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편지] 가난하게 사는 연습

소식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활동가 편지를 쓰는 고운입니다.

청소년 시절 저는 편지를 잘 못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요. 친구들이 제 편지는 일기 같다고들 하더군요. 나한테 주는 편지인데 왜 네 이야기만 하느냐. 그런 것이었죠. 그래도 저는 편지를 쓰는 게 좋았습니다. 받는 것도요.

어쨌든 오늘도 제 이야기를 많이 하겠네요.

셀프 해고의 경험이 있으신가요? 서울인권영화제는 워낙 작은 단체라, 채용 신고도 셀프로 하고 그 반대 역시 셀프로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달 제가 그랬지요. 고용24에 들어가서 저를 직접 해고했습니다. 저는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데, 영화제가 진 빚은 갚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백만 원 까짓거. 통 크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생활의 방식은 그렇지 않더군요. 애인에게 백만 원을 빌려 전월 카드 대금을 결제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번 편지는 ‘활동가’ 편지가 아니고 그냥 편지가 될 것 같아요.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제게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엄마는 제가 부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저 역시 딱히 부자가 꿈이었던 적은 없고요. 하지만 ‘연습’이 필요했던 걸 보면, 저는 그때 빈곤에서는 벗어난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라면서 저는 아주 풍족했던 적도 없고 아주 곤궁했던 적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것 같아요. 돈은 없지만 맥주는 많이 사 마시는 중이고, 집은 없지만 고양이와 강아지를 하나씩 키우면서 살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작년에는 근로장려금을 받아서 다른 게 아니라 무선청소기를 샀습니다. 제 나름의 사치품이지요. 그 정도는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초라한 기분을 매일 느낍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삶. 그런 삶에 만족할 수 있는 태도. 저는 그런 태도를 가꾸는 것이 가난하게 사는 연습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 연습을 잘하면 부자가 안 되어도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던 것 같아요. 흔들리지 않는 것. 내 일에 대한 자부심. 삶에 대한 자긍심. 초라해지지 않는 연습. 그런 거.

스스로가 초라할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이제 출근할 필요가 없으니 시간이 좀 생겼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기껏 생각해낸 것은 강아지 임보였는데요, 그조차 쉽지 않더군요. 임보 신청서에는 정말 여러 항목을 정성껏 써야 합니다. 그중에는 직업, 소득, 가족 관계, 가족의 직업, 거주 환경,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제가 자신 없어 하는 것들이지요. 그래도 임보 경력이 없지 않아서(지금 함께 사는 콩순이도 임보로 시작해서 입양했거든요) 열심히 썼는데, 두 번이나 떨어졌어요. 나중에 그 강아지들이 간 집을 보니까 참 깔끔하고 넓고 좋더라고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가난하게 사는 연습은 나 혼자만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그 삶을 나눌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친구이든, 동료이든, 가족이든. 그리고 내가 가난하게도 살 수 있도록 이 세상이 좀 내버려 둬야 합니다. 십억이 없어도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고, 월 삼백을 벌지 않아도 가족을 꾸릴 수 있고, 비혼 가구도 강아지(사람 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를 입양할 수 있고,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직장 생활 잘할 수 있고, 미국 주식 안 해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이 같이 연습해야 합니다. 가난함이 초라함이 되지 않도록 모두가 같이 연습해야 합니다.

사실 요즘엔 좋은 말도 잘 안 나와요. 활동을 하면서는 매번 좋은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일까요. 좋은 것들 있잖아요. 평등이나, 사랑이나, 민주주의. 투쟁, 쟁취, 연대. 어느 순간에는 그냥 버릇처럼 이런 말들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냥 실컷 울고 실컷 욕하고 실컷 초라해진 다음에 맛있는 거 먹고 맥주 마시고 깊은 잠을 자고 싶습니다. 별다른 걱정이나 불안 없이. 내일을 기대하면서요. 모든 좋은 말을 다 합한 것만큼이나 어렵고 소중한 것이 그런 일상인 것 같습니다.

고운의 방 꽃밭 카페트 위에 엎드린 콩순(왼쪽)과 버찌(오른쪽)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강아지 임보는 결국 하게 되었어요. 임보 신청 두 차례 떨어지고 초라해진 채로 잠시 포기하고 있었는데, 구례보호소의 어느 봉사자가 올린 게시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임보자가 있어야 아기 강아지들을 보호소에서 구조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세모 귀를 가진 크림색 강아지 버찌가 저희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정을 안 붙이려고 했는데 정말 예뻐요. 이제 열흘 되었는데 조금 큰 것 같습니다. 아기들은 원래 이렇게 쑥쑥 자라는지요? 버찌는 지금 어떤 연습을 해야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결국 오늘도 제 이야기만 하다가 편지가 끝납니다. 여러분은 어떤 연습을 하며 살아가시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저처럼 초라한 기분이 드는 분들이 어딘가에 계신다면, 외롭게 말고 함께 초라해져요. 그러다 보면 또 무언가가 생기겠지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 2025년 2월 27일, 고운 드림

 

3소식

댓글

타인을 비방하거나 혐오가 담긴 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