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편지] 특별편: 넌센스 퀴즈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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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cil on opened notebook

여름방학이 끝나기 이틀 전, 일기를 몰아서 써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방학 내내 일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개학 전 마지막 주말이 되고서야 부랴부랴 일기장을 펼치곤 했더랬지요. 재밌게 놀다 개학날 보자고 했으면서 숙제를 주는 건 무슨 경우냐 불평을 늘어놓으면서요. 어제 점심밥으로 무얼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한데 한 달 내내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기억이 날 리가 만무했습니다. 친구와 방방을 타고 슬러시를 먹었다거나 하는 유난히 재미난 날이 아니고는 말이죠. 그래서 그 시절의 저는 꾀를 부렸답니다. 특별한 기억이 없는 날엔 <특별편: 넌센스 퀴즈 모음>를 적고는 했어요. ‘재밌는 게 딱 좋아!’ 같은 책을 펼쳐놓고는 와중에 내 기준 퀄리티가 좋은 농담을 적어냈습니다. 내 일기를 읽는 담임선생님이 깔깔 웃기를 바란 건 당연히 아니었고 그저 빈칸 채우기용 꼼수에 불과했지요.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이를 ‘필사’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깔깔.

제가 이 말을 왜 했게요.

맞습니다. 이 편지를 쓰려 노트북에 손을 얹자마자 나는 넌센스 퀴즈 모음집을 적어내고 싶어졌어요. 하지만 어릴 적 밀린 일기를 쓸 때와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랍니다.

저는 멋진 말솜씨를 가지지 못했어요. 그래서 편지를 쓸 기회가 주어지면 옳다구나!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여 마음을 다 써내려 가고는 한답니다. 저에겐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 소중한 방법이고 제가 조금 더 인간다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편지에 진심을 담는 버릇이 꽤 오래된지라 오늘의 편지가 아주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근래의 제가 가지고 있는 마음들이 그리 좋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집은 없는 건지,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건지, 내가 인내심이 있었다면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을는지. 이런 것들에서 비롯된 마음들이 대게는 부정적이었기에 ‘마음을 다해’ 편지를 쓴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서인영 울림을 구독해주고 계시는 분들에게 저의 나쁜 마음들을 들키고 싶지가 않았네요.

그래서 저의 흑화(?) 이전에 모아두었던 좋은 것들에 대해 적어보려고 해요. 저의 질문에 여러분만의 기억을 떠올리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도 함께 접어 넣었습니다. 음. 짧은 말들을 모아둔 것이니 넌센스 퀴즈 모음과 엇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1. 좋아하는 순간들을 적어봤나요?

저는 전력 공급 방식 변경으로 지하철 불이 투두둑 꺼지는 순간을 좋아해요. 같은 노선의 버스 기사님들이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스쳐 지나가며 손인사하는 걸 봤을 때를 좋아하고, 와랄라 떠들던 친구들의 입을 생맥주로 막아 적막이 꿀떡이는 그 3초를 좋아해요.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 설렘이 몽땅 손끝으로 몰려 빠져나가지 못할 때를 좋아합니다. 

  1. 들었을 때 짜릿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나요?

저는 드라마 <구경이>에 나왔던 대사 ‘의심스러운데?’를 좋아합니다. 또 아이유 언니의 인터뷰 중 ‘모자를 안 쓰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전속력으로 뛰어가고 싶어요.’라는 문장을 좋아해요. 일터 내 낄낄메이트였던 동료분이 일을 그만두면서 저에게 준 편지에 쓰인 ‘유월님은 제가 만난 재미있는 사람 TOP3 안에 든답니다.’라는 말은 짜릿했던 말 TOP3에 든답니다.

  1.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은 주기적으로 꺼내야 해요.

어릴 적 아빠차를 타고 어딘가를 갔다가 밤늦게 집에 도착할 때면 저는 매번 자는 척을 했어요. 아빠가 나를 번쩍 들어 집으로 옮겨다 주는 게 좋았거든요. 담배 냄새가 옅게 묻은 아빠의 회색 패딩. 그 시원한 바스락거림을 기억해요.

  

세상 탓과 내 탓을 번갈아 하다 지쳐버린 요즘입니다.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한 나날이구요. 기억이 나지도, 혹은 기억을 하고 싶지도 않은 빈칸같은 하루들이 여러분께 찾아온다면 저렇게 냅다 <특별편: 어쩌구>를 적어보는 건 어떠실런지요. 그렇게 우리 각자 좋아하는 순간을 적고, 짜릿했던 말을 기억하고, 또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을 주기적으로 나눠봐요. 그렇게 살아내다 유월의 어느 쾌청한 날, 서울인권영화제에서 만나는 거죠.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간질간질 시원해질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내맘대루얼렁뚱땅메롱편지를 마치겠습니다. 안녕.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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