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눠요] 지켜라 학생인권, 지켜라 성소수자!

소식

장면들

하나. 청소년 시기, 누군가 내게 커밍아웃을 한 적이 있다. 언니, 나 사실 그거야.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냈던 것 같다. 그거? 나는 어림짐작을 하면서도 이렇게 되물었던 듯하다. 기억은 흐릿하다. ‘띵’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끄덕였다. 그 대화는 비밀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정말 최선을 다해 그 친구를 “평범하게” 대했다.

둘. 열일곱 살 때였던 것 같다. 작은 학교였고, 학생과 교사도 몇 안 됐다. 우리는 한창 “만약 선생님 아들이 게이라면”이라는 질문을 했다. 목적은 단순했다. 선생님을 당황시키는 것. 대부분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넘어갔고, 한 선생님만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런 거지. 다만 걔가 그렇다고 해서 괴롭힘을 받거나 차별을 받으면 내가 싸워야지.” 우리는 감명받은 얼굴로 오오, 하며 박수를 쳤다. 우리 사이에 ‘그런’ 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채로.

괴짜 만들기

한국에는 현재 6개의 학생인권조례가 있다. 2010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제주에서 제정 및 시행되었다. 각각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교육에 대한 권리와 함께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서울 학생인권조례 제5조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면서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하고 있다. 한국의 법령에서 ‘성별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한 최초의 조항이다.

나는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복장과 두발에 대한 단속이 있었고 교사마다 자신만의 훈육법(아주 다양한 체벌 방식)이 있었다. 교실 게시판에는 교칙, 특히 용모 규정이 상세하게 인쇄되어 붙어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꽤 자주, 꼼꼼히 살폈다. (머리를 특정 길이 이상 기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삭발도 안 된다는 조항이 제일 웃겼다.)  사실 교칙 하나하나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차별을 강화하는 근거가 된다. 염색 및 펌 금지는 모든 학생들이 검정색 생머리로 다녀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곧 이주민 학생은 상상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눈동자 색이 조금 밝으면 렌즈를 꼈냐고 혼나고, 피부색이 조금 밝으면 뭘 발랐냐고 혼났다. ‘여학생’, ‘남학생’의 복장 및 두발 규정이 각각 엄격하게 달랐고, 요구되는 행동 양식이나 역할 모두 정확히 성별이분법적이었다. 학교에서 규정한 표준/정상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눈에 띄게 했다. 학생들 내부에서도 그런 ‘괴짜’는 기피하게끔 만드는 근거이기도 했다.

우린 같지만 달라

명 우린 같지만 달라의 스틸컷. 노.똘.복 세 사람과 다른 사람 2명이 컴퓨터로 온라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림.
<명: 우린 같지만 달라>의 스틸컷. 노, 똘, 복 세 사람과 다른 사람 2명이 컴퓨터로 온라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림.

“2020년 서울의 한 마을에 청소년 퀴어 노랭, 똘추, 복순이 살았습니다. ‘노똘복’은 자신과 같은 퀴어 청소년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영화 <명: 우린 같지만 달라>은 주인공(?)이자 감독인 노똘복의 친구 찾기 여정을 그린다. 친구 두 글자(!)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퀴어 청소년 동료시민을 찾고 만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길거리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이기도 하고(누군가의 공격으로 찢긴 전단지를 다시 붙이기도 한다), 트위터에 홍보를 하기도 하고, 하나둘 연락해온 이들을 직접 만나러 가거나 줌 화면 속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은 커밍아웃의 경험을 공유하거나, 또는 커밍아웃이 어려운 이유를 털어놓거나, 퀴어 청소년으로서 친구를 어디서 사귀고 만나는지 정보를 나누기도 하며 아니면 그냥 마라탕 얘기를 하기도 한다.

이 영화를 수 차례 보면서 문득 청소년 시기의 몇 가지 장면들이 떠올랐다. 친구의 커밍아웃과 “선생님 아들이 게이라면” 테스트. 나의 불량한 기억력에 비해 이 장면들이 유독 생생한 이유는 그게 분명 불편한 경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퀴어임을 말한 친구를 퀴어가 아닌 척 “평범하게” 대하려고 했던 것도, 그런 테스트에 웃고 떠들며 동조했던 것도, 부끄럽고 미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혐오를 증명하다

내가 그 두 장면을 기억하고 불편해하며 때로는 쪽팔리기도 한 건 시절을 거듭하며 차별을 감각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현장 안에서 차별을 없애고 권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끊임없는 발견과 실천일 수밖에 없다. 차별금지법이 있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차별이 뿅, 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학생인권조례가 있다고 해서 모든 청소년에게 인권이 뿅, 하고 나타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최소한,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근거와 힘은 된다. 어, 이거 이상한데? 이거 차별적인데? 말할 수 있게 하는 것. 말하더라도 맞지 않고 비정상으로 내쳐지지 않는 것. 차별을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에서는 내가 차별을 받는 것도, 내가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도 보다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거나 개악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해롭다. 용기 있는 말과 행동을, 온전한 ‘나’로서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2018년, 충남에서는 주민발의안으로 인권조례를 폐지한 바 있다. 2020년 마침내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시행 중이나, 올초 폐지 움직임이 다시 거세다. 여러 이유를 나름 주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제15조, 차별 받지 않을 권리에 대한 반발이다. 차별금지 사유로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이 포함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폐지안과 개정안이 각각 발의되었다. 개정안은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 사유에서 삭제하는, 개정이 아닌 개악이다. 2007년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이후로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 사유에서 삭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소수자와 동료 시민이 상처 받고 싸워야 했는가. “빼야 한다”, 또는 “없애야 한다”는 것 모두 “너의 존재는 빠져도 된다”, “너의 존재가 없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지난 3월 10일 종료된 서울시의회 임시회에서는 폐지안과 개정안 모두 안건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음 회기에서 또 다시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기에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화가 나는 상황이다.

한편 지난 2월 서울시의회가 교육청에 의견제출을 요청한 학교 구성원 성·생명윤리 규범 조례안은 이러한 움직임들이 결국 성소수자 혐오일 뿐임을 드러낸다. 조례안을 살펴보면 ‘혼인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정신적, 육체적 연합을 의미한다’, ‘성관계는 혼인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개인의 불변적인 생물학적 성별을 의미하고, 이는 생식기와 성염색체에 의해서만 객관적으로 결정된다’와 같이 노골적인 성소수자 혐오·차별 조항들이 줄줄이 나온다. 서울시의회는 보수 기독교 단체의 민원을 수리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이는 결국 해당 조례안이 어떤 의미인지 필터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감수성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이는 성소수자 혐오·차별일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비인격화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청소년 시기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탐구하고, 이에 기반하여 관계를 맺을 기회를 차단시키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자신들이 규정하는 ‘정상’적인 학생이 되어야만 한다는,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맹목적인 오만함은 참 뻔뻔하기까지 하다.  그 모습들은 결국 자신들의 혐오와 차별을 고해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학생인권조례가 소중한 이유를 방증한다.

성소수자는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

성소수자가 여기 있음은, 사실 여기에나 저기에나 어디에나 있음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명명백백하다. 학교 공간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가 계속 된다. 지난 2월 서울 시민청에서 진행되었던 제15회 성소수자 인권포럼 “퀴어, 정의, 운동”의 <성소수자 없이 제대로 된 교육 없다> 세션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손지은 부위원장은 “지금까지 ‘성소수자’라는 말 자체가 교육과정에 들어간 적이 없”음을 이야기했다. 지난해 2022 개정교육과정 시안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사례로 ‘성소수자’가 드디어 등장하는데, 이마저 보수세력의 반발과 교육부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최종 확정안에서는 ‘성소수자’와 ‘성평등’이 모두 삭제되었다. 장홍재 교육부 학교교육지원관은 “성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인 청소년기에 교육과정 안에 성소수자가 사회적 소수자의 구체적 예시로 들어갔을 때 발생할 여러 청소년들의 정체성 혼란을 우려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교과서에서 ‘성소수자’와 ‘성평등’을 지운다고 해서 퀴어 청소년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 이주 외국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한 문장은 미미해보일 수 있다. 그 안에 “성소수자” 단어 하나는 더더욱 작아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순간 속에서 교실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보다 다양하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존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단어 하나의 삭제는 곧 그 기회의 박탈이기도 하다. 그리고 뭐가 어찌 됐든 간에 넣었다 빼는 것, ‘삭제’는 정말 굉장한 모욕이다. (화가 나니 잠시 숨을 돌리자.) 아무리 발악을 해봤자 성소수자는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

다음의 장면들

명 우린 같지만 달라의 스틸컷. 귀여운 그림체로 무지개 앞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명: 우린 같지만 달라>의 스틸컷. 귀여운 그림체로 무지개 앞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알량한 혐오와 차별 따위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할 수 없고 청소년을, 성소수자를 모욕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청소년들, 동료 시민들은 그간 평등을 향한 투쟁을 경험하며 쌓아온 단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이 펼쳐나갈 다음의 장면들을 기대한다. 물론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만으로도 상처가 쌓이고 굳은살이 베기기도 한다.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되물으며, 어렵게 낸 용기조차 다시 감추어야 할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답답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노똘복에게 서로가 있듯이, 이들이 새로운 동료들을 찾아나서고 만났듯이, 무엇보다 그 시간 속에서 울고 웃으며 어깨를 맞댈 수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우리가 있다. 폐지나 개악을 외치는 이들은 우리를 상대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쉽지 않으리라고, 장담한다. 혐오는 우리의 사랑과 우정을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 본 글은 고 변희수 하사 2주기를 맞아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에서 진행한 릴레이연재 중 하나로, 얼룩소(https://alook.so/posts/J5tyWlr)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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