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편지] 농담과 옥상

소식

 

 농담이 없는 삶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농담이 없는 세계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잘 짜인 농담을 읽으면 마음이 벅찰 정도로 좋습니다. 웃음기 없는 농담도 좋아합니다. 웃음을 터트리지 않아도 마음이 녹는 그런 농담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농담은 말할 것도 없이 행복합니다. 낯선 사람과 나누는 농담은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물론, 무례하지 않은 농담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농담은 잘 짜인, 무례하지 않은,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농담입니다. 무해한 농담을 많이 해봅시다. 농담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를 뒤집어 보아요. 동시에 농담은 가장 어려운 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잘 구사하는 사람을 보면 단순히 웃긴 것을 넘어서 경이로움까지 듭니다. 

 농담을 알아들으려면 어느 정도의 맥락이 있어야 합니다. 맥락을 오래 쌓아온 사람일수록 할 수 있는 농담이 많아집니다. 옥상에서 그 맥락을 쌓아온 사람과 농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희 집은 옥탑방이라 옥상이 있습니다. 집 안에 옥상으로 가는 문이 있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집이라는 무서운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옥상에 의자 두 개를 놓았습니다. 앉아서 담배를 피우려고요. 선선한 여름밤에 옥상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농담을 나누던 그 시간이 아득하고 즐겁습니다. 왜 저에게 소중한 기억은 자꾸만 아득해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눈 농담도 아득합니다. 어깨를 가볍게 치며 웃던 기억과 눈을 마주치며 이를 보이던 기억만 납니다. 옥상에서 나눈 농담은 정말,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농담은 우리만의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같습니다. 한 단어만 말해도 꺄르르 웃을 수 있는, 열렬한 환호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언어 말입니다. 우리들만의 언어를 쌓아 갈 때의 즐거움을 영원토록 느끼고 싶습니다.

 농담과 옥상은 잘 어울리는 단어 같습니다. 저는 잘 어울리는 단어를 나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령 휴학과 바퀴벌레, 유혹과 술 같은 것이요. 저는 이런 웃기지도 않은 농담도 좋아합니다. 이런 것도 저에게는 농담이에요. 알고 계신 농담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하루 종일 되뇌며 행복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농담이 조금은 섞인 하루를 보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은긍

 

59소식

[활동펼치기]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소식

“나는 사실 이 자리가 궁금해 참여했다. 애도와 기억은 좋고 유의미한데, 우리에게 왜 이 자리가 필요한 걸까. 포스터로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에 답을 찾고자 향했다. 그리고 ‘감염자 수’, ‘사망자 수’로 치환된 우리의 많은 존재와 함께 가려진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침묵 행진을 했을 때 횡단 보도로 이어진 광화문 사거리를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오며, 떠난 자리를 마주한 나는 질문했다. 저 자리에서 무얼 했냐고.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김영옥님의 말씀처럼 나는 뒤돌아 질문했다. 그렇게 반성의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외자

그림1. 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 애도와 기억의 장 추모문화제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안내 포스터.

지금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6월 17일 금요일, 다시 한번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가족과 위중증환자 보호자, 공적 추모를 요구하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준비하는 이들, 음악을 통해 연대하는 문화노동자와 이 자리를 기록하는 미디어활동가들, 그리고 마음을 함께 모은 시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사진1. 애도와 기억의 장 현수막 앞에서 노래하는 문화노동자 연영석. 기타를 매고 있다. 왼편에 가사를 통역하는 수어통역사가 있다.

지금은 아직 코로나19 감염병의 시대입니다. 이제 섣불리 언젠가 “끝난다”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올해 초 치솟던 확진자, 사망자, 위·중증 환자의 수가 감소함에 따라 사회적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일상 회복, 경제 성장’을 앞세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감염병의 위기를, 감염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동료 시민의 얼굴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 뒤로 인간의 존엄을 미루던 것도 모자라,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는 우리의 동료 시민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이 일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늦은 밤까지 2차를 가고 3차를 가는 것만이 일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망각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새롭게 일구고 나누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떠나보낸 이들, 숨죽여온 이들이 함께하는 일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기침 소리만 나도 날카롭게 돌아보던 날을, 매일 아침 확진자 숫자를 확인하며 한숨쉬던 날을, 우리 동네 확진자의 동선을 꼼꼼하게 추적하며 평가하던 날을, 의료공백의 소용돌이 속에서 병원에 가지 못한 채 앓아야 했던 날을, 거리두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어가며 일해야 했던 날을, 자가격리를 할 수 없는 단칸방에서 숨죽여야 했던 날을, 쿠팡에서 온 택배를 손도 안 댄 채 무료 반품 시킨 날을, 마스크를 사는 긴 줄 사이에서 주민등록증이 없어 작아져야 했던 날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사진2. 애도와 기억의 장 현수막 앞에서 발언하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김영옥 활동가. 왼편에 수어통역사의 통역이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애도하기 때문입니다. 혐오와 낙인 속에서 온전한 추모의 마음을 전할 새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을, 차별과 배제 속에서 통증을 홀로 견뎌내야 했던 이들을, 공포와 감시 아래 죄인이 되어야 했던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을, 우리의 이웃과 친구와 동료와 가족을 애도하기 때문입니다.

감염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감염병의 종식을 이야기할수록 감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는 가려집니다. 바이러스가 언젠가 이땅에서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가려져온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일상의 회복을, 무언가의 성장을 말할 수 없습니다.

회복은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고 경제만의 것이 될 수 없으며 국가만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비탄의 세월이 드러낸 고통을 직시하고, 기억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리를 떠올리고 애도할 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을 때,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회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픔을 겪어낸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낸 책임을 묻고, 애도와 기억을 모아, 더 존엄하고 평등한 세상을 향해 서로를 돌보며 새로운 길을 닦아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금에는, 내일에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애도와 기억의 장에 함께 모인 모든 분들께, 코로나19로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던 모든 분들과 그 가족, 친구, 이웃, 동료 시민들께 연대의 인사를 보냅니다.

사진3. 파이낸스센터 앞 계단에 추모의 메시지가 담긴 색색깔의 손피켓과 LED 촛불이 늘어서있다. ‘빈 자리를 바라보며 기억합니다, 당신의 삶을’, ‘애도할 권리 기억할 권리’, ‘토닥토닥 맘 튼튼’, ‘애도, 추모하는 마음이 존중받는 세상’,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기억하겠습니다’, ‘애도는 우리를 연결시킵니다. 망자와 산자를 서로 다른 남은 이들을’ 등의 메시지.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72소식

[활동펼치기] ‘동지’들께 드리는 편지

소식

안녕하세요, 심지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그러니까 6월 15일에 우리는 한국산연지회 농성장에서 성소수자와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을 열고, 두 영화 <내가 싸우듯이>와 <평등길1110>을 상영했어요. 그 후기를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마침 조합원들의 전면 단식 소식을 전해들었네요. 그 소식을 접하고 보니 왠지 이 후기는 편지여야 할 것 같더라고요. 산연 ‘동지’들에게 쓰는 편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에 앞서 ‘동지’들에게 저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저는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이기도 하고,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노동권팀의 신입 회원이기도 해요. 활동가이자, 노동자이자, 성소수자라고 말해봐도 되겠죠. 활동과 그 밖의 삶을 분리하는 듯 마는 듯 애매하게 지내는 요즘,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구인 광고>를 내놓듯 ‘동성혼 소송’을 함께 할 파트너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냥 연애하기도 마냥 쉽지는 않은데 동성혼 소송을 함께 할 파트너라니… 구하기 꽤 어려울 것 같지 않나요. 네… 별로 궁금하시진 않으시겠지만… 왠지 모르게 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더 구구절절해지기 전에 본론으로 넘어가볼까요. (…)    ‘

처음에 행성인 노동권팀에서 한국산연지회 농성장에서 함께 이야기마당을 해보자고 하셔서 살짝 겁을 먹었는데요. 저는 한국산연지회 ‘동지’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몇 번의 검색을 통해 어떤 투쟁을 하는 분들인지 조금 접할 수 있었지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바다 건너 일본 시민들의 연대까지 이끌어낸 멋진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에 대해 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그런 생각하셨죠? “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서 뭘 알아가지고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할까”, 그런 생각들이요. 그럼에도 한편으론 기쁘셨으리라 생각도 해요. 어쨌든 농성장에 누가 찾아온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저도 조금은 느껴봤거든요. 때로는 그 누가 ‘낯선 사람’일수록 더욱 반갑다는 것도요.

사진1.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 등 농성장을 찾아온 사람들과 한국산연지회 조합원들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

[사진1.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 등 농성장을 찾아온 사람들과 한국산연지회 조합원들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 

서로를 잘 모르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감히 여러분을 ‘동지’라고 불러봅니다. 농성장을 찾아간 성소수자와 그 친구들이 차별금지법을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인지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인지조차 몰랐다는 여러분을, 감히 나의 ‘동지’라고 불러봅니다. 성소수자 활동가 종걸에게 김진숙 지도위원이 ‘선배’이듯이, 여러분 역시 저의 ‘선배’이겠지요. 저 역시 ‘조끼 입은 사람들’을 약간 무서워하던 때도 있었는데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젠가부터 제게는 ‘편견’이 생겼거든요. 싸워야 하는 사람들, 싸울 수밖에는 없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그런 편견이 생겼거든요. “끝까지 싸워본 사람만이 이 사회가 어떤지 알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저는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워왔고, 그래서인지 저는 이왕이면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 함께 있고 싶어요.

세상은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나빠지는 것도 같고, 그래서 저는 더 이상 무언가를 쉽게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여러분의, 우리의 간절함만은 믿어보고 싶어요. 행성인 상임활동가 호림의 말대로 “싸워본 사람들이 싸우는 사람들의 심정을 아는” 게 아닐까요. 고백하자면 저는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 곡기를 끊는 마음까지는 아직 잘 몰라요. 다만 숨을 가다듬고, 조금씩 가늠해볼 뿐입니다. “걷다 보면 도착점이 있을 거라 믿어야 한다”는 해진 동지의 말을 기억합니다. 언젠가 여러분과 축배를 들 수도 있을까요.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 할게요. 종종 몸도 마음도 함께 할게요.  부디 어느 저녁 오간 이야기들이 여러분께도 “짜릿한 연대의 기억”으로 남기를 빌어봅니다. 

 

심지 드림

 

[독자를 위한 덧붙임] 

“오해진 금속노조 경남지부 한국산연지회장은 “공장(도 떠나) 거점이 없는 상황에다 법으로 보장된 내용도 없어 굉장히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며 “이후 다른 사업장에서도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외국인자본에 대한 법 제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투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산켄전기는 2020년 9월 홈페이지로 2021년 1월20일부로 한국산연을 해산한다는 결정을 알렸다.”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9047

60소식

[활동가편지] 인류의 설정값이 평등이 아닐 수 있나요

소식

이번 15일 서울시열린광시민위원회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시청광장 사용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신체 과다 노출이나 청소년 보호법상 유해 음란물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지요. 퀴어의 존재를 오직 성적으로만 다루는 성소수자 혐오적인 처사였습니다. 이 사회는 이렇게나 혐오적인데 우리의 사회는 그보다는 조금 더 평등합니다. 가령 제 정체성을 아는 친구들이나, 제가 하는 사회풍물패나, 이곳 서울인권영화제도 그렇고요. 소수자 혐오적인 사회와 제가 사는 작은 공동체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일지…

그러고보니 한달 전 쯤인가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반대로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나는 바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였는데요, “나는 여자랑도 연애할 수 있어.”라고 말해야 할 것을 “나는 남자랑도 연애할 수 있어.”라고 반대로 말해버린 겁니다. 제가 남자랑 연애하면 그건 헤테로 연애라 커밍아웃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 몇년간 레즈비언 친구들이랑 놀았더니 기본 설정값이 동성애가 되어버려서 생긴 작고 귀여운 헤프닝이었죠. 친구들이 알아서 찰떡같이 알아듣기는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약간 재밌더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은건지. 여자 좋아하는 거 티 났나. 

또 한번은 대학 동아리에서 풍물극 공연을 준비하는데 여성 캐릭터에 지정성별 남성인 친구가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여성인 캐릭터를 남성으로 바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친구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공연에 올렸습니다. 친구는 정많고 유머러스한 주모(酒母) 역할을 아주 잘 해주었습니다. 공연연습을 하면서도, 그리고 공연 당일에도 누구도 주모의 캐릭터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각본과 연출, 그리고 무대 위에 모든 캐릭터들이 주모를 여성으로 여기니 관객도 자연스레 동화되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걸 보면 세상을 설정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어떤 성별과 어떤 사랑을, 어떤 정체성과 어떤 욕망을 ‘정상’이라고 설정하고 있는걸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 설정값을 잘 알고 정상범주의 폭력성과 맞서고 있을겁니다. 누군가는 운동으로, 누군가는 생존으로, 누군가는 일상의 전선에서요. 우리는 타인의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을 무리하게 규정하려는 시도나 모든 인간을 동일한 정체성으로 일괄하는 것을 지양하려고 합니다. 모든 시도가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피드백과 공부를 하며 조금씩 시정하고 있지요. 이 움직임들은 분명 언젠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설정값을 더욱 평등에 가깝게 만들겁니다. 우리의 변화와 혁신은 평등과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이니까요.

사진1. 분수대 위로 무지개가 보인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57소식

[인권나들이] ‘용접공 김진숙의 37년 투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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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이라고 불리는 게 낯설었다. 마지막 질문 시간에 누군가 진숙님께 투쟁의 전문 용어라 할 만한 것을 어디서 배우고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로 받아들이셨는지 물었던 게 공감이 될 정도였다. 나는 “동지들”이라고 불리는 게 싫다는 생각도 했다. 나에겐 외자(별명)라는 이름이 있는데, 모든 것이 지워지고 “동지”라는 것만 남은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대중적으로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기도 하였다. 나 역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것에 대한 고민에 놓여 있었다. 결국 받아들였지만 나의 다름이 지워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되고, “동지”라는 단어는 왜 안 됐을까.

 

“동지”라 우리를 부른 사회자는 또 다른 ‘김진숙들’을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저렇게 언급되는 걸 김진숙님은 어떻게 느낄까 궁금했다. 어렴풋이 불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들과 다른 자신의 생이라는 게 있는데 저렇게 한 꼭지만 뽑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김진숙’이라 이름 붙이는 거 말이다. 나는 계속해서 ‘차이’에 대해 생각한 것 같다. 사실 난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과 나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옛날에 잠시 사회문제와 거리를 두는 동안 삶의 고유한 이야기에 주목했기 때문에 더 그러했던 것 같은데, 여전히 나는 고민하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이겨내야 하는 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는 게 아닐까.

 

목적이나 뜻이 같은 사람, 이것이 ‘동지’의 뜻이라고 한다. 나의 친구는 혐오나 차별 없애기를 목적으로 투쟁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스스로 ‘동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함께 싸운다’는 의미를 가리킨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모두가 채식을 할 때도 그 이유는 동물해방, 기후 위기, 건강 등 이유가 다양하고 모두 포함될 때도 각각의 정도가 다르지 않냐고. 과연 우리가 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같은 목적이나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데 얼마큼의 가능성이 있을까. 

 

김진숙님의 이야기 현장으로 돌아온다. ‘용접공 김진숙의 37년 투쟁 이야기’를 듣겠다고 구글 폼에 신청하고 모이는 장소에 착석한 나는 앞으로 2시간 동안 어떻게 이야기를 들을지 막막했다. 집중력과 체력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쌀쌀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정신이 멍했는데, 우려와 다르게 사실 진숙님은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잊지 말아야 할 지점들을 분명히 가리켰고, 웃음을 빼놓지 않았다. 배우 김희애님이 “놓치지 않을 거에요”라고 말했던가. 웃음 포인트에는 대조, 그러니까 삶의 격변이 담겼고 아주 화끈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라며 웃어넘길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다 함께 웃으며 그것이 잘못된 말과 행동이라는 걸 우리 사이에서 공유하는 것 같았다. 

 

내 방에서 뒹굴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집어 읽고 있다. 1장의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을 이제 막 읽은 참이다. 그러나 그 짧은 내용 속에서도 “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에만 이야기한다.”라는 문장이 크게 와 닿았다. 언젠가 ‘이야기’와 ‘경청하는 태도’의 중요성에 대해 매료된 적이 있다. 앞의 문장과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경청하는 사람 또는 경청하는 태도 없이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말이든, 글이든, 영상이든 간에. 진숙님은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의 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나는 플랫폼씨가 만든 이 자리에 더하여 김진숙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자 하는 우리가 있었기에 김진숙님의 이야기가 2022년 5월 28일 오후 3시에서부터 5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역사의 증인을 마주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번 행사의 포스터에 가장 크게 적힌 말은 “끝까지, 웃으며, 함께”였다. 어쩜, 김진숙님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을 잘 담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경험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쌓아온 진숙님이 조금 부럽기도 한데, 나에게도 “끝까지, 웃으며, 함께”할 수 있는 밑바탕이 생길 수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한 줌의 생각을 아직은 흩어지는 모래알로나마 이곳에 남긴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외자

79소식

[함께나눠요] 나만 통제할 수 없는 나의 개인정보

소식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친구가 나에게 월경 주기 관리 어플을 쓰냐며, 혹시 쓴다면 어플의 개인정보 취급 방침을 잘 살펴보라며 걱정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의아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대법원 판결이 뒤집힌다면 낙태를 처벌하는 주법이 제정될 것을 우려한 여성들 사이에서 월경 주기 관리 어플의 내용이 낙태죄 처벌에 악용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IT기업이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그동안 아무 경각심 없이 써왔는데, 개인정보라는 큰 대가를 참 안일하게도 간과해 왔음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플에 월경 정보를 입력하는 순간 나의 가장 사적인 정보를 기업과 공유하는 것인데 (물론 어플의 개인정보 취급방침에 따라 다르겠지만) 스마트폰 속에서 이루어지면 내 통제 하에 있다는 착각을 하기 쉬운 탓에 평상시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게 되는 듯하다. 하지만 기업이 월경 주기와 같은 내 개인정보를 이용해서 수익을 낸다면? 더 끔찍하게는, 정부가 기업으로부터 내 개인정보를 사들인다면? 이 모든 일이 내가 모르는 사이 일어날 수 있다면? 무료 서비스 이용의 대가 치곤 너무 큰 대가가 아닐까?

위 약관에 동의합니다 스틸컷. 마크 주커버그가 무언가 말하고 있는 사진

          컬른 호백 감독의 2013년 작 다큐멘터리 <위 약관에 동의합니다>는 이러한 질문들에서 출발하여 미국의 맥락에서 기업과 정부에 의해 프라이버시권이 어떻게 위협받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로 살펴본다. 다큐멘터리에 제시된 문제상황을 요약하자면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 기업이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고,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수익 창출에 활용되거나 심지어는 국가기관에도 제공되어 사용자의 프라이버시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작된 지 9년이나 흘렀지만, 이들 IT 기업은 2013년에 비교해서 오히려 사용자가 더 증가했으면 증가했지, 절대 영향력이 적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주제는 아직까지도 시의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라이버시권 침해 상황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기업에 의한 침해와 여기서 파생되어 정부에 의한 침해가 있다. 기업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방식은 개인정보 자체를 판매하는, 얼핏 봐도 무책임한 사례부터, 개인정보와 쿠키(사용자가 웹사이트에 방문할 때 사용자의 컴퓨터에 저장되는 웹 사용 정보. 로그인 상태, 검색 기록, 사이트 환경설정 등이 이 포함된다[1])를 활용하여 광고 수익을 내는, 좀 더 도덕적으로 모호한 영역의 사례까지 다양하다. 특히 쿠키를 활용하면 사용자 맞춤 광고를 제공할 수 있는데 이는 이들 IT 기업의 주요 사업 모델이다. 웹사이트 사용 정보로 나에게 딱 맞는 제품 추천받는 것쯤이야 개의치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집 주소나 핸드폰 번호처럼 나를 특정하는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구글의 2000년 12월 정책에는 쿠키만으로는 사용자를 특정할 수 없다, 즉,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나와있지만, 1년 뒤 2001년 12월 정책에는 상황에 따라 사용자의 신원이 공개될 수 있다고 나와있다.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은 구글이 쿠키 퇴출까지 선언했지만 (2023년 말까지 쿠키 수집을 중단하고 신기술 ‘플록’을 도입하여 개인정보를 익명화하고 비슷한 인터넷 서핑 습관을 가진 사용자를 집단으로 묶어 맞춤형 광고를 만든다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2]) 문제는 구글은 이미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개인정보가 많고, 구글은 사용자 사용자 활동을 개인정보와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이 사용자 개개인의 세세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큰 위협이 따른다 (사용자는 기업이 개인정보를 잘 보호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9/11 사건 이후 애국자법이 제정된 미국에서 이는 훨씬 실제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다큐멘터리에는 이와 관련하여 국가안보국의 일반인 사찰에 인터넷 통신사 AT&T가 공모하여 사용자의 인터넷 트래픽을 사용자 동의도 없이 제공한 사건이 나온다. 애국자법 통과로 연방정부가 개인정보를 얻기 위해 판사의 허가조차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애국자법이 폐지된 현재에도 애국자법에 의해 확대된 FBI의 국가안보레터 발행권한(법원의 허가 없이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 도서관, 은행, 신용카드 업체 등에게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3])은 큰 변화없이 유지되고 있다고 하니, 기업이 국가에 사용자 정보를 넘겨주는 것에 대한 우려는 아직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정부가 이렇게 압박을 하지 않아도 개인정보를 입수할 방법이 존재한다는 점도 큰 문제다. 놀랍게도 데이터 추출 장비의 판매가 합법이고 (심지어는 개인도 아무 규제없이 살 수 있다), 각국 정부에 개인정보를 판매하는 기업도 전세계에 존재한다. 사실상 인터넷에 개인정보를 입력한 순간부터, 개인정보에 대한 통제를 잃는다고 봐야하는 상황이다.

사용자들을 이토록 일상적인 프라이버시 침해 상황에 처하게 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사용자가 기업의 이용약관을 일방적으로 강요받는 수동적 위치에 있다는 점이 문제의 시초라고 생각한다. 사용자는 이용약관에 동의하지 않으면 애초에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데다가, 약관에 어떤 내용을 넣거나 뺄 지 결정할 수도 없다. 오히려 기업은 추후에 언제든지 약관 내용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용약관도 개인과 기업간 일종의 계약인데 한쪽에만 너무 유리한 상황에서 계약을 진행하는 것이 아닌지, 이것을 공정한 계약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이 정부에 “범죄예방”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넘길 수 있다는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조항이 있더라도 사용자는 그저 동의할 수밖에 없다면 두 막강한 권력을 견제하고 프라이버시권을 되찾아오려는 목표 달성이 요원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개인정보가 판매 가능한 상품 또는 수익 창출의 원천이라는 인식도 프라이버시권 침해 상황을 가속하는 다른 한 축이다. 개인정보 활용을 통해 광고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기업 때문에 사용자는 익명으로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를 포기당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권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사용자는 개인정보의 주인이면서도 이를 활용해서 기업이 얻은 이익을 한 푼도 나눠받지 못한다는 점도 정당한지 생각해봐야한다). 또, 개인정보가 상품이라는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나는 다른 문제로는 국가도 개인정보를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국가가 기업을 상대로 개인정보를 제공하도록 압박하지 못하게 한들 개인정보 구매가 가능하다면 이러한 노력이 무용할 것이다. 강압적 권력이 아니라 합법적 거래라는 점에서 국가 권력의 영향이 더 교묘해진다는 위험마저 존재한다.

          다큐멘터리가 개봉한지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다큐멘터리 말미에 보면 에드워드 스노든 폭로(미국 국가안보국이 미국내 일반인을 대상으로 통화기록, 이메일, 메신저, 화상채팅, 사진, 파일전송, SNS 정보까지 수집한 프리즘 프로젝트를 폭로한 일[4])가 막 일어났을 때임을 알 수 있다. 미국 애국법은 폐지되었지만 기업과 국가에 의한 크고 작은 개인정보 침해 사례는 그 후에도 전세계 곳곳에서 계속 일어났다. 2016년 입법 제지를 위해 192시간의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한국의 테러방지법, 2018년 심리테스트 사이트를 통해 얻은 사용자의 페이스북 정보를 트럼프 선거캠프에 제공했던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사건, 그리고 2020년 빅데이터 산업 발전 촉진을 이유로 가명 정보를 본인 동의없이 산업 연구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한국의 데이터 3법까지[5]. 기업과 국가가 입맛대로 개인정보를 이용하려고 갖은 수법을 벌이는 동안 정작 개인정보의 주인인 시민은 점차 개인정보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비관적인 착각일까.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미나상

 

[1] 남시현, “웹사이트에서 동의 요구하는 ‘쿠키’, 아는 만큼 보인다”, 동아일보, 2020.03.20,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00320/100259582/1. 2022.06.21. 검색

[2] 김인경, “”적응할 시간 주겠다” 구글, ‘쿠키’ 퇴출 2023년 말로 연기”, 블로터, 2021.06.25. https://www.bloter.net/newsView/blt202106250009. 2022.06.21 검색

[3] “미국의 애국자법과 해외정보사찰법 등 최근 경향”, 참여연대, 2016.02.26., https://www.peoplepower21.org/Peace/1394277#:~:text=2001%EB%85%84%20%EC%95%A0%EA%B5%AD%EC%9E%90%EB%B2%95%EC%9D%80,%ED%95%98%EB%8A%94%20%EA%B6%8C%ED%95%9C%EC%9D%84%20%ED%99%95%EB%8C%80%ED%95%98%EC%98%80%EB%8B%A4.. 2022.06.21 검색

[4] 임동욱, “폭로로 정체 드러난 ‘프리즘’ 스캔들”, 사이언스 타임즈, 2013.06.19.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D%8F%AD%EB%A1%9C%EB%A1%9C-%EC%A0%95%EC%B2%B4-%EB%93%9C%EB%9F%AC%EB%82%9C-%ED%94%84%EB%A6%AC%EC%A6%98-%EC%8A%A4%EC%BA%94%EB%93%A4/. 2022.06.21 검색

[5] 유진상, 차현아, ““14개월 만에 숙원 풀었다”… 데이터 3법 본회의 통과”, IT조선, http://it.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09/2020010903896.html. 2022.06.21 검색

 

57소식

25회 서울인권영화제 국내작(공모작) 선정을 마치며

소식

선정작 발표. 본문에 게재.

25회 서울인권영화제 국내작(공모작) 선정을 마치며

 

2022년 서울인권영화제는 25회를 맞이하며 공모를 통해 총 70여 편의 국내작을 만났습니다. 이번 공모에는 출품 자격에 ‘장애인접근권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한글자막이 있는 작품’을 추가하였습니다. 지난 2020년 24회 서울인권영화제 공모보다 확연히 줄어든 공모작 수에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글자막이 영화의 기본적인 요소로 자연스럽게 있는 작품들을 농인/청인 활동가 구분 없이 함께 심사하며 지금, 여기의 인권을 실천하는 데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년보다 더 오랜 시간 깊은 논의가 필요할 정도로 작품마다의 무게가 무거웠습니다. 13명의 활동가가 3개월간의 숙고를 거쳐, 오는 9월 마로니에공원에서 개최될 25회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국내작)으로 선정한 인권영화는 총 10편입니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사회의 차별과 배제를 드러내는 와중에도, 거리에서 쫓겨난 이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싸우고, 우리 삶의 불평등과 혐오를 말하며 기나긴 싸움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러나 국회는 여전히 차별금지법에조차 길을 터주지 못하고 있으며 새로운 정부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듯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하지조차 않습니다. 25회 서울인권영화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광장으로 나가 영화제를 여는 의미를 되새기며, 서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들을 만나게 하는 영화를 찾고자 했습니다. 작품을 상영하며 어떤 이들을 초대하여 무슨 이야기를 엮고 이을 수 있는지 논의했습니다. 온전한 정답을 내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만날 때, 소수자의 ‘있음’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힘’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날 때, 개인의 서사로부터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민하게끔 만드는 작품을 만날 때 모두가 환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투쟁의 현장을 담은 영화들을 많이 만나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인권의 서사는 어디서든 이어져야 함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 기록에 서울인권영화제도 힘이 되어야 함 역시 다시금 되새깁니다. 또한 필요한 주제나 소재를 담고 있는 작품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시선과 해석이 중요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소재나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특히 많은 논의가 필요했습니다. 감염병이 사회적 재난으로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모두 동의했으나, 아쉽게도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더 나아가는 작품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소수자 정체성이 소재가 되는 작품 또는 당사자가 제작의 주체인 작품 역시 논의를 거듭하며 정상성의 시선에서 소수자를 호명하고 있지 않은지 물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재현 윤리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작품들 또한 있었습니다. 주목이 필요한 현장일지라도 비참함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피사체와 관객, 그 사이의 관계성을 고민하여 표현한 작품을 찾고자 했습니다. 한편 광장이라는 공간의 특성 상 상영이 어려운 작품에는 큰 아쉬움이 따랐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쌓아가며 앞으로 이어나가야 할 질문 또한 보였습니다. 영화와 인권의 의미가 점차 확장되는 지금, 서울인권영화제에게 ‘인권영화제’란 무엇인지, 영화로 인권운동을 이어나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또한 ‘좋은 영화’를 찾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질문했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가 작품을 해석하고 프로그래밍할 때, 그 작품이 인권영화로서 관객의 삶과 만나고 투쟁의 현장과 맞닿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상영활동의 책무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광장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와 작품 사이에 먼 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이야기의 씨앗을 쏘아올리는 영화를 발굴하는 것 역시 중요했습니다.

25회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들은 앞으로 더 깊고 진한 고민과 논의를 거치며, 연대를 도모하고 확장하는 광장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서울인권영화제는 그 어떤 좋은 영화일지라도 이미 인권영화로서 완성된 작품은 없다고 믿습니다. 작품이 사람과 만나고 삶과 연결되며 현장과 연대할 때, 그렇게 우리가 모이고 싸울 때 비로소 인권영화가 되고 인권영화제가 된다고 믿습니다. 소중한 작품을 공모해주신 모든 출품인께 감사와 연대의 인사를 드립니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인권의 현장을 기록하고 영상/영화로 연대하는 이들과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2022. 6. 8.

서울인권영화제

 

25회 서울인권영화제 국내작(공모작) 상영 확정 (가나다순)

▲ 2차 송환⎮김동원⎮2022⎮156’⎮다큐멘터리

▲ 기다림⎮섹 알 마문⎮2020⎮60’⎮다큐멘터리

▲ 명:우린 같지만 달라⎮김규림, 김민교, 박혜진⎮2021⎮23’48”⎮다큐멘터리

▲ 멜팅 아이스크림⎮홍진훤⎮2021⎮70’⎮다큐멘터리

▲ 빠마⎮섹 알 마문⎮2021⎮30’⎮극영화

▲ 섬이 없는 지도⎮김성은⎮2021⎮91’⎮다큐멘터리, 실험

▲ 싸우는 여자들⎮박지혜, 이은혜⎮2021⎮34’50”⎮다큐멘터리

▲ 애프터 미투⎮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소람⎮2021⎮86’⎮다큐멘터리

▲ 오시카무라에 부는 바람⎮김명윤⎮2021⎮87’⎮다큐멘터리

▲ 코리도라스⎮류형석⎮2021⎮87’⎮다큐멘터리

65소식

25회 서울인권영화제 공모 선정작 발표 연기 안내

소식

📍25회 서울인권영화제 공모 선정작 발표 연기 안내

이하 텍스트와 같은 이미지입니다
안녕하세요, 25회 서울인권영화제에 소중한 작품을 출품해주신 분들과 영화제를 기다리시는 시민 관객 분들께 알립니다.
 
5월 중으로 예정되어있던 국내작 선정 발표를 6월 8일로 연기하였습니다. 영화제 준비와 더불어 연대 활동으로 바쁜 봄을 보내며 총 14명의 상임/자원활동가가 함께 한 작품 한 작품 꼼꼼히 논의하였습니다. 선정작의 출품인께는 개별 연락이 갈 예정입니다.
 
약속 드렸던 일정보다 늦어져 죄송하고 아쉬운 마음을 전합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서울인권영화제 드림
50소식

[300호 특집] 서인영 활동가들의 축하 메시지

소식

외자 

삼백호를 기념해 삼행시를 지어보겠습니다.

삼) 삼식이 두식이 모두 모여

백) 백호 이백호 삼백호가 된 서인영을

호) 호빵 찐빵 대빵 축하합니다

 

장호 

9년만에 서울인권영화제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파릇하던 대학생이 찌들어버린 직장인이 된 동안, 서인영은 고맙게도 그자리에 계속 있어주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장을 만들어주시고, 저도 그자리에 함께하겠습니다.

 

노랭 

서인영과 울림을 알게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발행되었던 울림을 보면서 영화제와 사람들을 이어주는 느낌을 받았어요 앞으로도 울림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들이 울려퍼지기를!

 

나기 

안녕하세요. 나기입니다. 지금은 인권영화제에 심사할 국내 영화를 보고 있어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영화들을 보며 제작자들의 생각을 가늠하고 더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하고 있습니다.합니다. 300호가 된 울림 너무나 축하합니다. 계속, 계속, 함께 살아갑시다. 우리.

 

은긍 

울림이 벌써 300회가 되었군요. 300회 모두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번의 울림을 나누며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느꼈습니다. 감사해요. 앞으로도 오래 함께 했으면 해요. 적당히 더운 여름날 보내시길!

 

미나상 

정세랑 작가님의 <시선으로부터>에 나오는 문장을 좋아합니다.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대단한 재능”이라는 구절이요. 꾸준한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울림 300회가 더 소중히 느껴집니다. 울림 300회를 축하드려요!

 

레나 

울림 300호 추카포카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받아본 서인영 뉴스레터 [울림]은 225호더라구요. 그때부터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제게 많은것들을 주었어요. 최고로 꼽자면 뭐다? 서인영에서 맺은 인연들이다! = 뚝딱거리며 뚝딱뚝딱 만들어나갈 25회 서울인권영화제도 기대해주시라!

 

선율 

울림 삼백호를 축하합니다! 울림을 대대손손(?) 이끌어 온 모든 활동가 분들을 향한 축하입니다. 하하. 저는 울림과 함께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삼백호를 축하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외자님이 삼백호란 ‘백호 세 마리’를 뜻한다고 하셨는데, 올해가 또 호랑이 띠가 아닌가요? 검은 호랑이의 띠라는데… 음.. 억지스럽겠지만… 어두운 세상을 밝혀 줄(?) 울림이 되기를(?) 바라며(?) 아무 말을 마칩니다. 저도 화이팅 할게요. 활동가와 독자 모두 파이팅이에요.

 

청 

울림 300회를 맞이하여 축하드립니다.

울림에 들어오고 이렇게 축하드릴 일을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혼자였다면 못 할 일들이 울림과 함께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봅니다. 더 길게 오래 함께 해요!

 

해랑 

사람은 단일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며 교차적인 존재입니다. 각자 고유의 소수자성이 있으며 다수이면서 소수입니다. 활동과 연대는 단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연대고, 활동입니다. 여러분 꼭 끝까지 살아남읍시다.

 

심지 

울림이 벌써 300호라니, 하루에 한 호씩 정주행하면 거의 1년이 걸린다는 말이지요…? 누군가 그렇게 정주행한다 해도(…) 울리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울림 열심히 만들겠습니다! 충성충성

 

요다 

울림이 벌써 300호라니 너무 멋집니다. 울림 300호를 축하하는 저의 엄청난 마음을 울림팀에게 드립니다. 사랑해요 울림❤️ 

서인영과 함께 해주시는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랑해요💚여러분의 마음에 울림을 드리기 위해 서인영은 올해도 열일하고 있어요 곧 만나요💛

 

고운 

울림 300호!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참 재밌습니다. 메일함을 뒤져보니 제가 처음 받은 울림은 94호, 무려 2010년 2월 25일에 받았네요. 청소년 시절 마로니에공원을 지나가다가 어? 영화하네? 하고 앉아서 보았던 게 계기였을 겁니다. 그동안 서울인권영화제와 울림을 만들어온 수많은 활동가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애독자 겸 제작자로 울림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축하해요, 울림!

 

선우 –

울림 300회 축하합니다!! 

언제나 서울인권영화제가 만들어지는 생생한 과정, 진지한 사회 현안들, 자원활동가들의 소소하고도 사랑이 넘치는 이야기를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림과 영화제를 지지하고 앞으로도 더 많이 소통하고 싶습니다!! 화이팅!!

71소식

[활동펼치기] 5월 전체회의 스케치

소식

5월 둘째 주와 5월 셋째 주, 두 주에 걸친 전체회의는 멀리서 보면 단순했다.

“가장 처음에 ‘생활 나누기(줄여서 ‘생나’라 부름)’를 하고, 그간 있었던 연대 활동과 팀 활동을 공유하고, 공모한 영화들을 다 함께 심사한다.”

생활 나누기는 활동가들이 서로 만나지 못한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는 시간이다. 회의의 시작을 담당하고 있는데, 생나를 너무 하고 싶어서 회의에 지각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생나를 기다리고 생나를 애타게 찾았던 분들이 계셨다.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들의 생나는 서로의 일상을 들어주는 것 그 이상의 의미인 것 같아 서로가 참 특별하다는 생각을 한다. 첫 심사 회의 때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범람하면서 영화를 심사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는데, 다행히 이차 회의 때는 모두가 협력한 덕분에(?) 1차 회의의 세 배가 넘는 수의 영화를 심사할 수 있었다.

사진.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 길다랗게 책상을 놓고 둘러앉아 회의하는 활동가들.

[사진.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 길다랗게 책상을 놓고 둘러앉아 회의하는 활동가들.]

영화 심사는 각자 집에서 영화를 보고 상영 여부에 대한 생각을 온라인 문서에 적은 뒤 그것을 바탕으로 서울인권영화제 사무실에서 의견을 말하며 진행되었다. 다수의 의견에 모두가 따르는 게 아니라 합의를 할 만한 충분한 논의를 하기 때문에, 회의 시간은 영화별로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회의는 사실, 오프라인 만남 이전에 다른 활동가들의 의견이 적힌 온라인 문서를 봄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나와 정반대인 의견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며 생각의 생각을 문다. 그리하여 조정하거나 수정하고 보탠 것들을 바탕으로 활동가들이 모여 앉은 곳에서 생각을 나누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우리가 영화를 심사하는 데에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하고 자유롭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의견뿐만 아니라 웃음도 우려도 함께 나눈다. 이 영화를 상영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건 감상을 나누는 것보다 더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도록 하므로 머리를 다 함께 맞대고 골몰하는 시간이 귀하기도 했다.

이제는 문자통역사님의 타이핑을 염두에 두며 말하는 게 익숙해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얼떨결에 말하는 ‘우리’라는 단어 안에 누군가 배제되지 않았는지 고민한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서울인권영화제 회의를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오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견 말하기를 해냈다는 수고가 담긴 한숨과 자신에 대한 반성과 유의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에 대한 보람을 되새기며 하루를 마무리하려 한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는 나의 자그마한 일상도 변화라는 걸 잊지 않으며 앞으로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과 손잡으러 힘껏 팔을 뻗으려 한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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