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당사자다-한국의 성문화를 바라보는 시선 여성에 대한 젠더 폭력이 심해지고 있다. 아니 적어도 ‘심해지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전자발찌나 화학적 거세 등 고강도 정책이 도입되어도 안전에 대해 일반 여성시민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여성 대통령이 약속한 4대 악 근절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성폭력과 학교폭력, 가정파괴범죄. 이 세 폭력이 분리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성폭력이란 약자에게 가해지는 권력과시용 폭력이 성애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이없어 벌어진 입 다물 틈도 없이 터져 나오는 공직자들의 성 관련 추행들을 보며 역시 정책(약속)을 가장 빨리 잊어버리고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정책을 ‘상품’으로 고안하고 파는 정치인들임을 확인한다. 그 약속이 성/폭력에 관한 것일 경우 망각이 폭력적으로 빠르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까. 성폭력은 약자에 대한 권력과시 현장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약자는 여성이거나 (여성 중에서도 나이 어린 여성이나 장애 여성이 더 약자라 더 빈번히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부하거나 (군대), 적이거나 (갈등 지역), 원생이거나 (보육원) 등등 계속 나열될 수 있다. 생물학적 성이 여성이냐 남성이냐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 폭력의 대상은 늘 여성화되기 때문이다. 성애화된 폭력에 끊임없이 자양분을 대주고 있는 권력과시욕은 자기 오인의 이면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기혐오나 불안, 훼손된 자존감이 주는 쓰라림을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떨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중독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거의 쓰나미 수준으로 덮치고 있는 각종 성관련 추문들과 추행들은 신자유주의 위험사회의 불안과 경쟁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생의 의미, 그리고 지속적인 관계의 불가능성이 어떤 방식으로 젠더화된 폭력을 증폭시키는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물론 이것은 여전히 강고한 가부장제를 배경으로 한 일들이다. 어떤 왜곡된 자아를 길러내는가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그것의 결과인 자기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야말로 가부장제 유산 상속자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적어도 관계에 뿌리내린 의미 있는 공존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가부장제에 기생해 위협받는 자존감을 보상받으려는 남성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일베의 여성혐오를 보라), 같잖은 자본과 지위가 부추긴 자기오인과 오만에 힘입어 자기가 하는 모든 잘못된 입놀림과 손놀림, 몸놀림을 타인에 대한 ‘위로’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 일그러진 성문화. 자본주의와 군사문화, 가부장제의 담합 속에서 잘못된 길로 계속 내달린 한국 사회 성문화를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제, 그만! 나는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겠어!’ 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특히 남성시민들의 모임은 언제 구성될 것인가. 문정현 감독의 <가면놀이>는 이 일그러진 성문화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잘못된 성문화의 피해자들, 즉 성폭력 당사자들과 그 어머니들의 ‘말 못하는 고통’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 ‘일그러진 성문화 재생산자들’의 자기방기적 뻔뻔함과 함께 화면을 이어간다. 여기 수치심을 껴안고 자기혐오의 침묵 속에서 차갑게 응고되는 사람들이 있다. 상처나 고통조차도 자신의 경험으로 품을 수 없어서 가면놀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성폭력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 성문화의 맨얼굴이다. 하긴 메이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창피하다고, 문제라고 생각한 적도 없으니 맨얼굴이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겠다. 성폭력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당사자다. 우리 모두 연루되어 있다. 잠재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가해와 피해라는 말이 너무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면 ‘편안하고 안온한 관계’, ‘상대방의 개별적 특성을 구체적으로 마음 쓰는 관계’의 가능 혹은 불가능이라는 말은 어떤가? 우리 모두 언제부턴가 이런 관계는 자본이 매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가면놀이>를 보며 당사자성을 환기하자, 그 심정으로 일상의 성문화 조금이라도, 그래 조금이라도 바꾸자. 김영옥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해설: 마이 플레이스
인권해설
캐나다에서 프로그래머였던 두 사람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을 때 엄마는 자신의 민주화운동 이력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한국의 가족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공고를 나온 아빠는 지연, 학연도 없는 자신이 한국에 돌아가면 출세할 수 없을 것 같아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아들 문칠은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장에 다녔다. 하지만 그 길을 벗어나 불안정한 영화인이 되고부터는 불안했다. 딸 문숙은 문칠과 달리 한국 사회에 자신을 맞추는 건 죽을 만큼 힘들었다. 스무 살에 캐나다로 갔다. 아이를 가지고 싶었고, 임신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아빠, 문숙과 문칠을 우리는 민주화운동가, 고졸 남성 노동자, 불안정 영화인, 비혼모로만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한 가지 정체성에만 집중해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문숙은 유학생이기도 하고, 문칠은 명문대학생이기도 했다.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어떤 장소와 삶의 맥락에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리고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반차별운동은 ‘차별은 삶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해, 차별은 사건이 아닌 이야기야’라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문숙과 문칠, 아빠와 엄마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비혼모, 불안정 노동자여서가 아닌 그 사람의 생애를 보아야 한다. 문칠은 말한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해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했다기보다 자신을 숨기는 걸 잘했던 것 같다고. 비슷한 상황에 있던 문숙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게 죽기보다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우리는 차별을 경험하는 많은 사람이 취하는 전략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모든 차별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대응한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싸워야 할 땐 싸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싸움의 자리에 혼자 놓여 있을 땐 쉽게 싸움을 시작할 수 없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다투었지만, 서로가 경험한 시간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 사실이 위로가 된다”는 문칠의 독백은 그들이 함께 싸울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말해 준다. 이들은 서로의 닮은 구석에서 세상에 대해 같이 싸울 수 있는 힘들을 만들었다. 연대의 언어다. 연대는 서로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같이 싸워 나갈 수 있는 힘을 만든다. 이것은 네 사람이 생물학적 가족이어서가 아니다. 비록비혼모인 딸을 부끄러워했지만 아빠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비혼모단체에서 일했을 거라는 아빠의 말처럼 이들이 서로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들에게 찾아올 이야기들이 평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길에서 때로 서로 상처를 받기도, 상처를 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문숙, 문칠, 아빠, 엄마가 함께 경험한 공감의 언어는 이들의 연대가 쉽게 깨어지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앞으로 이들이 살아갈 이야기가 기대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반차별운동’이 만나고 싶은 이야기들이 또 한 번 찾아오길 기다리겠다. 이훈창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인권해설: 아무 데도 없는 아이들
인권해설
노르웨이. 흔히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북유럽의 작은 나라.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는 ‘모범적인’ 모습을 갖춘 나라. 하지만 2011년 7월,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한 극우주의자의 테러 행위로 세계를 놀라게 한 나라. ‘두 얼굴’을 가진 이 나라가 영화 속에 등장한다. 평화와 인권을 사랑하는 노르웨이만을 생각하며 그곳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에게 실망과 배신감은 더 컸으리라. 2011년, 18세 이상의 난민들을 돌려보내는 정책은 결국 없어졌다. 하지만 이 해에 벌어진 끔직한 테러사건은 아마도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통해 다문화 사회로 개방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일이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조금 놀라울 뿐, 이 영화 속의 내용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것이다. ‘글로벌 시대’를 주창하는 많은 정부와 기업은 지구의 하나됨이 자신들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올지만 생각한다. 자신들이 져야 하는 책임은 외면한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일할 기회를 탐색하면서도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국에 온 이주민들에게는 색안경을 끼고 본다. 누군가 말했듯이,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노동자가 왔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 어디 있겠나. 이는 모든 상황에 나를 대신 끼워 넣으면 쉽게 이해가 간다. 내가 만약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착한 곳에서 ‘당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다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증거가 없다고 입국을 못하게 하고 바로 비행기를 태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보낸다면. 한 달 내내 쉬지 못하고 일했는데 몇 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한다면. 월급을 달라고 얘기했다고 사장에게 욕을 먹고 내쫓긴다면. 좋은 직장에서 일하게 해 주겠다고 해서 간 곳이 농사를 짓는 곳이라면. 사장에게 구타를 당해 도와 달라고 찾아간 공무원이 그냥 참으라고 한다면. 내가 사는 동네가 이주자가 많다는 이유로 범죄 지역으로 분류되고 그곳에 산다는 것만으로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면. 갑작스런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세계가 뒤숭숭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치 앞도 알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죽는 날까지 평화로운 삶을 장담할 수 없다.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주려 하기보다는 함께하라는 말, 연대 정신이 떠오르는 영화이다. 김희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전사무국장)
인권해설: 탐욕의 제국
인권해설
우리, 일상을 얘기해요.
반올림 활동가 : 오랜만에 만나 반가우셔서 농담 주고받으시는데, 어머님, 아버님, 지금 곧 기자회견 시작이에요. 자자, 표정 관리 하셔요~
7년이나 오래 버텨온 힘이 이거였을까. 웃고 농담하고 안부를 묻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서늘한 집회나 기자회견장에서 만나야 하는 우리에게 “밥은 챙겨먹고 다녀요? 대충~ 아이는 몇 학년 이예요? 1학년, 우리 딸 영어 요즘 영어 배운다고 난리네~ 딸 결혼식이 언제라고? 꽃 피고 좋네~” 이런 일상을 나누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민숙언니(박민숙,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3라인 7년 근무, 유방암)도 분명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깔깔거리며 즐거워했을 꺼다.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설렘에 누구 못지않게 한껏 멋을 부렸었을 꺼다. 혜경 씨(한혜경, 뇌종양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 6년 근무, 뇌종양)도 예전 사진을 보면 제법 통통하고 발랄했더라. 지금도 노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고, 웃음이 많고, 신나면 휠체어에서 몸을 들썩이며 춤을 추는데… 윤정 씨(이윤정,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6년 근무, 뇌종양)도 몸이 ‘팅팅’ 부어서도 “남들 가본 데, 청계천, 인사동 가자”며 성화였단다.
창호 씨(송창호, 삼성 삼성반도체 온양공장는 6년 근무, 악성림프종)는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진 아빠 모습에 낯설어하던 아들이 가장 슬펐다고 한다. 희수 씨는 “고 이윤정 씨의 남편 정희수 씨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민숙 씨는 동료 소식을 ”누가 무슨 병이래, 죽었대” 라고 전해 듣고. 삼성으로부터 사과, 보상, 재방방지대책 마련을 약속 받는 것 말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일상성의 복원이 아닐지. <탐욕의 제국> 홍리경 감독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던 이들의 꿈이 먼지처럼 사라진 세상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반올림과 반올림을 응원하는 이들이 해야 할 것은, 클린룸에 들어선 뒤 달라진 그들의 삶, 사라진 일상을 복원해가는 일이 아닐까. 사라져간 안타까운 생명과 건강 그리고 더 이상 죽어서는 안 되는 이들을 챙기면서도 남은 자들의 일상과 행복도 하나씩 나누는 것, 사소해 보이지만 소중한 일상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세상이 되어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권영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
인권해설: 밀양, 반가운 손님
인권해설
무언가를 해야 했다. 밀양 송전탑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덜컥 내려앉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잔인한 국가폭력과의 싸움에 대표선수로 내몰린 밀양 주민들과 함께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길을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잘 전해지지 않는 밀양의 목소리를 담아보자는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국가폭력의 희생양 혹은 전사로 이분화 된 시선 밑에 감춰진 밀양 주민들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삶과 일상을 기록해보자는 ‘밀양 구술프로젝트’는 함께 살아내기 위해 무언가 해야 했던 절절한 마음들이 모여 2013년 12월에 시작됐다.
서울, 울산, 광주, 충북 등지에서 모여든 인권활동가, 기록노동자, 여성학자 등이 겨울 내 밀양으로 인터뷰를 떠났다. 구술기록을 아카이브로 남겼으면 좋겠다는 요청에 미디어 활동가들이 아무 조건 없이 시간과 열정을 보탰다. 오백만원이 훌쩍 넘었던 교통비와 진행비는 작은 보탬이라도 되면 좋겠다며 사람들이 소셜펀치, 개인후원, 모금 등을 통해 십시일반 모아준 돈을 통해 충당됐다. 그리고 4월 말, 이 간절한 마음이 모여 <밀양을 살다: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오월의 봄)이 출간됐다.
책의 원고가 하나둘 쌓여갈 동안 영화 <밀양, 반가운 손님>도 제작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아카이브 기록을 돕기 위해 결합했던 미디어 활동가들이 밀양 주민들의 일상을 독자적인 영상에 담기 시작한 것. 이들이 구술프로젝트팀과 만난 밀양은 언론보도를 통해, 희망버스를 통해 접했던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밀양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난 할매들은 박복한 팔자에 순응하기보단 척박한 농토를 일궈왔던 농부였고, 때로는 아내였고, 엄마였고, 며느리였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고유한 세계와 삶을 일궈왔던 여성이었다.
하여 6편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영상에는 한국 현대사와 함께 흘러온 삶들과 결코 하나의 이야기로 갈음될 수 없는 밀양송전탑 반대 투쟁의 이유들이 담겼다. 살아내기조차 벅찼던 시절, 차근차근 욕보고 살아온 일상과 소위 재산권이라 왜곡되는 땅 한 마지기가 어떻게 불려져 왔는지를 기록하며, 국책사업이란 미명 하에 진행되는 송전탑 공사가 어떻게 그네들의 일상을 파괴하는지를 담아낸다. 하기에 구덩이를 파고, 목을 매달 밧줄을 늘어뜨리고, 제 몸뚱이를 죽음으로 한발자국 밀어 넣는 건 밀양 주민들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그만큼 심각한 국가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에 대한 고발이며, 망각과 부인이 만연화된 우리 사회에 보내는 타전이다.
<밀양을 살다>와 <밀양, 반가운 손님>은 말한다. 당신의 삶처럼 밀양 주민들의 삶도 계속되어야하기에 함께 밀양을 살아내자고. 이제 망각이 아닌 기억으로, 침묵이 아닌 마주함으로 그리고 함께 걸음으로 그 절박한 호소에 응답해야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해설: 위 약관에 동의합니다
인권해설
오늘도 20만 건. 매일매일 개인정보 유출 소식이 쏟아진다. 그러나 연초 카드사에서 벌어진 1억 400만 건 유출 기록이 경신되면 모를까, 이제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 개인정보 유출 소식을 듣고 당신은 어떠하셨는가. “보이스피싱, 걸려 오기만 해봐라” 개그프로에서 본 것 같은 어수룩한 사기꾼들에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하시거나, “어차피 다 유출된 거, 뭐 어때?” 시니컬하고 쿨하게 넘어가시거나. 어느 쪽도 개인이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되는 문제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목해서 봐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왜 요새 개인정보 유출이 기승을 부릴까? 누군가 탐을 내기 때문이다. 해커이건 내부자건 그 정보들을 훔쳐내면 기꺼이 사줄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번성해 있다는 개인정보 암시장에서 그들은 왜 당신의 개인정보를 돈 주고 사갈까? 사기를 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개인정보를 노리는 이들이 불법 시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당신의 클릭을 기다리는 수많은 이용약관들이 모두 당신에게서 개인정보를 가져가겠노라는 내용들이다. 그들은 왜?
단언컨대, 당신을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들이 옛날 군주나 군인 독재자처럼 당신을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소비의 늪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당신의 출신, 사회관계, 취향, 당신의 무엇이건 그들은 필요하다. 그 정보의 숲에서 당신이 이 물건을 사야 할 필요를 맞춤하게 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처럼 우리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회사들은 이 정보들을 다른 이들에게 넘기기도 한다. 개인정보 합법시장의 등장이다.
당신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당신 자신보다 더 많이 당신을 알고 있는 이들의 등장은 정보 인권에 위협적이다. 당신의 개인정보에 대한 결정권이 당신에게보다 권력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은 시장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법과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당신이 무얼 생각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국가 권력 또한 그 정보가 필요하다. 물론 그들은 예전부터 당신을 알기 원했으나 인적 감시로는 한계가 있었다. 빅데이터 시대 감시는 촘촘한 기술이 대신해 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의 사소한 좋아요 하나도 열렬하게 수집하는 것이다.
아직도 감시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떳떳하면 감수해도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감시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당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원하는 이들이 당신에 대한 개인정보를 촘촘하게 수집하는 상황을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감시에 반대하는 이유는 숨길 것이 많아서가 아니다.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영화는 스노든의 폭로 이전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간첩 혐의를 쓰고 러시아에 망명 중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지난 해 6월 미 국가안보국이 전 세계 인터넷과 통신망을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전에,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이 영화는 낌새를 알아챘다. 감독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믿고 볼 만 하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인권해설: 슬기로운 해법
인권해설
2013년 9월 6일 <조선일보> 1면 보도는 한국 언론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검찰총장이 혼외자식을 두었다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은 솔직히 많은 수의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채동욱 검찰총장은 <조선일보>의 주장대로 법으로 보장된 검찰총장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누구도 검찰총장의 ‘진짜’ 사퇴 이유가 혼외자 의혹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는> 매우 정치적인 ‘진짜’ 이유를 가진 권력 핵심부를 대신해 매우 사적인 혼외자 문제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기어이 검찰총장을 물러나게 만드는 과정을 보면, 우리사회에서 소위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언론 집단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권력 핵심부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쓴 것으로 보이는 이 보도는 지난달 한국신문협회가 주는 ‘2014년 한국신문상’을 받았습니다. 이 심사를 맡았던 문창극 심사위원장은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을 보도하려 할 때 필요한 덕목은 무엇보다 용기다. <조선일보> 편집국은 그런 용기를 보여줬다”라고 극찬했습니다. 문창극 씨는 <중앙일보> 출신입니다. ‘조중동’이 서로의 권위를 상호 유지시켜주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인 셈입니다.
언론을 권력의 제4부라고 합니다. 행정, 입법, 사법부를 감시하는 기능을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언론이 ‘권력자의 탈선된 사생활’이 아니라 ‘권력의 탈선’ 자체도 얼마나 용기를 갖고 보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특히 ‘조중동’에 대해선 더 그러할 것입니다. 채동욱 혼외자 보도를 촉발시킨 ‘진짜 이유’인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이들은 사실상 침묵했습니다.
언론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가. 정치권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삼성으로 대표되는 자본의 집중 현상이 갈수록 가속화되는 한국 사회이기에 더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혹자는 SNS와 같은 기술의 진보를 바탕으로 ‘대안’ 내지는 ‘희망’을 얘기하기도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전홍기혜(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 편집국장)
인권해설: 질문
인권해설
몇 년 전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차를 세우고 불심검문을 하겠다며 협조해달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투는 (늘 그래왔겠지만)매뉴얼을 읽는 자동응답기 같았다. 나는 당신이 소속과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무엇 때문에 불심검문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으며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으니 거부하겠다고 했다. 젊은 경찰은 (이런 경험은 처음인 듯한)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법을 잘 알고 있다며 또박또박 자신의 신분과 불심검문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인근에 사건이 있었다는 대답만으로는 왜 내 운전면허증을 보여줘야 하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거부하겠다고 밝혔고 거부할 권리가 내게 있음을 경찰로부터 확인받았다. 그런데 경찰은 내가 거부할 권리는 있지만, 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으면 나를 보낼 수가 없다고 한다. 결국, 도로 가장자리로 차를 세우고 경찰과 실랑이를 했지만 똑같은 말만 반복될 뿐이었다. ‘거부할 권리’는 있는데 신분증을 보여줘야만 통행할 수 있다는 것이 ‘권리’인 것일까?
경찰은 범죄예방, 수사 등을 이유로 언제든지 개인의 신분과 정보를 확인하고, 추적하고, 수집할 수 있다. 이런 행위는 경찰의 공무집행이며 안전을 위한 조치이므로 ‘협조’할 것을 요구한다.(‘협조’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뿐만 아니라, 법원의 영장이나 제도적, 사회적 동의를 포함한다) 경찰이 요구하는 ‘협조’는 표현이 협조이나 실제 의미는 ‘거부할 수 없음’ 또는 ‘거부하면 더욱 의심만 받게 됨’이다. ‘네가 떳떳하면 밝히지 못할 것이 없다’는 태도는 경찰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런 논리에 합의해왔고 이는 결국 나의 신분과 개인정보는 내가 ‘범죄자가 아님’을, 내가 ‘위험한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해명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지게 했다. 그리고 신분 밝히기를 거부하는 자, 신분이 불분명한 자는 의심받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고, 의심스러운 사람들로부터 안전을 획득하기 위해 신분을 확인하고 감시하는 제도와 장치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제도와 장치 때문에 우리는 정말 안전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주민등록증제도가 없어지면, CCTV가 없으면,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지 않으면 사회는 범죄의 소굴이 되는 것일까? 신분증 제도와 개인정보 수집은 사회 안전이 유지된다는 시민의 안심 이전에 국민의 일상까지도 통제가 가능하다는 국가권력의 안심이 아닐까?
얼마 전 추락한 무인기와 관련하여 군 당국의 ‘무인기에서 발견된 지문을 국내 등록된 지문과 비교해 봤더니 일치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것이다.’라는 수사결과는 신분등록제도의 위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등록되지 않은 자,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자는 언제든지 안전의 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랑희(인권단체연석회의 공권력감시대응팀)
인권해설: 대한문을 지켜라
인권해설
“우리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말을 건네는 그는 구사대였다.
2009년 여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점거파업이 두 달을 넘기도록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폭염이 계속되었다. 공권력과 무장한 경비용역 그리고 구사대에 의한 폭력이 이어졌고, 식량, 식수, 전기, 의료진 차단과 함께 노동자들의 고립이 길어져만 갔다. 식량과 생필품 반입을 요구하며 공장출입구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대고 매일 밀고 당기던 그때, 그가 진심을 의심할 수 없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가슴이 덜컹했지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서 비키세요! 소리치곤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 후 한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평택으로 가서 그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해하고 싶진 않지만, 당신의 고통을 쏘아붙이며 외면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게 동료를 버린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으며 고개 숙이다 그 시간을 버티기 위해 오히려 단단히 악을 쓰는 것으로 변해가는 구사대, 인간 밑바닥을 보는 것인가 절망을 줬던 그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로 신호를 줬던 그에 대한 나의 예의라 생각했나보다. 그게, 그렇게 내몰리면 그리 저지를지도 모를, 비참해지고 싶지 않은 우리를 위해 자신에게 거는 사람됨의 약속이자 용서.
“용서는 없다”
그 지옥 같던 여름을 길게 늘인 듯 몇 계절을 보낸 대한문의 어느 날, 분노한 사람들이 내건 말이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아이히만을 보았다. 그가 국가라는 이름을 걸고 저지르는 폭력과 멸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권리를 찾고자 하면 그와 동시에 ‘권리를 찾을 권리 없음’ 선언을 하는 국가에게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이 대한문에 멈춰 섰다. 그리고 함께 하고파 찾아드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아이히만은 권리를 제한 할 수 있는 예외법조문을 구석구석 찾아와 읊조리며 추모와 애도의 시간과 장소를, 공존의 목소리를, 노래를, 몸짓을, 연대를, 사람됨의 선언을, 크고 작게 필요한 일상까지도 철저히 틀어막았다.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권 등 권리의 목록은 왜냐는 질문과 함께 결코 허용되지 않았고, 어이없고 간교한 폭력이 반복되었다. 힘껏 싸울수록 폭력의 강도는 높아져만 갔다. 가장 참담한 것은 누구든 그 공간에 뜻을 함께하는 순간 그는 시민이 아닌 이, 존재와 뗄 수 없는 권리를 박탈당한 이, 그렇게 취급해도 되는 이가 되어버리는 모멸감이었다. 그런 취급을 하는 국가와 임무라 하며 그 뜻을 수행하는 이들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야한다는 공포와 함께.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만으로, 보편적인 권리,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서로에게 약속하고 인정하는 권리가 인권이라 했던가. 그 약속의 결정체를 자처하는 국가와 이를 수행하는 이가 우리의 온전함을 침해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국가범죄. 국제인권법 그리고 국제 선언과 원칙들이 평화를 해치고 전쟁을 비롯한 반인도적인 범죄와 그 수행에 연관된 행위도 범죄라 정하고 있다. 이는 좀 더 나은 삶을 위하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기반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다.
‘대한문을 지켜라’가 아이히만이 지니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인권을 구석구석 만들어가야 할 우리가 쏘아올린 저항의 신호이지 않았을까.
기선 인권운동공간 활 상임활동가
인권해설: 뉴 블랙
인권해설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남성 대통령이었다. 바야흐로 흑인이 합중국 최고통수권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흑인 커뮤니티는 더 이상 미국 사회의 마이너리티가 아니게 된 것 같았다. 정치영역에서의 과소 대표로 인한 사회적 비가시화도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미국 흑인의 역사에서 그만한 승리의 순간이 있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흑인 커뮤니티 전부가 마냥 t기뻐하기만 할 수는 없는 사정이 존재했다. 오바마가 당선된 바로 그날,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동성 결혼의 제도화를 무마시키는 주민발의안 8 (Proposition 8)이 주민 총투표로 통과됐다. 그리고 새로운 전선이 그어졌다. 흑인과 백인 사이도 여성과 남성 사이도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도 아니었다. 동성혼 법제화 운동 진영과 흑인 커뮤니티 사이의 전선이었다. 동성애자 권리 운동 진영은 버락 오바마의 당선을 전방위적으로 도왔는데 흑인 커뮤니티는 주민발의안 8의 통과를 막는데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흑인 커뮤니티는 한꺼번에 호모포비아 집단으로 환원되었다. 졸지에 동성애자 운동의 적이 되었다. 인종주의 철폐를 통한 보편적 권리를 요구하며 시민권 운동의 중심축으로 활약하고 대통령을 배출할 정도로 탄탄히 정치적 역량을 길러온 흑인 커뮤니티가, 보수적 가족 제도 최후의 보루로 순식간에 상징화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요루바 리첸의 <뉴 블랙>은 바로 그와 같은 새로운 적대의 장 속에서 태어난 다큐멘터리이다. 흑인 커뮤니티 안에도 당연히 많은 성소수자 당사자들, 동성혼 법제화 운동 활동가들, 그리고 이들의 지지자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주민발의안 8 통과의 배경으로 흑인 커뮤니티의 집단적 호모포비아를 지목하는 자들이 보이는 의혹과 실망과 불신의 시선에 당황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동시에 흑인 커뮤니티 내부에서 동성혼 법제화라는 의제를 본격적으로 공론화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흑인 커뮤니티는 균질하고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다. 일각에서 공격하는 것처럼 단순한 호모포비아 집단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든 억압과 차별의 문제에 빠짐없이 급진적인 집단도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동성혼 법제화 운동 진영이 흑인 커뮤니티를 원망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파 보수 기독교계가 호모포비아를 매개로 인종 간 연대를 모색하는 기묘하게 뒤틀린 정치 지형 속에서 <뉴 블랙>은 2012년의 메릴랜드 주(2010년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가장 큰 도시인 볼티모어의 흑인 인구 비율이 63.7%로 미국의 도시들 중 다섯 번째로 그 비중이 높음)를 찾는다. 그해 2월 메릴랜드 주 의회는 동성결혼보호법(Civil wMarriage Protection Act)을 통과시켰다. 이에 즉각 보수적인 성향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 세력이 형성되었고 11월 대통령 선거일에 맞춰 해당 법에 대한 찬반을 다투는 메릴랜드 주 주민 총투표가 잡힌다.
다큐멘터리는 총투표를 앞둔 메릴랜드 주의 흑인 커뮤니티가 법제화에 대한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으로 나뉘어 열띠게 겨루어 나가는 모습을 담았다. 흑인 커뮤니티가 흑인 가족, 흑인 교회, 흑인 공동체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탐색하는 면면을 고루 보여준다.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의 입장을 교차시켜 나가며 흑인 커뮤니티 내부의 입장 차들을 펼쳐 놓는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흑인(뉴 블랙)” 공동체란 흑인들 가운데 엄연히 존재하는 동성애자들과 동성 커플 가족들을 부정하고 지움으로써가 아니라 이들을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이들과 더불어 구성해 나가야 하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동성애자 및 동성 커플 가족에 대한 인정과 지지가 흑인 커뮤니티를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 강화하는 길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11월 오바마는 재선되고 메릴랜드 주의 동성결혼보호법은 과반의 표를 얻어 비로소 발효가 확정된다. <새로운 흑인>은 오바마가 그의 두 번째 취임 연설에서 동성애자의 권리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을 보여주며 끝난다. 연임에 성공한 흑인 대통령의 동성애자 권리 지지 발언은 그 장면을 목격하는 무수한 이들에게 취임식의 하이라이트로 각인됐다. 하지만 대통령이 흑인이라고, 바로 그가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한다고 미국 사회 전체가 문득 인종주의와 호모포비아를 말끔히 넘어 서지는 않는다. 결혼 평등의 법제화 역시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전부가 아니며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지형이 다양한 성소수자들의 사정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차별과 빈곤과 범죄화의 악순환 속에서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성소수자들은 여전히 집이 없고 부당하게 구금되며 일터에서 쫓겨난다. 그래서 “새로운 흑인”에 대한 고민은 <뉴 블랙>이 다루는 바들을 넘어 계속될 수밖에 없다.
2013년 6월 26일 연방대법원은 동성혼 법제화를 가로막는 주민발의안 8과 결혼보호법 (DOMA: Defense of Marriage Act)의 위헌성을 확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시민권 확장에 유의미한 진전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같은 연방대법원이 하루 전날 내린 판결은 완전히 딴판이다. 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핵심적 성과 중 하나인 투표권리법(Voting Rights Act)의 주요 조항(인종차별이 심했던 남부 지역 일부 주에서 선거법을 개정하고자 할 경우 연방정부의 승인을 반드시 얻도록 한 조항)에 위헌성이 있다고 확정지은 것이다. 이는 인종을 차별 금지 범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인종에 대한 중립적 인식이라고 보는 포스트-인종주의적 경향의 반영으로 여전히 인종주의가 팽배한 미국 사회에서 그 자체로 인종주의적인 판결에 다름 아니다. 동시대를 관통하는 이 두 가지 판결 내용을 배경으로 흑인 커뮤니티, 성소수자 커뮤니티, 흑인-성소수자 커뮤니티는 어떻게 같이 고민하고 연대해 나가야 할까? 지금 미국 사회에서 이 질문은 현재 진행형이다. <새로운 흑인>은 그래서 미국 사회, 흑인 커뮤니티,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 진영이 이제까지 이룩한 바보다 앞으로 이뤄나가야 할 바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이진화/케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