피해로 노출되는 위험에 대응하기 어렵게 한다. 게다가 성판매 트랜스여성의 경우, 수사기관을 이용하려면 법적 성별이 드러나 이차적인 부담과 혐오에 노출될 위험을 가진다. 성 구매자의 가해, 성산업 내부 환경적 위험, 낙인, 성산업 내부 착취구조로 인해 내몰리고 사라진 국내외의 수많은 여성들과 트랜스여성들이 존재하며, 작년부터 1인 방송을 하는 트랜스여성들을 타깃으로 성판매 경험을 강제로 폭로하며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는 혐오폭력이 반복되는 실정이다. 이에 맞서 트랜스여성이 경험하는 빈곤의 대안이자 특정하게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여성들이 성산업에 위치 지워지는 동학을 비롯, 성산업을 경유하는 트랜스여성들의 경험을 더욱 적극적으로 경청하며 여성들의 권리와 인권에 대한 사유와 담론을 만들어 나아갈 필요가 절실하다.

성산업을 비롯하여 다양한 공간에 트랜스젠더는 늘 함께 존재해왔다. 하지만 트랜스당사자의 법정 성별과 자신의 성별이 불일치한 상황이 타인에게 드러났을 때, 또 다른 폭력, 배제, 차별, 혐오, 괴롭힘 등이 이어진다. 군대, 여자대학교, 화장실, 폭력피해 쉼터, 감옥 등 여타 다양한 사회적 공간의 트랜스젠더 여성의 존재와 출입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한국에서 대두되고 있다. 마치 다큐에서 펨버튼이 제니퍼가 자신의 이성애 남성성을 침범했다며, 그녀를 괴물/남성으로 간주하고 동성애 혐오와 살해를 정당화하는 피해유발론과 닮아 있다. 트랜스여성에 대한 가해나 축출이 정당하다는 언사는 다양한 젠더실천과 성별 정체성을 성기 중심으로 환원하고 판단하고 재단하고자 하는 이분법적 젠더 규범이라는 신념에 기반한 폭력으로, 역사성을 가진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트랜스젠더의 몸들을 추방하고 삭제하거나 성기 중심적 법적 성별 규범에 순응하라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오히려 변환되고 전환되어야 할 것은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선재하고 현존하는 구체적 개인인 트랜스젠더 개인의 삶의 맥락을 부정하며, 임의적인 성별 범주인 젠더이분법에 기반한 혐오 폭력을 정당화하고 모든 책임을 트랜스젠더의 몸과 성별 정체성에 던지고자 하는 모든 의도들이다. 개인을 이분법적인 몸에 가두는 시도들에 단호히 맞서고 빈곤과 낙인, 폭력으로 성판매 여성들을 비롯, 트랜스여성의 삶이 단절되거나 사라지는 모든 시도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서사가 있는 개개인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는 실천을 이어가야 한다. 이것이 제니퍼라우데의 죽음을 기억하고 연대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반성매매인권행동이룸 차차

14인권해설

인권해설: 우리가 여기 있다

인권해설

 2005년 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교도소에 입소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는 여성으로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법적 성별은 아직 남성이었기에, 남성 수용동에 수용되었다. 입소 초기에는 다행히 밖에서 사용하던 여성 속옷 등을 가져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 측에서는 점차 다른 수용자의 고통을 고려해야 한다며 속옷 사용 등을 불허했다. 나아가 교도관들은 그녀의 정체성을 부정하며 모멸적인 말을 하고 면담 내용을 누설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은 그녀는 결국 자살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출소 후 그녀는 인권단체들과 함께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고, 2011년 서울지방법원은 담당 교도관들의 감시, 감독 미흡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 3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해당 사건과 관련된 논의들은 링크자료집 참조).

트랜스젠더는 어디에든 있다. 그 말은 구금시설에서 수용 중인 사람들 중에도 마찬가지로 있다는 것이다. 2013년 9월 확인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 전국에 7명의 트랜스젠더 수용자가 있었다. 그러나 구금시설 내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지속적인 인권침해와 차별을 마주한다. 자유형이라는 이름 하에 기본적인 자유를 제한하는 그곳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살아갈 자유 역시 박탈한다. 기본적으로 남과 여, 두 가지 성별로 구분된 수용시설 앞에서 트랜스젠더는 성별정체성이 아닌 법적 성별에 따라 수용된다. 자신이 트랜스젠더임을 알린 경우 지침에 따라 독거 수용될 수 있으나, 이는 여자(남자)교도소 내 유일한 남성(여성) 독거 수용자가 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맞는 처우, 의료적 조치들을 받는 것은 더욱더 지난한 일이 된다. 2014년에는 교도소에서 긴 머리를 자를 것을 거부한 트랜스젠더 여성수용자가 징벌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관련법은 위생을 위해 두발을 단정하게 할 것만을 요구할 뿐 길이를 제한하지 않는다며 위 징벌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2017년에는 구치소에 수용된 트랜스젠더 남성 수용자가 호르몬 요법을 거부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소 측의 의료적 조치 거부를 차별로 판단하고 관련 지침 마련 등 개선을 권고했다(자세한 내용은 링크자료집 참조). 

이렇게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구금시설 내 트랜스젠더 인권 문제에 대해 국가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가령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제5조는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고, 2018년 제정된 「수용업무 및 계호업무 등에 관한 지침」은 성소수자 수용자를 성적 정체성에 적합하게 대우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위 국가인권위원회 결정 후에는 「성소수 수용자 수용처우 및 관리 방안」이라는 구체적인 지침을 만들어 전국 교도소에 배포하기도 했다. 문제는 지침이 단지 서류상의 문장만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교도관들에 대한 교육을 비롯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에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들은 인권침해 사례들 역시 관련 지침이 존재함에도 발생한 일이었고, 법무부가 세부방안을 마련한 지금에도 여전히 유사한 사건들은 발생하고 있다. 트랜스젠더가 수용시설에서 그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 그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은 여전히 박탈당하고 있다. 

“죄를 지었지만 사람입니다. 교정시설이라고 해서 인권이 침해될 수는 없습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이야기한 사건 당사자는 위와 같이 이야기했다. 죄의 대가로 형벌이 부과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존재’ 그 자체를 처벌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됨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국가와 사회에 묻고 싶다. 언제쯤 교정시설 내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할 것인가.

 

박한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15인권해설

인권해설: 뚜렛히어로: 나의 입과 나

인권해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인의 존재는 동정과 시혜,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 존재로 호명되곤 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장애여성예술인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건 어떤 경험일까. <뚜렛 히어로: 나의 입과 나>는 장애와 젠더가 교차된 장애여성이 경험한 사회적 차별에 대해 말한다. 주인공 제스는 뚜렛히어로 활동을 통해 소수자의 경험이 존중되는 예술을 한다. 장애를 비극적으로 묘사하거나 특정한 기준을 강요하는 사회에 특유의 유쾌함으로 저항하고 거부한다. 기존에 쉽게 상상되는 장애여성예술인의 이미지를 벗어나 사회가 어떻게 장애를 경험하게 하는지, 왜 장애인의 경험이 여성, 이주민 등 다른 소수자가 경험하는 분리와 배제와 연결되며 그렇기에 우리가 왜 연대해야 하는지를 동료들과 함께 찾아간다.

 장애인의 ‘몸’은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당사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타인에 의해 규정되었던 경험이 많다. 장애인은 그들이 경험하는 삶의 조건, 사회적 위치, 일상적 경험들이 배제된, 분절적인 정체성으로 여겨지며 특정한 기준에 따라 살아가길 강요받는다. 그래서 내 존재를 증명하거나 ‘착한 장애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실패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나의 존재를 부정당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장애인’으로 퉁 쳐지는 경험은 다양한 소수자의 경험과 교차되었다. 일상에서 보호받고 통제 당하며, 어린아이처럼 대해지는 경험은 청소년의 문제와 연결되어있다. 이런 사회에서  ‘장애’는 불쌍한 존재로 소비되며, 장애 극복을 신화화하는 소재로 그려져 왔다. 장애인에게 ‘예술’은 취약계층이 향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용자적 권리’로서만 한정되곤 한다. 우리는 장애예술인을 비장애예술인과 동등한 창작자로서 대우하며 그들 작품 속 언어와 형상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며 상상해야 한다.  

 장애인배우가 공연을 하면 관객들은 “장애를 가진 몸으로 무대에 서다니 대단해요, 감동 받았어요.”라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비정상’이라고 규정된 (휘고, 뻗치고, 가느다란) 장애여성의 몸은 무대 위에 당당히 오를 수 있는 주체로 상상될수 있을까. 이는 내가 주도권을 갖고 비장애인 동료와 공적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된다. 장애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존중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치열한 소통과 조율이 필요하다.. 일상과 활동이 분리되지 않고 삶 전반에서 이러한 소통과 조율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료와 친밀함만이 아닌 어떤 긴장을 갖고 다양한 방식, 대안들을 만들어갈지 고민과 갈등이 반복되는 일이다. 

 우리에겐 문화예술운동이 필요하다. ‘장애’를 연기한다는 건 손상된 상태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 뿐만이 아니다. 내 몸을 통해 소수자의 삶을 해석하고 체현 할 때 그 의미가 확장된다. 나는 나의 장애극복 서사를 통해 희망적  주인공이 되거나 피해자의 위치에서 차별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을 경계한다. 소수자들의 경험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일상 속 차별의 경험이  극의 주요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발달장애 여성배우가 대사를 외우기 위해서 수없이 쓰는 것을 반복하고, 자신에게  맞는 대사를 찾아 바꾸며 공연을 준비하는 등, 새로운 시도들이 필요하다. 발장장애 여성배우로서 공연을 위해 대사를 외우고,  훈련하는 것은 주류의 예술에서 말하는 전문성, 정상성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나는 무대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발화하고, 서로의 삶에 개입하며 지지하는 방식을 통해 계속해서 연대할 수 있는 동료들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참고 문헌_이진희(2019), 『장애여성 문화예술 활동의 정치성』, 인권연구

 

진성선(장애여성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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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유어 턴

인권해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저항은 어떻게 비춰지는가. 청소년들이 사회 문제에 참여하며 함께 목소리를 낼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청소년들의 사회참여와 정치활동은 쉽게 칭찬할 일이 되거나 자주 의심받는다. “너무 기특하다”, “어른들이 미안하다” 등. 이러한 반응은 청소년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이 되기도 한다. 주로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 학교 안팎에서 청소년의 사회적 지위를 바꾸려는 도전할 때, “배후세력이 누구냐”, “선동당한 거 아니냐”와 같은 말들이 돌아온다. 청소년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활동은 ‘특별한 일’이라는 시선, 청소년의 시위와 저항은 그들의 ‘본분’에서 벗어난 일이라는 편견을 바탕으로 나오는 말들이다. 

 한국의 대다수 중고등학교에서는 지금까지도 ‘정치활동’, ‘동맹휴학’ 등을 징계 대상으로 명시하는 규칙을 갖고 있다. 단순 ‘무단결석’도 징계 사유가 된다. 학교의 운영 과정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없으며 의견을 내기 위해 대자보를 붙이려면 학교장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선거 연령은 만 18세로 낮춰졌지만, 여전히 청소년이 선거 기간에 선거운동을 하고 특정 후보를 지지하려면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청소년의 사회참여, 정치활동은 학생답지 않은 ‘일탈’로 여겨진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칠 때는 ‘기특한 존재’가 되지만 청소년이 정치활동을 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참여권을 실천하려 할 때는 ‘처벌 대상’이 되는 셈이다. 이는 청소년의 어떤 행동을 두고 그 행동에 담긴 ‘내용’에 주목하기보다는 ‘청소년이 나섰다’는 식으로 주체에 관심이 쏠리는 현상과도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청소년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기후를 위한 결석시위(‘School Strike for Climate)’가 한국에서도 열리고 있다. ‘청소년기후행동’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에 정부가 책임 있게 응답하라며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처벌 위험 때문에 청소년들은 학교를 결석하거나 수업을 거부하는 등의 단체 행동에 쉽게 나설 수가 없다. ‘결석 시위’에 참여한 청소년활동가들은 많은 시위 참여자들이 징계를 감당하거나 교사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다고 말한다. 

 청소년들의 시위와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접하며 ‘기성세대’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면 “대신 싸워줄게, 우리가 지켜줄게”보다는 “당신의 의견을 지지하며 나도 곁에서 함께하겠다”로 힘을 실어주는 게 어떨까. 청소년들의 어떤 주장에 대하여 “좀 과한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은연중에 ‘어른들’이 허락하는 이야기만 해야 한다는 편견은 아닌지 돌아보면 어떨까. 청소년을 함께 변화를 만들어나갈 주체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 또 하나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지금, 여기,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니까.  

 

난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12인권해설

인권해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인권해설

5년 전쯤 높은 강도의 지진이 경주 지역의 방방곡곡을 흔들었다. 이후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만약에 서울에 지진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말한다. “그냥, 죽는 거지 뭐” 지진을 포함한 각종 재난상황에 우리는 안전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그냥 죽을 수 밖에 없고, 그냥 죽지 않으려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국가재난 상황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2017년, 불과 2년 전에 포항지진을 겪었는데도 2019년 강원도 산불 상황을 보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정보를 가장 신속하고 빠르게 전달해야 하는 공영방송에서조차 수어통역이나 자막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미세먼지가 조금만 심해도 전 국민의 휴대폰 알람을 울릴 수 있는 IT 강국인데도 정보의 개발과 소통은 바람직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강원도 지역은 지역의 특성상 재난 상황에 취약하고 재난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준비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살펴야 하는가. 재난이 발생하면 대부분은 어디로 피해야 하는지도 모를 수밖에 없다. 이는 ‘불이야’하고 외치는 것부터 안 되는 셈이다. 미디어와 방송은 소방차가 1열로 고속도로를 촘촘히 달려가는 모습이나, 한 개인의 영웅 서사에 집중하는 등 시각적 전달만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볼거리를 우선시하고 장애인에게는 정보 전달조차 안 하니 장애인은 재난에 대응할 수 없다. 이는 아쉽고 미흡한 정도가 아니라 큰 사고 상황이다. 정부의 재난 대피 매뉴얼도 장애 유형별 구분만 설명하고 있다. 차일피일 미룰 게 아니라 대책과 예산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비와 예방을 하려면 그 필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장애인 등 재해 약자들을 위한 대비와 예방이 필요하다는 인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피소에 장애인 화장실과 경사로가 필요하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 나중에 실제 재난이 발생하고 난 뒤, 그때 가서 할 수도 없는 일인데 말이다. 

유엔권고안에도 재난의 예방, 계획, 대응, 복구에서 이런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나와 있지만, 예산, 계획, 교육, 매뉴얼도 없고 실행도 안 되고 있다. 중증장애인 모두에게 활동보조가 24시간 제공되는 것도 아니니 더욱더 어려운 상황이다. 혼자 사는 중중장애인은 버튼만 누르면 119가 출동하는 응급알림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중증장애인의 위치 등을 파악하고 있어야 현실적인 지원이 가능하다.

재난 상황시 장애인접근권을 보장하는 일은 국가가 준비해야 한다., 예컨대 시외버스는 주로 사기업이 운영하다 보니 프리미엄 버스 도입이 우선이었고 저상버스는 가장 늦게 도입되었다. 이처럼 효율과 자본의 논리로 예산이 배치되는 구조는 재난 상황에서도 역시 같은 모습이다. 

좋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과 낡은 임대아파트나 쪽방에 사는 사람은 같은 재난이 닥친다 해도 피해의 규모 자체가 다르다. 느닷없이 불어닥친 강풍이 지나간 후 쪽방과 주상복합 아파트 중 어디에 남겨진 상흔이 더 깊을까. 같은 피해를 겪더라도 복구되는 속도 역시 다르다.  

재난 상황에서 자본이 없는 가난하고 취약한 소수자들 더 힘들 수밖에 없는데 장애인은 상황은 대부분 이러하다. 즉 이미 사회적 안전망 밖에 있던 사람들이 재난이 벌어지면 갈 곳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현재 코로나19 방역 대책인 “집에만 있어라”라는 지침 또한 마찬가지다. 쪽방에 살거나 가구 구성원이 집의 평수에 비해 많이 모여 사는 경우에 집에만 있는 방역 대책은 효과가 있는가. 

재난은 예방, 계획, 대응, 복구가 중요하다. 재난이 일어나면 먼저 대피할 거처가 필요하고 그 거처는 휠체어로 접근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갈 곳이 없어 떠밀려간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곳이 된다. 경사로와 장애인 화장실이 있어야 하고 중증장애인의 경우 에어매트가 있어야 하는데 보통 대피소로 지정되는 체육관에는 이런 것들이 없다.  

결국 자선과 봉사에 의존할 게 아니라, 국가가 예산을 마련해서 준비하고 교육하고, 훈련해야 한다. 지역과의 연계가 중요한데, 장애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소방서 등은 사전 인지가 필요하다. 노들야학은 재난 대비 기물들을 자체 예산으로 마련하고 있는데, 사실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유럽은 장애인용 대피의자, 휠체어를 타고 내려갈 수 있는 완강기 등이 건물내의 구조에 맞게 되어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식당과 가게에 경사로를 만들자는 운동조차 인테리어에 맞지 않는다거나 손님이 미끄러진다는 이유 등으로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다. 재난 대비는 아직도 먼 이야기다. 현실이 이러하니 실제로 재난 상황이 닥쳤을 때 장애인 접근권에 대한 질문은 꺼내기도 힘들다. 

우리는 10년 전, 5년 전의 재난 상황에서 던졌던 질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이제는 국가가  책임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한명희 (노들장애인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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