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서울인권영화제: 그래도 너의 곁에서 함께 싸울게
2024. 6. 13. 개막식
여는 공연 – 소수자연대풍물패 장풍






2024. 6. 13. 개막식
여는 공연 – 소수자연대풍물패 장풍
그날, 우리는 몇 가지 공통된 기억의 장면을 공유한다. 점점 수면에서 사라지던 선박의 모습이 중계되던 뉴스화면. 생존자 명단이 적힌 화이트보드 앞에서 없어, 라고 외치고 주저앉는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성. 담요에 둘둘 감긴 채 돗자리가 깔린 진도 체육관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생존자의 뒷모습.
10년이 지났어도 우리가 아는 이미지가 바뀌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목격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슬프고 괴로웠던 4월 16일로 다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4.16세월호참사를 떠올리면 숙연해지는 이유다. 그렇다면 그 화면 속 대상들은 여전히 2014년에 머무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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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존>에서는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비하적인 표현)’라고 불리었던 기자들이 카메라 앞에 선다. 그날 팽목항과 진도 체육관에 있던 기자들은 모두 ‘기레기’였을까?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국의 뉴스를 보던 사람도 느꼈던 감정들이 아직도 우리를 연결하고 있다. ‘기레기’일지언정 현장에 있던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까? 소위 말하는 ‘그림’이 나오는 과정에 놓인 언론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증언이 이어진다.
<흔적>에서는 절대적인 ‘피해자’, 한날한시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 ‘꿈 많고 순수했던 우리 아이들’ 이 나온다. 사실 이 말이 이들에게 동정 받을만한 자격을 요구하는 압박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늦게 알았고, 아직도 우리 사회는 ‘피해자다움’을 검증하려든다. 애도가 아니라 투쟁을 해야 했던 이들이 받았던 압박들은 공권력과 여론으로부터만 오지 않았다. ‘피해자다움’은 피해자들의 내부로 파고 들어간다. 스스로를 검열하고, 다른 가족이 가진 슬픔을 재단하려 들고, 희생당한 이의 도덕성에 따라 순결을 검증하려든다. 이 영화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 그 자체를 잃은 것으로 슬퍼할 수 있는가’를 묻고 또 되묻는다. 모든 참사의 피해는 희생 당사자와 그의 가족들, 이 사회로 종국에는 확장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피해자다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 영화는 먼저 ‘피해자다움’에서 몸부림쳐본 이들이 나오는 해방과 사랑의 영화다.
<드라이브 97>에서는 가보지 못한 미래를 사는 이들이 나온다. ‘나의 오늘은 누군가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만큼 잔인하고 시혜적인 말이 또 있는가. ‘주어졌으니 잘 살아야지’, ‘그렇게 우울에만 젖어있다니 낭비야’와 같은 말처럼 우리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이렇게밖에 대하지 못하는 냉혈한인가? 이렇게 반박하는 어른 세대 사이에서 자신만의 시간과 방법으로 기억하는 생존자가 전면에 나선다. 여기에는 당사자와 누구보다 긴밀하게 공감하는 또래 세대가 함께한다. 더 이상 이들은 가녀린 청소년이 아니다. 극대화된 단편적인 모습으로 타자화되었던 존재가 직접 앞에 나선다는 것에서부터 혐오에 균열이 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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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의 목격자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다짐, 우리가 모이면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기억의 물결이 불러온 탄핵. 하지만 그 뒤에 이어온 탄핵사유 제외, 해경 지휘부와 청와대, 행정부 인사들의 무죄 및 약식 판결, 두 번의 조사위원회에도 밝히지 못한 침몰원인으로 야기된 혼란. 그렇게 굳어진 책임지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새로운 참사. 더불어 금년 5월 30일 구조하지 못한 국가의 방기 행위가 위헌적이라며 냈던 헌법 소원 심판 청구에서 ‘판결’도 아닌 각하 ‘결정’이 내려졌을 때, 좌절하고 낙담하며 “벌써 10년”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이 영화는 자신의 근황과 함께 안부를 건네며 “이제 10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혜원(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약칭 4.16연대)는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생명 존중 안전사회 건설을 위해 세월호참사 피해자와 시민, 단체가 함께 만든 ‘통합적 상설단체’입니다.국내외 수많은 시민들이 2014년 4월 16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세월호참사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이듬해인 2015년 6월 28일 4.16연대가 출범하였습니다.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는 우리가 모두 4.16연대의 주체입니다.
타자들과 함께 슬퍼할 용기
입안 가득히 침묵을 머금고 울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이 서 있던 곳은 단원고 4.16기억교실이었고, 세월호 참사 후 10년이 흐른 때였다. 그 자리에서 노란조끼를 입고 기억교실의 지킴이이자 해설사 역할을 했던 단원고 희생자 어머니의 표정은 단단해 보였다. 우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노란 조끼를 입은 어머니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은 나도 입을 꼭 다문 채 그곳에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4.16기억교실을 처음 간 것도 아니었는데 갈 때마다 이 공간은 나에게 새로운 말을 건넨다. 나는 교실 한쪽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슬픔에 안도감을 느꼈다는 표현이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공간에서 슬퍼하고 있다’라는 감각은 ‘나’에서 ‘우리’라는 단어로 인식의 확장되는 경험을 갖게 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는 세월호 참사 앞에서 무뎌지거나 무감각해지지 않고 슬픔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타인의 슬픔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애도의 유효기간을 두고 슬픔을 억압하던 말들에 대항하는 정동이 느껴졌다. ‘우리’를 이루는 사람들이 추상적인 존재들로 느껴지지 않고 매우 구체적인 사람을 다가왔다. 그것은 기억공간을 지키기 위해 기억 투쟁을 해왔던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경험이었다.
기억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시간이 흘러 참사의 공포와 비통함을 경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재난의 ‘물리적인 증인’으로서 다음 세대에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는 곳이다. 그리하여 참사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참사의 목격자가 될 수 있는 곳이다. 타자의 기억이 나의 기억이 되고, 또 다른 타자와 나를 연결해주는 기억의 연결고리는 집단기억이 되어 느슨하지만 강한 연대를 만들어내는 힘이 된다.
그러므로 재난의 기억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지도에 점 하나가 생기는 단순한 표식의 의미가 아니다. 기억공간을 조성한다는 것은 재난 이후, 법과 진상규명의 영역에서는 충족시킬 수 없는 희생자들에 대한 존엄성과 재난을 직간접적으로 맞닥뜨려야 했던 사람들의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세상은 법과 돈으로 움직이는 듯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재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기억공간이다.
다큐멘터리 <기억의 공간들>에 등장하는 호성어머니 정부자님은 ‘아픈 사람들끼리 뭉쳐봅시다.’라는 말을 한다. ‘아픔을 희망적이고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데 써보자’라는 말 속에는 ‘용기’라는 뼈대가 존재한다. 아픔을 무릅쓰고 세상 밖으로 나와 싸웠던 세월호 유가족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끔찍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등골이 선다. 실제로 세월호 운동이 만들어낸 수많은 ‘최초의 사례’들은 다른 재난참사들의 피해자들에게 어두운 길을 걷게 하는 등불이 되고 있다.
영화에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곁에 있는 타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기꺼이 참사를 이루는 슬픔을 보길 원하며 타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넘어 다정한 연결선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재난피해자와 피해자의 곁에 서서 함께 울고 웃을 결심을 한 타자들은 단원고 4.16기억교실을 만들어낸 주역이기도 하다.
세월호 10주기 기록집 『520번의 금요일』에서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추모사업부장 정부자님은 ‘진상규명하느라 교실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을 때, 교실을 남겨달란 요구가 부모의 욕심으로 비칠까 망설일 때, 시민들이 먼저 교실을 남겨야 한다’고 나섰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4.16기억교실은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기억 투쟁을 통해 지켜낸 곳이다.
이제는 화랑유원지에 조성될 4·16 생명안전공원의 차례다. 2021년 당장이라도 착공을 시작할 것 같았던 ‘4·16 생명안전공원 선포식’ 이후 몇 년째 공사가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바라는 4·16 생명안전공원은 365일 시민들로 활기찬 기억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와는 무관하게 세월호 참사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고 우는 것을 사과할 필요도 없는, 그럼에도 다시 웃고 오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억공간이 필요하다. 우리 또한 가라앉던 세월호를 봐야 했던 참사의 목격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난을 기억하는 공간이 엄숙하고 무거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넘어 사람마다 가진 다채로운 마음으로 기억의 과정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드는 일은 여전히 우리의 몫일 것이다.
권은비(미술가, 10.29 기억과 안전의 길 예술감독)
권은비
세상의 가장자리에 흩뿌려진 말의 조각을 모아 형상을 만드는 것이 미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주노동자, 국가폭력피해자, 산재, 재난피해자들의 삶과 이야기를 공공장소에 남기고 새기는 일을 하고 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화두로 자본, 정치, 사회, 국가, 식민 등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으며 대다수의 예술프로젝트를 지역주민 또는 관객들의 참여와 협업으로 만들어왔다.
이태원의 기억을 담습니다
영상에서 생존자들이 얘기하듯,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해밀턴 호텔 옆 골목 참사현장은 유가족과 생존자에게 트라우마 그 자체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이를 지켜봐야 했던 시민들에게도 이태원은 무척 찾아가기 어려운 공간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용기내어 애도와 추모의 발걸음을 해준 시민들 덕에, 참사현장은 애도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태원역 1번 출구부터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을 따라 가벽까지 추모 포스트잇과 추모 물품이 가득했고 지역 주민과 자원활동가, 시민대책회의 등 여러 주체들은 2만 5천여 점의 조화를 비롯해 추모 물품과 추모 메시지를 정리해 왔습니다.
수많은 메시지를 모두 수거하고 분류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의 참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봄부터 문화연대는 피해자권리위원회와 함께 시민들이 참여하는 기록보존 활동 ‘이태원 기억 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부산에서 찾아온 한 참여자는 야외 공간에 놓인 추모물들은 금방 훼손되기 십상인데, “조금만 방심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추모 기록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한” 우리 활동에 딱 맞는 이름이라고 후기를 남기기도 했지요.
기록보존 활동 ‘이태원 기억 담기’는 크게 추모 메시지 수거 작업, 추모 메시지 분류 및 보존 작업, 현장 정비 활동, 추모 메시지 공론화 활동으로 구성됩니다. 우리 활동에는 연구자, 시인, 음악가, 대학생, 다큐멘터리 감독, 문화공간 운영자, 고등학교 교사 등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편, 주변 상인과 지나가는 시민도 이 공간에 책임감을 느끼며 함께 공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참사 현장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 상인은 자원활동가들이 찾을 때마다, 분류 작업할 공간을 내어주고 마실 음료도 선물해 주셔요. 바람이 드셌던 어느 날에는 참사 현장을 지나가던 한 시민이 흩날리는 포스트잇을 모아 서울시청 앞 시민분향소까지 손수 가져다준 일도 있었어요. 국가의 방기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영상에서 낭독된 메시지에는 추모와 애도를 비롯해 미안함, 자책감, 무력감,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뒤엉켜 있어요. 희생자와 참사 현장에 대한 기억이 담겨있기도 하지요. 희생자의 사라진 미래를 안타까워하며,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반성하기도 하고 국가의 책임을 묻기도 합니다. 잊지 않겠노라고 되뇌이고,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에 나서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최근 ‘기억과 안전의 길’엔 유가족, 지역 상인, 주민과의 협의를 통해 디지털 안내판과 표지목 등을 설치하며 새로이 단장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여전히 시민들은 포스트잇으로 추모의 말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록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함께 기억할지의 문제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참사현장에 발걸음한 시민들이 남겨준 추모와 애도의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에게 닿아 안전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관객분들께서도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박이현 (문화연대 활동가)
앞산의 불을 끄는 일만큼, 너른 삶의 터를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 활동가. 잠든 감각을 깨우고, 마음과 마음을 잇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씨앗을 심고 있어요. 기록보존 활동에 함께 하고픈 분들은 bit.ly/remember_1029에서 신청가능해요. 함께 하시죠!
*2023년 28회 인천인권영화제 프로그램에서 재수록하였습니다.
문화연대
1999년에 창립하여 문화사회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문화운동단체입니다. 검열과 배제가 없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싸우고, 문화공공성의 관점에서 문화정책과 문화행정을 감시하고 대안을 제시합니다. 시민의 문화권리와 문화산업의 종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한 직접행동과 캠페인을 벌이고, 폭력과 불평등의 현장에서 사회적 약자와 연대합니다. 개인의 자율적인 삶이 더 많아지는 사회, 공동체의 다양한 의사와 행동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 문화의 창의적 역량이 사회 진보에 기여하는 사회, 인간과 자연 사이에 더 이상 착취와 파괴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그려나갑니다.
인권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권리로 정의된다. 인간이 타자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조건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보이고 들리는 존재로서 존엄을 인정받으며 ‘삶’을 ‘살기’ 위한 권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에게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특히 생과 사의 자연적 질서에서 벗어나 폭력적인 죽음, 사회적인 죽음을 당한 반인권적인 사건에서 인권은 무용한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애도의 권리’가 발명된다. 애도의 권리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애도받을 권리와 애도할 권리. ‘사자’에게 속한 애도받을 권리는 사자가 다른 세계(저승)에서 안존한 사후 거처를 마련할 ‘최후’의 권리를 의미한다. 이때 안존한 사후 거처란 인간의 신체와 영혼이 머물 장소에 대한 권리이며, 공동체 혹은 그를 사랑했던 이들 안에서의 소속감을 부여받는 기억에 대한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신을 수습하고, 이름을 찾고, 매장할 거처를 찾는 것은 양도하거나 빼앗길 수 없는 인간의 신체와 영혼의 거처를 찾는 행위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을 때 사자는 죽었으나 기억 속에서 살면서 사람들 ‘사이’에 온전히 속할 수 있는데, 이는 동시에 사자의 이름을 빌려 삶의 세계(이승)의 정의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고인이 합당한 애도를 받지 못한다는 건 지금-여기서 그의 존재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는 탈실재화(derealization)된 폭력의 반증이자, 사회의 부정의와 공동체의 균열을 폭로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애도할 권리는 산자에게 속한다. 이는 상실과 이별을 마주하며 고인을 떠나보내고 삶을 다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권리다. 산자의 애도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면 “자아가 빈곤해지고 망상적인 자기비하와 비난이 심해지면서 본능적 욕구마저 억누르게 되는 심리적 피폐화, 즉 우울증적 상태로 이행될 가능성이 높다.” “살아 있으되 죽은 자처럼 되는 것이다.” 애도의 실패가 실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애도의 권리는 산자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사자의 권리를 보존해 산자의 인권을, 삶을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울하게도 현실에서 원통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권리는 존중되지 못한다. 다수의 경우 목숨은 싸고 죽음은 비싸기에 시신 수습과 이름 찾기, 매장은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집요하게 되물어야 한다. 그것조차 하지 못하는 사회에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겠냐고. 인간으로서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겠냐고.
유해정(인권기록센터 사이 기록활동가)
*2023년 28회 인천인권영화제 프로그램에서 재수록하였습니다.
인권기록센터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역사와 현재 ‘사이’에서 세상은 만들어진다 믿는다. 차별받는 자, 저항하는 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잇는 인권기록활동을 지향하며 2019년 만들었다. 연구와 교육, 네트워킹을 통해 다양한 기록활동과 접점을 찾기를 희망한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한 자리이면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떠나간 사람을 이야기하고 그리면서 충격과 슬픔을 달래는 시간이다. 하지만 성소수자의 장례식은 그러한 자리가 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법 제도들은 성소수자들이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어렵게 만든다. 장례 주관자는 혈족을 중심으로 순서가 정해져 있고, 유언을 통해 지정하더라도 강제력은 없다시피 하다. 생전에 존재가 지워지는 것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애도의 자리에서조차 존재가 지워지기 일쑤고 ‘동료’들은 애도의 자리에 초대받지 못함으로써 애도의 권리를 박탈당하며, 떠난 사람은 원하지 않는 ‘이름’들로 불리며 애도 받지 못한다. 성소수자들이 죽음과 애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대안적인 장례식은 ‘대안’이기에 일반적인 틀을 벗어나기 마련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햇살 비치는 창가에 자신이 만든 관을 놓고 누워서 애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영화의 장면처럼. 성소수자가 배제당하는 일반적인 장례식과는 다른 모습들을 상상해 볼 수 있고 제대로 된 애도의 순간을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대안’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법 제도를 벗어나서 마련된 자리는 부족한 마음의 일부를 채워줄 수는 있지만 그야말로 완벽한 ‘대안’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틀이 여전히 견고하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마련된 자리는 틀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하기 마련이다. 이런 대안적인 장례식의 한계는 법 제도의 개선으로 이겨낼 수밖에 없다. 죽음 이전의 차별을 벗어나기 위한 차별금지법 등의 제정과 죽음 이후의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장사법 등의 개정 등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정상가족’의 틀은 여전히 견고하다. ‘대안’들의 또 다른 효과라고 한다면 이런 ‘정상가족’의 견고함을 조금씩 흔들 수 있다는 것일 테고, 다양한 대안들의 등장과 법제도 개선의 노력이 함께 하면 작은 변화들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쌓여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는 법 제도가 제대로 마련된, ‘대안’ 장례식이 아닌 그저 다양한 장례식을 통해 누구나 충분한 애도가 가능한 현실이 오기를 빌어본다.
시엘(언니네트워크 상근활동가)
퀴어단체도 페미니즘단체도 아닌 퀴어 페미니즘 단체에서 4년째 활동 중인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 배우고 있는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입니다. 책방꼴의 책방지기도 겸하고 있습니다.
*2023년 28회 인천인권영화제 프로그램에서 재수록하였습니다.
언니네트워크
언니네트워크는 2004년 11월 27일에 그 첫 불을 지핀 여성주의 문화운동 단체입니다. ‘언니’라는 단어는 여성들 사이에서 친근하고 편안하게 불리어지며 또한 자매애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언니네트워크는 ‘언니’와 ‘네트워크’의 합성어로, 여성들의 연대, 지지, 공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체의 지향을 담고 있습니다.
“THIS IS A HOME JUST LIKE YOURS”. ‘이것은 집이다. 당신이 사는 집과 같은’.
마사페르 야타 지역의 작은 마을 칼렛 앗-따바에 있는 건물 한 벽면을 가득 채운 글씨를 보고 나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도 사람이다, 이것도 집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호소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나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한다. 무기와 제도 뿐 아니라 거짓 뉴스와 여론몰이로 이스라엘이 온갖 수단을 이용해 지우려고 하는 팔레스타인의 존재는 전 세계에 증명하고 설득하지 않으면 위태로운 것이 되었다.
마사페르 야타는 서안지구의 남쪽에서 가장 큰 도시인 헤브론에서도 남쪽, 나깝(네게브) 사막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다. 마치 성서에서 읽기만 했던 광야와 같은 그 지역에는 소규모로 농업과 목축을 하는 작은 마을들이 약 12개 흩어져 있다. 이 지역은 오슬로 협정 시기 서안지구를 통치 권한에 따라 A, B, C로 나눈 지역 중에서 이스라엘 군정 통치를 당하는 C 지역에 속한다. 이것은 이 지역에 이스라엘이 군사 훈련 시설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며 불법유대정착촌에 살고 있는 정착민들의 무장과 만행도 더욱 극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에 이스라엘 군의 사격 훈련장이 있는가 하면, 불법유대정착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곳곳에 초소를 설치해 감시하고, 양과 염소를 치는 목동이나 등하교하는 학생들은 정착민과 군인에게 수시로 공격당한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정착촌을 확장하거나 군사 훈련을 금지하는 국제법을 어기며 1980년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추방하기 위해 마사페르 야타를 ‘사격 구역 918’로 지정하였다. 주민들은 언제나 강제 철거와 이주, 재산 처분의 위협을 항상 받으며 살아왔고 땅과 도로, 물,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접근이 거부되었다. 2022년 5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수십 년에 걸친 소송에서 주민들의 청원을 기각하고 이스라엘 군의 강제 퇴거를 승인하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는 최근 수십 년간 이스라엘이 시행한 가장 큰 규모의 강제 퇴거에 대한 승인으로 1,100명이 넘는 주민들이 강제 추방되고 300여 개의 집, 농경지와 우물, 학교와 의원 및 모스크가 철거될 위기에 처해있다. 판결 이후 불법유대정착민들의 폭력이 더욱 심각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주민들은 통보를 받는다고 해도 이스라엘 군이 한국의 HD현대 장비를 비롯한 중장비들을 이끌고 와서 언제 철거할지 알 수 없다. 통보하더라도 차일피일 미루기도 하고 기습적으로 장비를 끌고 가서 강제 철거를 단행하기도 한다. 이를 막기 위해 주민들이 불침번을 서면서 지키지만, 무기를 들고 오는 군인들과 중장비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온몸으로 막아내고자 저항하는 것과 기록하는 일이 전부일 때가 많다.
그러나 마사페르 야타의 주민들은 오늘날까지도 자기 마을을 지키며 양과 염소를 치고, 작물에 물을 주고, 등교를 한다. 그런 가축과 농작물에 물을 줄 수 있도록 밤새 우물 옆에서 야영하며 지키기도 하고 오랜 세월 목동들이 쉬기도 하고 살기도 했던 동굴들을 지키기 위해 임시로 거주하기도 한다. 정착민들의 폭력에 맞서 그들이 땅에 내린 뿌리를 절대 거두지 않으리란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불안과 살해 위협에도 그저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에 맞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매일의 삶이 투쟁인 마사페르 야타의 주민들과의 연대, 구체적으로는 BDS(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운동에 동참하여 HD현대의 중장비들이 이스라엘의 인종청소로 사용되지 않도록 촉구하는 것이 시급하다. 더불어 현재 9개월간 지속되고 있는 가자의 집단학살이 당장 끝낼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앞장서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가 완전히 종결되는 날까지 우리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높여야 할 것이다.
새라(팔레스타인평화연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동성혼 법제화로 무너지는 나라는 없습니다. 불행해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단지 행복해지는 사람이 늘어날 뿐입니다. 행복을 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함께해주세요.”
2024년 5월 31일에 있었던 ‘혼인평등법(동성혼 법제화를 위한 민법 개정안)’을 포함한 가족구성권 3법 발의 기자회견에서 동성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소송의 당사자인 김용민 씨가 한 발언의 일부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이들은 동성혼이 법제화되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2024년 6월 현재, 영화에 등장하는 대만을 포함해 전 세계 39개 나라에서 동성 간에 결혼이 가능하지만, 이에 따라 어떤 나라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동성혼 법제화가 ‘성별이 같은 사람 둘이 결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이상으로 사회를 뒤흔드는 변화인 것은 맞다. 동성혼 법제화 이후 대만 시민들은 학교에서의 성소수자 교육을 더 강하게 지지하게 되었고, 가족과 친구, 직장과 학교의 동료에서 정치인과 선출직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성소수자를 더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중 성소수자인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변화다. 평등이 확장된 사회에서는 더 많은 성소수자들이 두려움 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될 테니. 동성혼 법제화가 무너뜨리는 것은 비규범적인 섹슈얼리티와 성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뿌리 깊은 낙인과 편견임을 우리는 이미 혼인평등을 실현한 다양한 나라들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3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동성동본인 사람들, 그러니까 성과 본이 같은 사람들이 결혼할 수 있게 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선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1997년, 헌법재판소가 동성동본 금혼제도가 헌법에 위반된다는 판단을 내릴 때까지 6만여 쌍의 동성동본 부부들은 서로 사랑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 살고 있더라도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받을 수 없었고, 부부라는 관계에 기반한 권리와 의무를 누릴 수 없었다. 2024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성과 본이 같다는 사실이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 황당할 뿐이지만, 이 제도로 인해 누군가는 오랜 세월 불합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지금 한국의 동성 부부들이 경험하는 제도적 차별은 30여 년 전 동성동본 부부들이 경험했던 그것과 너무나 닮았다. 실제 동성동본 금혼제도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한 1997년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지금 그대로 동성혼 법제화를 위해 다시 써도 될 정도다. 그 일부를 아래에 옮겨본다.
“국민은 스스로 혼인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고 혼인함에 있어서도 그 시기는 물론 상대방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결정에 따라 혼인과 가족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 헌법재판소 1997. 7. 16. 선고 95헌가6내지13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성별이 같은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없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현재 우리가 동성동본 금혼 제도가 존재했던 시절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생경하게 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작년 이맘때 성소수자 운동은 ‘모두의 결혼, 사랑이 이길 때까지’라는 슬로건으로 동성혼 법제화를 위한 운동 기구를 만들었다. 한국의 가족제도를 보다 성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혼인과 가족생활의 권리라는 기본권을 성소수자도 평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소
수자가 존엄하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두의 결혼’이 만들어 갈 여정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
이호림(모두의결혼)
모두의결혼
“모두의결혼은 한국사회에 혼인평등을 요구하는 캠페인입니다.
혼인평등이란 국가의 제도이자 개인의 권리인 혼인을 이성 간에만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의 성별에 따른 제한 없이 동성 간에도 평등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2023년 6월 시작한 캠페인은 이제 여러분들과 혼인평등이 가져올 가족의 다양성과 성평등한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대중교통이지만 그 말에 있는 ‘대중’에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는 배제된 것 마냥 쉽게 이용할 수 없었다. 2001년 1월 오이도역에서 (수직형)휠체어리프트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이 있고 중증장애인은 말 그대로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지하철역에서 장애인이 사망하는 사건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발생했지만 오이도역 참사로 이어진 이동권 투쟁은 한국사회에서 전례없는 장애인들의 투쟁이었다. 지하 서울역에서 장애인들은 휠체어에서 내려와 선로를 점거하고 동시에 지상에서는 버스를 막으며 “장애인도 안전하게 이동하고 싶다”는 구호와 “장애인 이동권 보장하라”는 외침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이 권리의 외침은 지난 20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이동에 권리가 부여된 역사적 사건 이후 이제는 지하철역에서 엘리베이터를 보는게 어렵지 않고 거리엔 저상버스와 교통약자 이동지원 차량이 골목을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많은것이 변화되었다고 하지만 그 변화는 장애인 활동가들이 자신의 몸에 쇠사슬을 감고, 도로를 막고, 바닥을 기며 스스로 쟁취하고 얻어낸 결과였다. 그렇게 장애인들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이동시켜왔지만 여전히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장애인의 이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동에서 가로막히니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갈 수도 없다. 우리가 장애인의 살아갈 권리를 말할 때 정부는 매 번 예산이 부족하다는 변명하기 바쁘다. 반복되는 정치의 외면과 무관심에 장애인의 권리는 가로막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애인은 거리가 아니라 방 안에서, 거주시설에서 ‘갇혀’있어야 한다는 혹은 갇혀 있을것 이라 생각하는 비장애인 중심 사회다.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는 장애인과 우리 모두의 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승강장이라는 공간과 열차에서 시민들을 만나며 호소한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절절한 외침에 일부 시민들은 활동가를 향해 욕을 퍼붓기도 하고 경멸의 눈빛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열차에 올라 관심을 호소한다. 여론은 선과 악으로 구분지으며 바라보지만 장애인들이 외치는 그 권리는 결국 생(生)과 사(死)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이 삐딱한 사회는 장애인들이 모여서 아무리 외쳐도 들어주지 않는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아닌 비장애인 시민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우리는 더 시끄럽고 요란하게 잡음을 만들어 내며 삐딱한 사회에 균열을 낸다. 매일 아침 승강장과 열차에서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로 시작하는 그 외침의 목소리는 ‘살고자 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시민들과 만나며 함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승강장으로 내려간다.
– 다른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유튜브에서 전장연 채널을 찾아오세요 🙂
다니주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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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지 않는 세상,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장애인 대중이 스스로 행동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2007년 출범했습니다.
1980년대 말에 태동하여 2000년대 장애인도 함께 버스를 타고 사회에서 함께 살기를 외치며 버스와 지하철을 막고 한강 다리를 기어 건넜던 장애해방 투쟁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3대 적폐(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장애인 수용시설) 폐지 투쟁, 장애인 이동권 및 노동권, 자립생활,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등의 투쟁과 행동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