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0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 77주년이 되는 날이자,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열린 ‘가자, 평등으로! 12.10 민중의 행진’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말 그대로 ‘꽉 찬’ 인권의 날을 보냈습니다.
이날 오전 10시, 국가인권위원회는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세계인권선언 기념식을 열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창호의 참석이 예고돼 있었지요. 그러나 안창호는 인권을 모독하고 내란을 옹호해 온 인물입니다. 차별을 시정하고 평등을 옹호해야 할 국가인권위원회를 반인권 기관으로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에 인권활동가들은 기념식 저지 행동에 나섰습니다. 고운과 소하도 함께 현장에 있었습니다. 기념식장 입구와 지하 출입로 등에서 피케팅을 진행하며 “안창호는 사퇴하라”고 외쳤습니다. 안창호는 몇 차례 입장을 시도했지만 결국 현장을 떠났습니다. 한편 극우 보수 개신교 세력은 안창호를 옹호하는 집회를 열며, 국가인권위원회가 그간 동성애를 옹호하고 질서를 무너뜨려 혼란을 야기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참으로 혼란한 오전이었지만, 이렇게 혼란할수록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는 생각도 퍼뜩 들었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후원주점 준비를 이어갔습니다. 스태프 티셔츠를 직접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고, 이후 민중의 행진 준비를 위해 보신각으로 이동했어요.
올해 ‘가자, 평등으로! 12.10 민중의 행진’의 부제는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노동이 존엄한 나라, 기후정의가 당연한 나라, 공공성이 든든한 나라, 진보정치가 빛나는 나라’였습니다. 지난 겨울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확인했던 ‘평등으로의 요구’를 다시 한 번 외치기 위해 모인 자리였습니다. 저는 실무팀으로 집회와 행진 준비에 조금이나마 함께했습니다.
집회의 기조 발언은 무지개행동 박한희 공동대표가 맡았습니다. 그는 지난 겨울 우리가 “차별과 혐오로 성장한 극우 정치가 민주주의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를 확인했고, 그렇기에 “모든 차별을 없애고 평등이 중심이 될 때에만 민주주의는 가능하다”고 외쳤던 기억을 다시 짚었습니다. 이어 강다영, 김영훈(한전KPS 비정규직지회), 구중서(새만금신공항백지화공동행동), 고유미(노동당)·이상현(녹색당)·권영국(정의당), 루니, 이춘기(경주이주노동자센터), 박용수(홈리스행동) 님의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노동이 존엄해야 하고, 기후정의가 당연해야 하며, 공공성이 든든해야 하고, 진보정치가 빛나야 하며, 차별금지법이 있어야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였습니다.
행진은 (참 드문 경우인데) 예정 시각인 저녁 8시에 딱 맞추어 시작되었습니다. 브라질리안 퍼커션 그룹 ‘호레이’는 을지로입구역 한전KPS 서울지부 앞에서 행진단을 힘차게 맞이하며 행진에 합류했습니다. 우린 보신각에서 을지로와 명동을 지나 세종호텔까지 행진했습니다. 300여일째 고공농성 중인 고진수(세종호텔노조) 동지가 행진단을 맞아주었습니다. 고진수 동지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민주주의의 승리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조금 슬퍼지려 했지만, 여전히 힘찬 동지의 이야기에 다시 힘이 났습니다.
마지막 발언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 활동가가 맡았습니다. 그는 “이재명 정부가 바라는 세상과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다르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며, “자본의 탐욕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리고 “몽상가들”이라고 불리며 때로는 손가락질 받는 우리들이 앞으로도 더 너른 연대로 꼭 해낼 것이라고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날이었습니다. 행렬이 너무 길어 처음과 끝을 오가며 뛰어다니느라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수가 세상을 바꿀 만큼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이 바뀌어야 할 만큼 진심이라는 생각은 분명히 들었습니다.
새해 인사가 오가는 요즘, 여기저기서 새해 소원을 비는 기도들이 들려오는 이때에, 자신의 복만이 아니라 모두의 복을 빌며 모두의 권리를 말하고, 저 낯선 타인도 내버려두지 말고 함께 가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다는 것이 참 연말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 덜 잔혹하고, 조금 더 숨통이 트이는 연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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