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한편의 극영화 같은 다큐멘터리였다. 짜임새있는 구성과 독창적인 비디오 효과, 풍부한 사운드와 개성있는 등장인물들이 브라질 학생/청소년운동의 전말을 탄탄하게 끌고 나간다. 영화는 2013년 무상교통실현운동을 시작으로 공립학교 통폐합 반대 운동을 거쳐, 극우파 정치인의 탄압과 폭력을 고발하고 시민의 연대를 주창하며 공교육 정상화를 외친다. 학생들은 주지사의 집앞에 찾아가 목소리를 높이고 가두시위를 하며 축제와 같은 혁명을 연일 경험한다. 학교를 점거해 학생의 손으로 직접 학교를 운영하고 일상이 혁명이되는 시공간 속에서 연대와 협력을,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경험한다.
브라질 학생운동의 핵심은 ‘빈익빈 부익부’에 있다. 영화에서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무상교통실현운동은 2013년 상파울루주 주지사가 교통비를 인상하면서 생존권에 타격을 입은 빈곤층 학생들의 반발로 시작되었다. 교통비 인상은 주거지 안에 충분한 인프라가 구축된 부유층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 내 문화시설이 부족해 대중교통을 통해 도시와 동네를 오가야 하는 빈곤층에게 이 문제는 심각하다. 공립학교 통폐합 역시 같은 문제다. 2015년 브라질 주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선거자금을 모으기 위해 공립학교 인원을 재배치하겠다고 선언한다. 한 반에 학생을 몰아넣고 공립교사는 축소해 90여개의 학교를 폐교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이 역시 사립학교에 다니는 ‘부자 학생’들에게는 큰 영향이 없는 사건이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당사자만이 그 심각성을 알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주지사 집앞에 찾아가 외치고 가두시위를 하는 학생들에게 ‘어른’은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건 폭력이고 불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지적하듯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쳤는가? 권리와 생존을 위협받았을 때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가르쳤는가? 아무리 말해도 귀 기울여주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려주었는가? 투쟁이 폭력이 되는 이유는 학교와 사회가 이것을 폭력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자의 목소리를 묵살하기 때문이다. 투쟁이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브라질 학생들은 스스로 시위대를 조직하고 거리로 뛰어나가 외친다. 온 몸으로 국가의 탄압에 맞서고 그 손에서 민주주의가 피어난다. 동질감에서 연합이, 연합에서 투쟁이, 차이에서 연대가, 연대에서 혁명이 피어난다. 결국 교통비 인상과 공립학교 통폐합은 결국 폐지되었다. 학생들은 연대와 자주의 힘으로 여론을 형성했고 시민을 설득하며 민주주의의 실현을 직접 이루었다. 다양한 사람이 섞여 마치 파티를 하듯 혁명의 현장을 기억하고 체현한다. 노래하고 선언하며 행진한다. 폭죽을 터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껴안으며 기쁘게 웃는다.
그리고 2017년, 다시금 거리는 경찰의 폭압으로 시름한다. 테메르 정권이 공교육 예산을 20년간 동결한 것이다. 두 차례 승리를 거머쥔 학생들이 다시금 거리로 나오자 상파울루 주지사는 학생을 상대로 발포허가를 내려버린다. 앞선 두 차례의 승리와 대비되는 폭압의 현장이 화면에 비친다. 극적으로 전개되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문득 원래도 혁명이란 시리즈 영화 같은 것이고 오히려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역동의 현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투쟁만 하면 세상은 지난하게도 반복된다. 지켜내는 만큼 붕괴하고 회복하는 만큼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계속 투쟁을 하는가? 왜 다시 거리로 뛰쳐나오는가?
메아리가 되고 파동이 되기 위함이다. 이 거리를 보라. 학생과 퀴어가, 흑인과 여성이 함께 달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금 힘을 되찾는다. 우리는 서로를 믿고, 서로를 보듬는다. 메아리가 되고 파동이 되어 세상에 열릴 것을 알기 때문에.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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