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편지] 방의 확장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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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은 2012년 이름을 갖게 된 이래로 14년째 내 방이다. 말하자면 이 방과 함께한 시간이 이제 막 그렇지 않던 시간을 앞서간다. 그동안 침대와 책장, 옷장을 한 번씩 교체하는 이벤트가 있기도 했다. 그것들은 쓸모를 다했다기보다는 과도하게 키가 커 연약해진 풀처럼, 아침을 무서워하던 나의 외로움에 공감해 웃자랐을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만들어진 것들은 각양각색의 스타일로 시간의 레이스를 즐기다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비슷한 경로를 따라간다. 나의 가구들은 방을 나서는 방식으로 레이스를 마쳤고, 나 역시 그것들과 유사한 궤를 달리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둘러싼 상당수의 서사는 이 작은 방으로부터 발생해 확장하거나 축소한다. 

작년 여름의 안과 아침은 유난히 괴로웠다. 밖과 밤은 그보다 끔찍했고 대개는 그것이 아침의 운세가 되곤 했다. 바깥과 직접적으로 통하는 창문의 부재로 무더위를 꼼짝없이 견뎌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외로워 울 때면 눈물이 떨어지는 즉시 방안의 습도가 올라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공간에 압도당한다는 감각이 일상을 지배한 계절을 여태 연민하곤 한다. 이때 나의 방은 아주 큰 폭으로 크기를 부풀린다. 그것을 수용하는 마음은 작을지라도.

동시에 나는 배수아의 산문 『작별들 순간들』에 매료되어 있었다. 관계의 매너리즘은 사람과 사람 간의 작용에 의해서만 촉발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 손을 떠난 물건들이 그리웠고, 쥐고 있는 것들에 대한 권태로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볕이 들지 않는 방에서 어떤 사실은 켜켜이 쌓인 책들처럼 눅눅해지기도 한다. 분명 여행을 가장한 (방과의) 작별이 필요한 시기였다.

[사진 1] 카페 창가 너머로 마당과 활짝열린 대문이 보인다. 창가 안쪽에는 다육 식물이 화분에 심어져있다.

어쩔 수 없이 평일 낮의 상당 시간을 카페에서 보냈다. 외출은 늘 긴장됐지만 밤이 오지 않길 빌며 새로운 취미를 부여했다. 당도한 계절 혹은 날씨에 어울리는 책을 선정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완독할 것. 『눈물이라는 뼈』를 읽었고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를 맛보았다. 다행히 나는 폴렌타를 알았고 커피를 제법 좋아했으며 시끄러운 독서를 즐겼다. 직원과의 소통이 늘었고, 속독하지 않고 커피를 빨리 마시지 않으며 공간을 만끽할 수 있게 됐다. 침대의 이미지를 서서히 지울 수 있었다. 여전히 잠드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밥을 챙겨 먹는 일에 호의가 생겼다. 혹여 방 옆에 세워둔 웃자란 방의 존재는 다음 페이지로의 도약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게 있어 추억에 대한 선의가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세계가 확장되고 방이 되는 순간, 그리고 그것에 새로 이름 붙이는 순간 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 (나쁘게 말하면 과거를 향한 일종의 회피일 수도 있겠지만……) 작별은 때때로 또 다른 방을 낳게 된다. 방을 나가던 가구들의 마음을 헤아린다. 나는 나의 떠남을 지켜보고 싶어졌다.

[사진 2] 카페 모서리의 창가자리. 새하얀 벽 모서리에 삼각형의 책상이 놓여있다. 자리에는 각기 다르게 생긴 의자가 놓여있다.

최근에 귀여운 녹색 트롤리를 방에 들였다. 난잡한 책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어쩐지 공간이 더 조잡해진 것 같다. 비운 자리엔 새 아이템이 속속들이 침범하고 채운 자리엔 더 큰 마음이 들어앉는다. 방의 속성을 이해한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거실까지 끌고 나가본다. 올려둔 인형을 나인 듯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간혹 떨어뜨려도 본다. 넘어지고 일어서며 내가 있는 곳이 내 방임을 배우는 과정이다.

– 서울인권영화제 이음활동가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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