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남성의 분리는 어떻게 위계와 결탁하는가? 성별 고정관념이 좋지 않다는 것은 어느정도 합의가 된 것 같은데, 그 구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사회는 여성과 남성 간의 위계적 차이 뿐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라는 구분 자체가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간과한다. 성별을 나누는 엄격한 잣대는 개개인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데 유용하다. 특히 군대나 감옥같이 사람을 일렬종대로 세워 구분하고, 구분을 토대로 명령에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인 공간에서 성별이분법은 지배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남성’에 스스로를 집어넣지 못한 것, ‘여성’에 스스로를 집어넣지 못한 것이 ‘그 사람’의 존엄을 박탈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누군가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것이며 규칙을 지키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 공동체는 누구를 위한 공동체인지, 그 규칙이 무엇을 위한 규칙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이분법으로 가득한 통제의 공간, 감옥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의자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트랜스젠더다. ‘감옥’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철창 속의 그곳은 교도소 밖의 이곳과 연결될 수 없는 곳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라. 감옥이 갖고 있는 시스템이 얼마나 이 사회와 닮아 있는지를. 교도소의 규율과 폭력은 다름아닌 사회의 용인과 필요로 인해 정착한 것이다. 사회 전반이 젠더규범을 통해 사람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수용소와 남성 수용소 앞에서 트랜스젠더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사실, 이 영화에 출연한 당사자들은 답을 알고 있다. 이들은 오래적 정체화를 마쳤기 때문이다. 이미 호르몬 치료를 받고 있거나, 개명을 완료했다. 혼란스러운 쪽은 다름 아닌 시스템이다. 규범에서 벗어난 새로운 존재와 마주한 시스템은 그 혼란과 불안을 폭력과 억압으로 해소한다. 감옥은, 그리고 시스템은 기록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지운다. 혐오와 박해의 굴레에서,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건강과 존엄을 훼손하고 한 사람의 존재를 말소한다. 그러나 이미, 언제나, 여기에 있던 이들은 말한다. “감옥에는 수많은 트랜스젠더가 있어요.”
감옥과 규범의 불협화음 속에서도 트랜스젠더의 시간은 켜켜이 쌓인다. 한계를 뛰어넘고 이분법을 횡단하는 그 몸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아 이야기를 지속한다. 그 몸은 어째서 차별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는가? 그 시스템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고, 그 폭력은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는가! 수감시설에 들어가 자유를 제한받는다고 해서 인권을 잃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형벌을 지고 있더라도, 트랜스젠더는 수감 이전부터 받았던 호르몬치료를 계속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성별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감옥의 이야기는 사회와 유리된 공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에서 드러나는 수감시설 속 트랜스젠더의 이야기 역시 결국 ‘이어짐’에 대한 이야기이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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