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노트: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프로그램 노트

2011년 일본 동부 지역을 휩쓸고 간 관동 대지진과 쓰나미, 핵발전소 사고까지.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선 물류도 의료시설도 멈추었다. 피난준비 구역으로 지정된 도시의 사람들은 몇 시간 만에 짐을 싸서 피난길에 올라야 했지만,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 역시 남아있었다. 이렇게 9년 전 일본에서 방사능 피폭 지역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2020년 한국에는 바이러스에 의해 고립된 사람들이 있다. ‘표준화’된 재난 대응 방식으로 인해 바깥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장애인이 그러하다. 때문에 장애인은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안전한 공간을 선택하고 생명과 건강을 담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는 더 이상 불편의 범주가 아닌 삶의 위협이 된다. 자연재해와 더불어 감염병 또한 모두에게 같은 무게의 위기로 경험되지 않았던 것이다.

재난은 장애인이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애의 다양성만큼 여러 모습으로 찾아오지만, 장애인을 위한 개별적인 ‘피난’ 계획은 마련되지 않아왔다. 다양한 요구를 일괄적 격리로 해결하려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일상적으로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장애인을 특히 취약한 상황에 노출시켰다. 코로나19 상황 초기, 정부는 장애인이 자가격리 대상자가 될 경우 지정된 별도의 격리시설로 이동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장애인이 자신의 집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격리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부재했다. 활동지원이 필요한 자가격리 대상자가 늘어날 경우 어떻게 활동지원사를 안전하게 확보할지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대신 장애인을 자가격리가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일괄적으로 판단하여, ‘안전’과 ‘보호’를 이유로 시설에 모으기를 선택한 것이다.

문제는 공간에 대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감염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예방법, 재난상황에서의 지원대책은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기에 누구나 차별 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 초기 재난방송에서는 수어통역이 부재하거나, 있더라도 수어통역사를 제외하고 방송이 송출되기도 했다. 한편 온라인 개학이 시행되면서 장애 학생에게 충분한 온라인 교육장비나 보조인력이 배치되지 않아 교육 참여가 어려운 상황이 다수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현재 교육 시스템을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 구조와 체계가 장애를 가진 사람의 구체적인 일상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돌봄서비스가 중단되고 사회복지 시설이 잠시 문을 닫을 때에도 장애인이 평소처럼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라는 요구는 처음이 아니다. 2016년 메르스 당시, 장애인단체들은 정부를 상대로 장애인을 고려한 감염병 관리 매뉴얼을 요구하며 소송을 냈지만 정부는 법원의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소송은 4년째 진행 중이다. 재난 상황 시에 대처할 기본 매뉴얼조차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19의 위기도 이미 예견된 재난이었다.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지역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장애를 가진 몸의 경험과 삶이 온전히 존중되어,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 우리는 그러한 공동체를 통해서만 지진과 쓰나미, 핵발전소 사고로부터 각종 감염병까지의 수많은 재난 아래에서도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 이에 재난에서 장애인이 마주하는 고유한 문제들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실질적 대응책을 세우는 것은 당장의 재난을 극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재난의 극복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완수되지 않는다. 모두가 피난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제나 모두의 일상을 온전히 보전하는 사회적 인프라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한다. 이에 우리는 재난상황에서의 장애인의 권리보장을 논함과 동시에, 단순히 권리와 보장의 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 연속적인 삶, 그 자체에 대한 실질적 존중과 연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 불평등한 재난에 대응하는 방식은 재난 이후 재편될 사회를 결정할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현, 남선

26프로그램 노트

추천사: 야간근무

인권해설

지난 5월 미국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씨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목이 눌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Black Lives Matter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미국과 전 세계에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반응은 다양했다. 이번 사건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여전히 매우 심각하다는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함께 분노하고 동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 사건을 한국과는 아직 거리가 먼 일처럼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북미나 유럽에서 온 백인 이주민에게는 다양한 한국 문화에 대한 반응을 묻고 토론하는 컨텐츠가 각종 방송과 유튜브에 넘쳐나는 반면, 여전히 아시아 지역에서 온 이주민은 ‘불법체류자’이거나 ‘불쌍한 사람’으로만 이야기되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이 사건과 얼마나 멀리 있을까. 

이주민을 이렇게 우리 안의 철저한 타자로만 대하는 인식 자체가 인종 차별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한국 사회에서는 더 많이 이야기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야간근무>는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인 이주노동자 린과 한국인 노동자 연희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의 이런 생각들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한국에서 호주로, 자신처럼 이주민으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연희와, 떠나는 연희에게 린이 건네는 말들이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기를 바란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린과 연희의 이야기는 곧 나의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다.

 

나영(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대표)

24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야간근무

프로그램 노트

매년 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으로 오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코로나19 상황은, “이방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코로나19라는 ‘적’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우리’에, 한국에서 거주하고 일하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포함되지 못했다. 코로나19가 우한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었고, 이주민들은 초기에 공적 마스크를 살 수조차 없었다. 영주권자가 아닌 경우에는 재난지원금을 받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주민들이 모국어로 된 보건 및 방역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무엇을 특별히 ‘바꾼’ 것은 아니다. 어느 이주노동자들은 원래부터도 거주지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비닐하우스에 살았고, 한국인 노동자들보다 강도 높은 노동을 일상적으로 요구받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채로 살아왔다. 코로나19 위기는 그 모든 차별에 또다시 새롭고도 서러운 차별들을 덧대었을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 ‘지금’, ‘이곳’을 떠나야만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세계 속에서 ‘나’의 장소는 어디일까? 한국인의 아메리칸 드림, 혹은 서구에 대한 선망은 어떤 식의 응답을 받아왔나? <야간근무>에서 공장장은 한국인 노동자 연희와 이주노동자 린을 나란히 두고 “열심히 하면 연희에게는 관리자 직급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옆에서 ‘남의 떡’일 뿐인 기회에 관해 듣고만 있어야 하는 린은 마치 투명인간 같다. 하지만 연희는 린처럼 한국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할 수 없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려 한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캐나다로, 프랑스로의 이주를 꿈꾸는 여느 한국 청년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호주에서도, ‘이방인’으로서 연희의 삶은 녹록지 않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감할 수 있다. ‘호주 괴담’을 우려스럽게 전하는 연희 어머니의 표정은 심상찮다.

코로나19를 통해 유럽 각국에서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아시아인에 대한 적대와 테러를 보라. 어느 사회에나 ‘우리’라는 관념이 존재하고, 바깥의 존재들은 ‘우리의 몫’을 빼앗거나 위협하는 존재로 쉽게 간주되면서 그 입구를 뚫지 못한다. 헌데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매일매일의 상호작용이다. 개별의 삶이 구체적으로 상상되지 못하고 이방인(Stranger)이라는 납작한 이름만이 남을 때, 그들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주민들이 가족과 고향에 대해 품는 그리움, 교육에 대해 갖는 열망, 우정에의 희망, 그 모든 ‘서사’가 뒤로 밀려날 때, 이주민은 그저 투명인간으로 남겨진다.

분명 ‘우리’의 원을 더 넓혀가려는 시도들은 존재한다. 가령 포르투갈 정부는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이주자와 난민에게 일괄적으로 임시 시민권의 지위를 부여하기로 했다. 모두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방역이라는 목표를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나마 이주자와 난민들에게 ‘지금-여기에 속해있다’는 안전한 느낌에 대한 경험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공동체의 ‘방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또 어쩌면 누적되는 피로와 불안이 ‘치안’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그들은 영리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당신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 ‘조건부 환대’로, 아직은 옆의 존재에게 완전한 곁을 내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들은 손을 내밀었고, 그로부터 우정과 연대의 가능성이 피어오르게 되었다. 다시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볼까? 아직도 공적 마스크조차 살 수 없는, ‘미등록’된, ‘불법’의 존재들은 그렇게 ‘이기적인 조건부 환대’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심지

29프로그램 노트

추천사: 청소

인권해설

2017년 촛불광장에서 ‘청소’의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청소’는 부패한 권력을 척결해 세상을 ‘정화’하려는 정의로운 의지에 대한 은유였고, 수백만 명이 모인 집회가 거리에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질서’와 ‘평화’를 수호하는 대한민국 ‘선진’ 민주주의의 증거였다. 하지만 혼돈과 무질서를 허용치 않은 민주주의는 일상의 비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박근혜 탄핵”과 “승리”를 자축하던 집회가 끝난 뒤, 시민들은 깔끔하게 청소된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회사의 ‘갑질’과 저임금, 비정규의 노동을 견뎠다.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라는 부산지하철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의 읊조림은 ‘질서정연한 비폭력혁명’이었다는 ‘촛불’이 과연 무엇을 ‘혁명’했는지 묻는다. 그리고 ‘물리적 거리 두기’의 일사불란한 실천과 “K방역”의 서사가 자랑스레 펼쳐지는 지금, 영화 <청소>는 노동자의 손을 떠나 열차에 내던져진 빗자루와 걸레의 고요한 이미지를 통해 그 어떤 떠들썩한 구호보다 많은 말을 한다.

 

오혜진(문학평론가)

24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청소

프로그램 노트

<청소>는 박근혜정권 퇴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의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두가 변화를 염원하며 광장으로 나서던 그때, 한 노동자는 “근데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 저는 사실 큰 기대는 안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노동자의 자조적인 예언은 코로나19 시대에 현실이 되었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시작되자, 정부 당국은 여러 예방책을 제시했다. 가능하다면 재택근무를 할 것, 사람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손을 자주 씻을 것, 아프면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쉴 것. 이러한 예방책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없었다. 택배를 들고 나르고 분류해야 하는 노동자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을까? 좁은 공간에서 쏟아지는 전화에 쉴새없이 응대해야 하는 콜센터의 직원들이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며 자주 손을 씻을 수 있을까? 언제 직업을 잃을 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하며, 항상 회사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오늘은 아프니 집에서 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계급화된 사회에서 스스로에게 결정권이 없는 노동자는 너무나 다양하며 많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노동을 기준으로 짜인 정부의 예방책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이 노동자들의 사업장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부패한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세상은 비정규직에게, 육체노동자에게, 저임금노동자에게, 그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충분히 달라지지 않았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0년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전년동월대비 총 127만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임시직, 일용직과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 65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확진자 수가 차츰 줄어들며 유래없던 감염병 위기에 잘 대처했다는 찬사 뒤편에서 ‘재택근무’가 불가능하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했던 노동자들의 삶이 스러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사업장이 폐쇄된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부터 법적으로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특수고용,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들은 배제됐다. 이에 노동자들이 문제제기하자 정부는 각종 증빙서류를 제출 시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을 서류로 입증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에겐 이마저도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재난상황에서 주어진 고용안정지원금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주어진 권리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증명해야만 얻을 수 있는 권리였다. 이미 노동하고 있지만 노동자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들의 노동이 ‘정상적인 노동’에 부합하지 않고, 재난상황에서 ‘함께’ 고려조차 되지 못하는 대상이었음을 드러냈다. 모두 같은 재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불평등한 현실의 체제는 우리를 구획하고 구분지었다.

<청소>의 노동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부터, 하루를 끝낸 후까지 계속되지만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노동은 코로나19의 시대에도 이어진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확진자와 의심자를 상대하며 밤낮없이 일하는 의료진은 날마다 언론의 주목을 받고 전국민의 응원과 감사의 대상이 되지만, 방역작업을 하는 청소노동자는 당연한 존재가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늘어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역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노동은 성역시될 때, 누군가의 노동은 당연한 것이 된다.

박근혜의 탄핵이 선고된 날 “촛불승리 만세!” “우리가 승리했다!”라고 외쳤던 우리들, K-방역을 연일 칭찬하는 쏟아지는 외신들의 기사들에서 자긍심을 갖는 우리들. 그 “우리”는 누구일까? 현재 “우리”는 어디까지가 “우리”일까? “우리”가 모두가 될 때까지 그 누구도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레나, 환윤

25프로그램 노트

추천사: (테)에러

인권해설

얼마 전 미국에서 비행기에 탑승한 한 승객이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탈리아인 남성을 테러리스트로 생각해 신고했다. 테러리스트로 오해를 받은 남성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경제학과 교수로, 기내에서 수학방정식을 적어가며 강연 준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살펴보면 우리 안의 감시와 의심의 문화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신고를 한 사람은 이 남성이 피부 색깔이 어둡고 곱슬머리에 외국인 억양의 영어를 쓰니 흔히 테러범으로 연상하는 ‘중동’ 지역 출신이거나 이슬람인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게다가 알 수 없는 기호로 된 ‘미분 방정식’ 때문에 두려움이 커져 테러리스트로 확신하게 된 것 같다.

여기서 떠오르는 기억 하나,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진실이라고 믿었던 80년대 간첩신고. 학교에서는 반공교육을 하면서 신고정신을 강조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신고 대상이었을까. 당시 반공교육에서는 등산객, 낚시꾼 차림으로 아침 일찍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이나 산에서 배낭을 메고 노숙하거나 군사 시설 사진을 찍는 사람, 담배 등 일용품을 사면서 물가 시세를 잘 모르는 사람이 간첩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을 경계하며 혹시 간첩이 아닐까 의심을 품고 살아왔다.

미국의 9.11 테러의 경험과 최근 유럽에서의 테러, IS의 등장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테러에 대한 두려움은 안전과 안보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고 설사 자유가 제한되더라도 테러 방지를 이유로 여러 법률과 조치를 승인하게 만들었다. 안전과 안보를 위한 법과 제도는 사전적인 조치를 의미한다. 위험요소를 찾아내 그에 대비하고 미연에 방지하려는 시도는 감시의 강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감시는 의심의 목록을 작성하게 된다. 의심은 모두에게 향할 수도 있지만, 특정한 누군가에게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이슬람인 또는 이주민이거나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거나 가난한 사람이다. 결국 감시는 특정한 사람들이나 집단을 관리하거나 통제하길 원하는 조직이 이들의 세세한 일상까지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감시는 의심의 대상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감시의 대상은 위축감으로 스스로를 검열하면서 통제의 방식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감시를 받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보호받고 있다는 안심과 함께 의심의 목록을 수용하고 확장하는 데 침묵으로 동조하게 된다. 의심의 문화는 감시를 생산하고, 감시는 의심의 문화를 확장한다. 그렇게 의심의 문화와 감시는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게 된다. 결국 감시는 의심의 목록을 작성해 그들을 차별하고 배제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감시자로 만든다. 이것은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를 흔들고 사회적 차별과 분리를 강화한다.

감시는 여러 가지 이유로 행해진다. 단지 테러나 범죄를 막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권력 남용 막기 위해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으로부터 노동자와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감시는 사회 구성원들의 보호에서 통제에 이르는 연속선 위의 어느 곳에든 위치할 수 있다. 현재 감시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신뢰의 눈빛을 보내야 할 이웃과 이방인에게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면서, 정작 감시를 늦추지 않아야 할 권력에는 무력한 의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한다.

 

랑희 (인권운동공간 ‘활’, 공권력감시대응팀)

 


 

무차별 감시. 지난 2013년 6월,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것은 단지 미 국가안보국(NSA)가 인터넷에 대한 감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근대 국가에서도 범죄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시민들의 프라이버시는 일정하게 합법적으로 제한되어 왔다. 범죄 혐의가 있다면 법원의 영장 하에 사적 공간에 대한 압수수색과 통신의 감청이 허용되어왔다. 하지만 스노든이 폭로한, 현대의 감시 문제는 바로 ‘무차별 감시’라는 점에서 다르다. 구체적인 범죄 혐의가 없어도 단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면 감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슬람 신자라든가, 페이스북을 통해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글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의 타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통과된 테러방지법에 따르면, 범죄혐의가 없어도 국가정보원에 의해 ‘테러위험인물’로 지정될 수 있다.

저인망식 데이터 수집. 이러한 무차별 감시는 특정인을 자의적으로 감시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잠재적인 테러 정보의 수집을 이유로 무고한 시민의 정보들이 마구잡이로 수집된다. 미국가안보국은 통신사를 통해 모든 시민의 통화 기록과 백본망을 흐르는 인터넷 패킷을 무조건 수집하고 보았다. 한국의 수사기관도 구체적인 혐의도, 법원의 영장도 없이 통신사로부터 시민의 가입자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스노든 폭로를 도왔던 저널리스트 글렌 그린월드는 “이러한 정보의 집적이 오히려 테러 예방을 위한 효과적인 정보의 탐지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설사 테러 정보의 탐지에 도움이 되더라도, 우리의 삶의 기록을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수집해도 괜찮은 것일까?

정보원. 영화에서 정보원은 오히려 타깃에 체포를 위해 미끼를 던지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현대 정보사회에서 타깃을 감시하는 것은 전통적인 정보원(프락치) 없이도 가능하다. 식당에서 음식을 사진 찍어올릴 때, 버스 요금을 결제할 때,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를 때, 아니 심지어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넣고 있기만 해도 내 일거수일투족은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인공지능 정보원들은 양심의 가책도 느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무차별 감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면 걱정할 것이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집안에 CCTV를 설치해서 경찰이 모니터링 하도록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집에서 범죄를 모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숨길 게 없으니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어도 상관없다는 사람은, 말할 게 없으니 표현의 자유가 없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에드워드 스노든)

 

오병일 (정보인권연구소 이사)

 


 

아무래도 “테러” 또는 “국가안보” 라는 틀에 맞춰 각국의 정보기관을 찍어내는 공장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니면 정보기관의 사건 조작을 위한 필독 교과서나, 테드 강연 영상 또는 숨겨진 유튜브 강좌 채널이라도 있다든가요. 혹은 어쩌면 각국의 정보기관이 이 영화 <(테)에러>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사건 조작 방법론을 공부해 써먹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국 FBI가 연출하는 “적당한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기!” 와 한국 국가정보원이 연출하는 “적당한 시민을 북한 추종 간첩 어쩌구로 몰아가기!” 가 이렇게까지 닮을 수는 없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FBI 자리에 국정원을 넣고,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종북 간첩이라는 말로 대체하면? 이럴 수가, 불과 작년까지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과 거의 똑같습니다.

본 영화 관람 전 또는 관람 후, 인터넷에 ‘국정원 프락치 공작 사건’을 검색해 그 내용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정보기관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에서 연출되고 만들어지는 가짜 테러 사건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니까요.

25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테)에러

프로그램 노트

닥쳐오는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정보 공개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매일 코로나19 확진자 동선이 낱낱이 공개된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휴대폰 GPS, 카드 결제내역, 주변인의 목격담까지 동원된다. 이번 확진자는 어떤 사람일까? 신상을 추측하고 평가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19보다 동선 공개가 두렵다는 말도 농담만은 아니다.

<(테)에러>는 국가기관이 테러 방지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어떻게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하는지에 대한 영화다. SNS에 어떤 사진을 올리고,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언제 방문하는지 같은 정보들은 자칫 중립적이지만 테러 위험 집단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보면 위험해진다. 어떤 목적으로, 어떤 분류로 사람을 나누어 정보를 수집해 공유하느냐에 따라 정보는 무쓸모하기도 무기가 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무슬림 피감시자는 정보 조합 결과 테러리스트로 ‘만들어졌다’. 확진자 동선 공개는 확진자의 국적/성적지향/종교/직업/삶을 공격할 무기가 되었다. 피감시자의 공포는 영화 속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영화에서 메시지로만 등장하는 FBI의 모습처럼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는 주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공공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숨은 그들을 돕는 조력자는 우리 서로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안전을 위해’ 이태원 클럽 방문자를 성소수자로 짚어 문제화하는 기사를 공유한다. 어떤 대화방에서는 질병보다 바이러스 보유자를 불쑥 지적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맡을지 정하는 것은 지금부터의 행동이다. 정보인권은 누군가에 의해 침해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보를 가지고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정보 공유에 절망만 있다고 하기에는 위험에게서 우리를 구할 구원자도 정보를 타고 온다. 코로나19의 시대, 연대와 연결은 데이터 패킷을 통해 선명해진다. 영화의 화자 샤리프는 FBI 정보원으로 지낸 시기를 이 영화를 통해 공개했다. 감시 체계를 폭로해 서로를 지키는 것도 정보 공유가 아닌가?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은 사람들이 접근 가능하도록 공유하는 것도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가?

도돌이표 같은 고민 속에서도 질문들이 흘러넘친다. 어디까지가 서로의 생존을 위한 정보 공유일까? 반드시 개인 단위 동선 공개만이 전염병 예방에 효과적일까? 어떤 정보를 지키고 어떤 정보를 공유해야 할까? 어떻게 공유해야 모두가 평등하게 안전한 정보를 공유받는가? 전염을 막기 위해서라며 감시 대상자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혐오에 동참하고 있지는 않은가? 감시가 아닌 연결과 연대의 정보 공유는 코로나19 시대에 가능한가? 이 질문들을 놓치지 않고자 한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다희

24프로그램 노트

추천사: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

인권해설

영화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은 유럽 국가들이 코로나19 치료 대응 과정에서 경험해야 했던 ‘의료 붕괴’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영화다.

지난 60여 년 동안 유럽 국가들의 자부심이기도 했던 공공의료 서비스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포섭되면서 ‘비용 절감’ 과 ‘경쟁’ 이라는 효율성에 내몰렸다. 어떤 치료가 필요한가보다 얼마나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사회연대와 평등성에 기반 한 원칙은 배타성과 선택권이라는 시장주의 가치로 변화되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앞에 패퇴한 자본주의 하의 각국 의료제도의 취약성을 마주하고 있다. 코로나19는 구매력 차이에 따른 선택권이 보장되는 감염병이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 논리로 차별당하는 이들이 더 많이 더 자주 감염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뼈아프게 드러나고 있다. 공공의료는 자본주의 사회의 견고한 차별적인 감염 경로 그 마지막을 버티고 서 있는 최후의 보루와 같다. 이 최후 보루마저 OECD 국가 중 최하위에 위치돼 있는 한국에서 영화 <컨베이어 벨트 위의 건강>은 생명을 위한 치료과정을 이윤 추구를 위한 상품 생산 공장으로 바꾸려 하는 이들에게 주는 경고장과 같은 영화다.

 

변혜진(건강과대안 상임연구위원)

23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

프로그램 노트

10년 전, 노르웨이의 의사는 말했다.

“평생 이 일을 하는 동안 환자에게 돈을 내라고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노르웨이는 공공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응급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돈을 내라고 말하는 끔찍한 일도, 경제력이 치료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일도 없었다. 공공의료의 원칙은 ‘치료가 얼마나 필요한가’와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한다’ 두 가지이다. 필요와 평등의 원칙은 절대적으로 효율과 경쟁, 성장 따위의 것들에 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의 공공의료는 자본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점점 시장경제에 포섭되었다. 이탈리아는 전체 의료 중 공공의료의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공공의료예산을 대폭 줄였다. 프랑스의 공공병상은 2017년 시장주의자 대통령 당선 이후 급감하여 2010년부터 총 1만 7,500개의 공공병상이 사라졌다. 무상 의료 시스템을 갖춘 국가로 대표되는 영국 역시 시장경제 논리로 보건의료에 접근한다는 것을 <컨베이어 벨트 위의 건강>은 고발한다. 공공의료를 갖춘 국가에서조차 ‘공공성’의 힘은 약해졌다. 공공의료가 비교적 보편적인 유럽이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국의 공공의료 비율은 매우 낮다. 2017년 기준으로 인구 1천 명당 공공병상은 1.3개뿐이다. 전체 병상 수 중 공공병상의 비율도 10%에 불과하다. 적자를 이유로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결과, 청도 대남병원에서 총 116명의 코로나19 확진자와 7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민간병원은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음압병상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지 않다. 대구의 국가지정 음압병상 수는 10개에 불과하다. 결국 병상이 부족해 집에서 입원을 기다리던 확진자가 사망했다. 의료진 부족으로 코로나19에 긴급 투입된 의료진들은 몇 달 동안 일상 없이 사투 중이다. 허술한 공공의료 시스템으로는 감염병 대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공공의료는 감염병 대응만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현재 의료시스템이 가진 배타성과 취약성을 감염병이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자본에 흔들리는 공공의료, 누군가 배제되는 공공의료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보건의료의 시장화는 환자에게 더 나은 의료에 대한 ‘선택권’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싶은 사실은 ‘아플 때 어디서든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 이지, ‘내가 원하는 날짜, 시간에 원하는 의사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 가 아니다. 보건의료가 시장화되며 도입된 포괄수가제에 의하면, 얼마나 흔한 질병인가, 치료가 얼마나 까다로운가 등을 기준으로 환자의 ‘값어치’가 매겨진다. 정신질환의 치료나 환자에 대한 정서적 지지와 신뢰는 어떻게 수치화될 수 있을까? ‘모든 국민’이었던 의료서비스의 대상자가 ‘질병의 가치에 마땅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좁혀진다. 효율적인 운영으로 적자를 내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병원은 수익성을 우선시하게 된다. 의료서비스는 상품이 되고 환자는 소비자가 된다. 이 상품을 사기 어려워지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질병 점수가 낮은 만성질환자, 치료비를 지불 할 수 없는 사람, 한국 국적이 없는 사람…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치료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병을 감당해야 될 것이다.

치명적인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부실한 공공의료이다. 앞으로 제대로 된 공공의료를 실현해내지 못한다면, 시장화 된 의료체계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재난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연 그땐 지금보다 나은 조건으로 재난에 대처할 수 있을까? 누구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병원이 환영하는 소비자일까? 코로나19 속에서 필요와 평등이라는 공공의료의 원칙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안전한 삶은 치료가 필요한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보장된다. 인간에겐 도요타의 자동차들처럼 가격표를 달 수 없다. 건강은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이 아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요다, 망나

25프로그램 노트

추천사: 문 밖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

인권해설

틴스코이 장애인 수용시설에 살고 있는 거주인들이 묻는다. 왜 자유를 누릴 수 없는지.

가족과 함께 살던 곳을 떠나 수용시설에서 살게 된 이유는 제각각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나은 삶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 꿈은 무참히 짓밟힌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시설 안에서 통제된 삶을 살아간다.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집단생활은 거주인들의 생기를 잃게 한다. 그럼에도 독립적인 삶을 위해 거주인들이 자신의 시민권 회복을 요구하는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탈시설은 선택이 아닌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 권리라는 것을 그들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시설에서의 삶이 모두 비극인 것은 아니다. 울고 웃으며 그 시간을 함께 견딘 친구들을 만난 곳이다. 작별 인사로 끝이 아닌 사이. 삶이 있고 관계가 쌓인 그 시간들을 기억하며 탈시설 이후의 삶 또한 이어지기를 기대하게 된다.

여름(장애여성공감)

25인권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