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노트: 퀸의 뜨개질

프로그램 노트

한나는 ‘춘자’에게 뜨개질을 배우기 시작해 15년간 뜨개질을 하고 있다. 한나에게 뜨개질은 삶의 일부다. 뜨개질로 위로 받고 뜨개질로 세상을 만나며 어른이 되었다. 거기에 ‘여성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건만 세상은 뜨개질을 하는 한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 알고 보니 되게 여성스럽다?” 

처음 춘자가 뜨개질을 알려준 이유가 ‘신부수업’의 일종이기는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여자 한 줄, 남자 한 줄 서라고 할 때마다 위화감을 느끼던 어린 시절의 한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되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한나는, 코바늘계 끝판왕인 ‘만다라 매드니스’를 뜨겠다 다짐하는 어른이 된 한나는 할머니가 가르쳐 준 뜨개질로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창조적인 힘을 탄생시켰다.

한나는 춘자가 선물해준 ‘뜨개질’이라는 자산을 소중히 여기되 여자와 남자의 경계의 둘레를 넘나들며 방 한가득 뜨개 세상을 창조한다. 과거의 기억이 실에 엮어 되살아 날 때마다 상처받은 마음도, 전복하는 마음도, 소심한 마음도, 젠더를 교란하며 다시금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도 되살아 난다. 뜨개질을 하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은 것처럼 한나의 세상도 순탄치만은 않고, 뜨개질에 형형색색의 여러 실이 필요한 것처럼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병립한다. 그러나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나의 정체성을, 교차하고 겹쳐지는 수많은 ‘나’를 우리는 긍정한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24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노트: 귀귀퀴퀴

프로그램 노트

우리는 퀴어다. 그게 너와 내가 같다는 뜻일까? <귀귀퀴퀴>는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시작부터 별별 말이 흘러 나온다. 헤테로는 무엇인가. 팬로맨틱, 팬섹슈얼은 무엇인가. 전애인이 트랜스젠더였다는 사람과 그게 무엇이냐 묻는 질문들. “저렇게 살아야 퀴어인거야?” 우리의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 

퀴어는 간결하지 않다. 동일하지 않다. 너와 나는 다르다. 단일한 “퀴어로움”이란 없다. 내가 욕망하는 섹슈얼리티와 네가 욕망하는 섹슈얼리티는 다르고 내가 살아온 퀴어의 방식과 네가 살아온 퀴어의 방식은 다르다. 여기저기 “판”에서 떠도는 “용어”에 무지한 퀴어도 있고 정형화된 이미지에 반박하는 퀴어도 있다. 동성애자만 퀴어인 줄 아는 퀴어와 퀴어 내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게 되는 퀴어, 거리에 나가 투쟁하는 퀴어가 있다면 인권에 관심이 없는 퀴어도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퀴어’로 통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퀴어’는 끝없이 역동하고 움직이는 관계이자 정치의 동사이기도 하다. 각자 맺어온 관계의 방식과 커뮤니티가 다르고 욕망하는 것이 다르고 되고 싶은 것과 삶의 주요 이슈가 다르다. 우리가 퀴어로 묶여 힘을 모을 수 있으려면 각자의 고유성을 지키며 갈라질 수도 있어야 한다. ‘퀴어’는 하나로 정의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끝없이 확장하고 관계맺기를 위한 장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또다시 질문한다. “그래서, 퀴어는?”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26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노트: 팬텀 패럿

프로그램 노트

비행기에서 내린다. 입국 심사를 받고 나가는 중에 경찰이 당신을 멈춰 세운다. 검문이 필요하단다. 당신의 핸드폰을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한다. 대테러방지법에 의해 당신은 따라야만 한다. 거부하면, 당신은 ‘죄인’이 될 것이다.

황당한 이야기일까? 영국에서 2000년 제정된 대테러방지법의 제7조는 국경에서의 불심 검문을 가능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검문 대상이 가진 기기와 그 안의 정보를 모두 다운로드 할 수 있게 한다. 이를 거부할 경우 체포도 가능하다. 영화의 제목인 ‘팬텀 패럿’은 이 시스템을 일컫는 이름이다.

<팬텀 패럿>에서 라바니는 실제로 핸드폰 비밀번호 제출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된다. 경찰과 정보기관은 라바니에 대한 검문이 ‘무작위’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는 반테러 정책, 무슬림 공동체 범죄화 등으로 내몰린 이들을 지원하는 인권단체의 활동가이다. 그의 핸드폰에는 도움을 청한 이들의 내밀한 정보들이 모두 들어있었다. 국가가 원하는 정보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다.

안전과 보안을 핑계로 우리의 데이터를 탐내는 권력들이 있다. 범죄를 예방한다는 이유로, 수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개인의 모든 정보와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권한이다. 이미 우리의 스마트한 디지털 세계는 우리의 이동 거리, 계단을 오르내린 횟수, 연락과 그 기록 등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러한 위협은 곧 반체제/반정부적 저항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겪어왔다.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31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노트: 홈그라운드

프로그램 노트

퀴어로 숨을 쉬기 위해선 틈을 만들어내는 저항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는 숨 쉴 틈을 내어주는 균열이 되어왔다.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만나야 하고, 가끔은 함께 밥과 술을 나누고, 웃고 울어야 한다. 그렇기에 공간이 필요하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공간, 나의 자리가 있는 공간.

이태원의 ‘레스보스’는 그저 관념적인 공간은 아니다. 그 안에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사람들을 반기는 ‘섬지기’ 명우형이 있다. 그는 매일 가게문을 열고 음식을 준비하고 테이블을 닦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춤을 추고 가게를 치우고 홀로 집에 들어간다. 공간엔 매일 같이 노동과 시간, 돈이 들어가지만 퀴어로서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은 다행히도 ‘레스보스’의 전과 후로 이어지고 있다. 명동의 샤넬다방부터 퀴어 페미니스트 댄스 공간 루땐까지.

명우형은 ‘레스보스’와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 나이 들어간다. 버티고 버틴 발바닥은 아파오고, 가끔은 다 놓고 쉬고 싶어도 ‘레스보스’에 오는 얼굴들을 생각하면 다시 돌아와 있다고 한다.

명우형의 친구가 묻는다. 

“너 아직도 그 생활하니?”

명우형이 답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하나의 공간을 지키는 일은 그리고 살아가는 것은 때로 외롭고 지난하기에, 우리는 저항의 공간에서 웃고 떠들어야 한다. 그곳이 우리의 ‘홈그라운드’가 될 수 있도록.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마주-

25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노트: 파랑 너머

프로그램 노트

저항하다.

트랜스젠더는 존재 그 자체로 성별이분법,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사회에 저항해야한다. 닐은 행동하는 트랜스젠더다. 시민 등록제 반대, 성별 이분법 반대,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위해 맞선다. 닐은 페미니스트다. 전통적인 남성성을 거부한다. 가부장제에 저항한다.

마주하다.

트랜스젠더는 트랜지션 중에 가족과의 갈등에 놓이기 쉽다. 신체의 변화가 눈에 띄기 때문에 숨길 수 없는 탓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의 트랜지션을 부정하려고 한다. 자식이 정상성에서 벗어났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연민한다. 

닐 역시 어머니와 갈등을 겪지만, 소통을 포기하지 않고 마주한다. 든든한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다.

트랜스젠더는 시스젠더가 되고싶은 사람들이 아니다. 젠더를 횡단하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 트랜스젠더여서 시스젠더가 보지 못했던 것,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 이것이 트랜스젠더 프라이드의 자양분이 된다.

닐은 시스젠더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자신이 트랜스젠더로 태어났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간다.

트랜스젠더는 수많은 정체성이 교차하는 존재다. 정체성의 교차 지점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닐은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자신을 찾아간다. 닐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지지하고 연대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퀴어페미니스트로서의 믿음이 있다. 그렇기에 닐은 당당하게 자신을 말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내가 트랜스남성이라서 축복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소하

41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노트: 내 몸이 증거다

프로그램 노트

월경은 나와 내 몸이 처음 마주하기 전부터 터부시된다. 학교에서는 “깔끔하게 생리대 처리하는 법”은 알려줘도 월경 시 겪게 되는 오만 가지 아프고 귀찮은 일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생리대 광고에서는 흰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구름 위를 뛰논다. 피 한 방울 없는 산뜻함이다.

영화에서 짚 듯 생리대 산업은 “불황을 모르는 산업”이다. 월경하는 수많은 몸의 ‘생활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월경하는 여성은 반드시 생리대를 ‘소비’해야 한다. 유해화학물질이 있어도, 그로 인해 몸이 아파도, 이를 발견하고 조사를 요구해도 쉽지 않다. 생리대 제조 기업은 여성소비자를 주요 행위자로 여기지 않고, 국가는 이를 조사할 역량도, 제대로 된 안전 기준도, 피해 발생 시 대책도 없다. 월경하는 몸은 ‘표준’이 된 적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과 얼굴을 가진 피해자”들, 이들과 함께하는 여성환경연대는 “내 몸이 증거다”라고 외치며 맞서 싸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연대하며 지난한 싸움 끝에 잠시 승리가 찾아온다. 영화에서 활동가는 말한다. 모두를 위한 월경권은 월경에서 출발해 모든 존재의 건강권으로 이어진다고.

현재까지도 정부는 생리대 안전성제조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할 무언가를 자본의 논리로 충분한 검증 없이 생산하는 기업은 너무 많다. 지난 봄에는 같은 제조사의 사료를 먹은 고양이 수십 마리가 정체불명의 급성질환으로 사망했지만 납득할 만한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표준’이 아니라서, ‘중요’한 소비자가 아니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몸의 불안과 고통은 삭제된다.

하지만 우리의 몸들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른 몸들을 만나고 연대하며 끊임 없이 저항할 것이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요다

31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My First Funeral

프로그램 노트

레즈비언의 장례식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관을 짜고 조문객을 초대하는 ‘퀴어한’ 장례식을 말이다.

퀴어의 생애는 조용하면서도 격렬하다. 사랑하는 이들과 관계 맺으며 ‘나’를 정체화하고 나로서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은 가부장제와 이성애중심주의, 성별이분법에서 멀찍이 떨어져있다. 그리고 그 끝, 삶의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는 나의 죽음 앞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존엄한 죽음과 온전한 애도의 권리. 이건 분명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일 것이다.

레즈비언의, 그리고 ‘정상’의 주변부로 밀려났거나 ‘정상’의 경계를 거부하는 모두의 장례식을 상상해 본다. 지금까지 경험해온 장례식은 고인의 삶을 이성애 규범으로, 가부장적 사고로 납작하게 만들어왔다. 장례의 공간에서 ‘여자’와 ‘남자’의 자리는 명확히 다르다. “법적 제도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옆에 있을 지위와 권한”을 가진 남성이 상주가 된다. 내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의 애도를 온전히 받을 수 없고, 이들은 나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수 없다.

퀴어의 고유한 삶을 탈락시키고 애도의 권리마저 앗아가는 사회에서 <My First Funeral>이 기획하는 레즈비언 장례식은 퀴어/여성으로서 애도의 권리를 쟁취하는 퀴어페미니즘적 실험이다. 영화에서 ‘은혜’가 준비하는 레즈비언 장례식은 내가 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 삶이 기억되는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고 친구와 동료, 가족이 온전하고 안전하고 애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하는 나의 첫 번째 장례식. 마땅히 모든 이의 첫번째 장례식이 존엄할 수 있기를,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애도의 권리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33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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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휠체어를 탄 활동가가 지하철에 오르며 말한다. 이동권은 지역 사회를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시민의 권리 중 하나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20년을 넘게 외쳐도 얻을 수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에서 보듯 이들은 굴하지 않고 “시민 여러분께” 우리도 시민임을 선언한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 일으키는 소란한 균열이 더 평등한 세상을 위한 확장의 기반이 되도록, 계속 두드리고 소리친다.

지금의 지하철은 누구를 태우는가? 누구를 태우지 않고 문을 닫아버리는가? 국가 운영 예산이 상정하는 국민에는 누가 배제되어있는가? 오랜 장애 차별의 역사는 비장애인의 몸을 표준으로 놓고 부당하고 차별적인 ‘시민 됨’의 기준을 만들었다. 장애인을 시혜와 배려의 대상으로만 보는 복지 정책과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구조는 장애인을 누군가의 배려와 희생으로 살아가는 수동적 존재로 만든다.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장애인의 ‘시민 됨’이라는 듯이 말이다.

차별과 배제는 자꾸만 누군가는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장애인, 성소수자, 난민, 이주민 그 누구든 안전한 집에서 먹고 자고, 자신의 속도로 노동을 하고, 이웃과 관계 맺고, 필요한 돌봄을 주고받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며 자신의 삶을 일굴 수 있어야 한다. 시혜와 동정의 봉사가 아니라 권리와 자기 선택으로 향하는 변화가 지금 필요하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미나상, 나기

27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사랑하니까 가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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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2019년 5월, 대만의 동성혼을 가능하게 하는 민법 개정안 표결을 1분 앞둔 순간에서 시작된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무지개를 두른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영화는 2016년 11월로 돌아가서, 혼인평등을 향한 3년의 싸움과 함께 세 부부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어린 딸 알리를 함께 키우는 조비와 민디, 30년을 넘게 함께한 노부부 티엔밍과 샹, 마카오에서 대만으로 이주하여 삶을 꾸리는 구와 그의 파트너 신이치. 이들은 사랑하고, 노동하며, 서로를 돌본다. 다가올 혼인평등의 순간을 기대하며 행동한다.

한편 이들은 위험하고 절박한 상황을 보다 자주 상상하고 맞닥뜨린다. “내가 죽는 날,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가야 한다면, 그런데 법은 내 가족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비의 말처럼, 국가가 이들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불안한 일상은 문득문득 떠오를 수밖에 없다. 모두가 혼인을 바라는 것도,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구는 혼인이 가능하고 누구는 그렇지 않을 때, 혼인을 한 이성부부에게만 법적 보호자, 양육자, 상속자의 자격이 주어질 때, 그것은 차별이다. 평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에 관계 없이 모두에게 있다.

법안이 통과된 순간,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고 한다. 대만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혼이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구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신이치와의 혼인신고를 진행할 수 없었듯, 남은 숙제는 많다. 시민의 자격이,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누군가에게만 주어지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른다. 나 자신으로 존엄하게, 동료시민으로 평등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차별에 맞서고 ‘나중’을 거부한다. 영화처럼, 비는 곧 그칠 테니까.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25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신원미상자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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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원미상자의 이름>의 신원 확인 시범 프로젝트 팀은 시신의 갈비뼈에서, 머리카락에서, 문신에서, 작은 흔적 하나 놓치지 않고 망자의 삶을 돌이킨다. 실종자 목록의 이름, 사진, 수술 기록, 건강 정보 등 단서가 될 만한 정보를 찾아 시신과 맞추어본다.

한편으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이들과 찾을 엄두조차 못 내는 이들이 있다. 또는 애타게 찾아 헤매도, 오래 전 끊어진 관계의 끈을 다시 잇기 어려운 상황도 있다. 이주로, 빈곤으로, 성노동으로, 탈가정으로 안정적인 관계망을 구축하기 어려웠거나, 법률과 제도로 증명되는 흔적을 남기기 어려웠을 이들. 누군가는 더 쉽게 ‘무연고자’가, ‘신원미상자’가 된다.

크리스티나는 “특히 유럽 공동묘지에 무명으로 묻힌 수천 구의 이주민”을 언급하며, “사망자와 그 가족의 존엄성 존중은 법에서 보장하는 권리”라고 말한다. 망자와 유가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유럽의 책임이지만, 구조적 차원의 개입은 없어왔다고 짚는다.

존엄한 삶은 죽음 앞에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충분한 애도로, 남은 이들의 기억으로 완성된다. 그렇기에 애도와 기억은 어떤 추상의 개념이 아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권리와 존중이 비어있는 자리에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하고, 대화하며, 행동해야 하는, 살아 움직이는 가치다. 이는 망자만의 일도, 유족만의 일도 아니다. 누가 그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영화의 말미에서 말하듯, “이는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29프로그램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