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노트: 혜나, 라힐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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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민족’, ‘순수혈통’, ‘단일 민족’. 오랫동안 한국의 민족성을 대표해온 단어들이다. 수많은 외국의 침탈로부터 한국을 지켜낸 정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2020년 한국의 거리를 둘러보자.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거리에 있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에 자리를 잡아 살아가기 시작한 건 오래된 일이다. 2018년 다문화 가구원은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는 한국 총인구에서 2%를 차지하는 수이다.

혜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태어난 후, 지난 24년 동안 같은 질문을 받아왔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어느 순간부터 혜나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질문 세례를 받기 일쑤기 때문이다. 질문을 한 사람들은 답을 들은 뒤 홀연히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찝찝함과 불쾌함을 감당하는 것은 오직 혜나의 몫이다. 어떤 이들에겐 금방 잊혀질 대화들은 혜나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는 상처가 됐다.

요즘 혜나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아들 라힐이의 미래가 자신의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라힐이는 사람들의 질문 세례를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갈까. 사람들의 시선과 질문이 변하지 않는 한, 혜나의 미래도, 라힐이의 미래도, 라힐이가 낳은 자녀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매일 외국인이냐는 질문을 받고, 외국인이 아닌 이유를 대답하면서 비슷한 소외를 경험하고 피로를 겪을 것이다.

사람들은 혜나의 정체를 묻고 혜나는 해명 대신 존재로 답한다. 사람들이 멋대로 긋는 경계를 딛고 혜나는 말한다. “그냥 다 같이 섞여서 있는, 다 같은 사람이잖아” 한국인과 한국인 사이. 거기에 혜나가 있다. 아무런 판단도 필요치 않는, ‘평범한’ 가족이 있다. 끝없는 질문을 멈추고 혜나를 마주하라. 이젠 우리가 혜나의 질문에 답을 할 차례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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