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 지향 혹은 성별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선언. 그리고 그에 따른 반응들. 일반적 커밍아웃의 과정이다. 나는 여전히 나를 무어라 선언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단어를 얹더라도 조금씩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고, 어떤 단어를 뱉더라도 조금씩 거짓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자기 확신이 있어 스스로를 어떤 단어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혹은 그렇게 명명한 뒤 조금 더 그 단어와 가까워지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기에 두려움에 자꾸 거리두기를 하려는 것일까? “너 게이야?” “너 레즈야?” 같은 질문에 이반지하가 했던 것처럼 “가끔”이라는 대답이 가장 와닿는 것 같다.
<귀귀퀴퀴>는 다양한 이들의 답변을 통해 ‘퀴어’라는 개념 그 자체 그리고 그 내부에 있는 여러 정체성과 취향의 흔들림과 부딪힘을 드러낸다. 퀴어를 매끈한 표면을 지닌 고정된 집합으로 여기지 않고 계속해서 변형되고 에너지를 지닌 채 움직이며 스스로 의문을 지니기도 하는 유기체처럼 묘사한다 느꼈다. 영화는 계속해서 질문한다. 감독의 질문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답변 이전엔 분명 많은 질문들이 있었을 것을 안다. 질문은 두루뭉술한 관념의 해상도를 높이는 작업과도 같다. 한 픽셀을 쪼개고 쪼개서 그 픽셀 안에 있던 서로 다른 색들을 드러내고 더 명확히 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곳에 보이지 않던 주름, 티끌, 다른 색, 디테일이 드러나게 된다. <귀귀퀴퀴>는 영상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퀴어의 비정형성과 불확실성을 표현하는 방식을 택한다. 말하는 이의 신체를 파편화하고 서로의 말을 겹치거나 부딪히게 하며 목소리를 변형하거나 반복한다. 또한 뜨개질, 실뜨기, 유리공예, 도자기 공예 등의 작업을 통해 영화가 퀴어라는 개념을 대하는 자세인 생성과 해체, 재생성의 과정을 보인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전시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에서 <귀귀퀴퀴>를 보았을 땐 심지어 트램펄린 위에서 영상을 볼 수 있게 해두었다. 그 위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흔들릴 수밖에 없기에, 영상도 우리와 같이 흔들리고 틀어지게 된다. 사실 전시에선 오랜만에 트램펄린을 타는 데 집중해 너무 신나게 뛰어버렸지만.
어떠한 용어는 인식을 만들고,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낸다. 반면 그 인식과 영역의 생성이 자연히 밖을 만들어 내고, 그 경계에 걸치거나 삐져나오거나 꽉 끼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용어의 경계가 확실하고 움직이지 않을 때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행히도 퀴어는 비정형적이고 모호한 개념이다. 그렇기에 계속 모습을 바꾸며 우리에 의해 이상해지고, 이상한 우리를 우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모호성과 의문을 지니게 만드는 것이 퀴어, 이상함, 기기괴괴의 본질이지 않을까? <귀귀퀴퀴>에서 볼 수 있듯 퀴어 내부에서도 서로의 취향과 생각은 너무 다르고 퀴어끼리도 서로를 이상히 여길 수 있다. 그럼 우리는 그 이상함을 긍정하며 서로에게 계속 질문하고, 그저 이 기기괴괴한 우리를 엮고 풀고를 반복하면 되는 것 아닐까. 말처럼 쉽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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