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노트: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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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일본 동부 지역을 휩쓸고 간 관동 대지진과 쓰나미, 핵발전소 사고까지. 재난이 지나간 자리에선 물류도 의료시설도 멈추었다. 피난준비 구역으로 지정된 도시의 사람들은 몇 시간 만에 짐을 싸서 피난길에 올라야 했지만,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 역시 남아있었다. 이렇게 9년 전 일본에서 방사능 피폭 지역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2020년 한국에는 바이러스에 의해 고립된 사람들이 있다. ‘표준화’된 재난 대응 방식으로 인해 바깥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장애인이 그러하다. 때문에 장애인은 재난과 위기 상황에서 안전한 공간을 선택하고 생명과 건강을 담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는 더 이상 불편의 범주가 아닌 삶의 위협이 된다. 자연재해와 더불어 감염병 또한 모두에게 같은 무게의 위기로 경험되지 않았던 것이다.

재난은 장애인이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애의 다양성만큼 여러 모습으로 찾아오지만, 장애인을 위한 개별적인 ‘피난’ 계획은 마련되지 않아왔다. 다양한 요구를 일괄적 격리로 해결하려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일상적으로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장애인을 특히 취약한 상황에 노출시켰다. 코로나19 상황 초기, 정부는 장애인이 자가격리 대상자가 될 경우 지정된 별도의 격리시설로 이동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장애인이 자신의 집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격리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부재했다. 활동지원이 필요한 자가격리 대상자가 늘어날 경우 어떻게 활동지원사를 안전하게 확보할지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대신 장애인을 자가격리가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일괄적으로 판단하여, ‘안전’과 ‘보호’를 이유로 시설에 모으기를 선택한 것이다.

문제는 공간에 대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감염병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예방법, 재난상황에서의 지원대책은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기에 누구나 차별 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 초기 재난방송에서는 수어통역이 부재하거나, 있더라도 수어통역사를 제외하고 방송이 송출되기도 했다. 한편 온라인 개학이 시행되면서 장애 학생에게 충분한 온라인 교육장비나 보조인력이 배치되지 않아 교육 참여가 어려운 상황이 다수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현재 교육 시스템을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 구조와 체계가 장애를 가진 사람의 구체적인 일상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돌봄서비스가 중단되고 사회복지 시설이 잠시 문을 닫을 때에도 장애인이 평소처럼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 가능한 환경을 조성하라는 요구는 처음이 아니다. 2016년 메르스 당시, 장애인단체들은 정부를 상대로 장애인을 고려한 감염병 관리 매뉴얼을 요구하며 소송을 냈지만 정부는 법원의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소송은 4년째 진행 중이다. 재난 상황 시에 대처할 기본 매뉴얼조차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19의 위기도 이미 예견된 재난이었다.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지역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장애를 가진 몸의 경험과 삶이 온전히 존중되어, 모두가 있는 그대로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 우리는 그러한 공동체를 통해서만 지진과 쓰나미, 핵발전소 사고로부터 각종 감염병까지의 수많은 재난 아래에서도 ‘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 이에 재난에서 장애인이 마주하는 고유한 문제들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실질적 대응책을 세우는 것은 당장의 재난을 극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재난의 극복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완수되지 않는다. 모두가 피난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제나 모두의 일상을 온전히 보전하는 사회적 인프라의 존재를 전제로 성립한다. 이에 우리는 재난상황에서의 장애인의 권리보장을 논함과 동시에, 단순히 권리와 보장의 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 연속적인 삶, 그 자체에 대한 실질적 존중과 연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 불평등한 재난에 대응하는 방식은 재난 이후 재편될 사회를 결정할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현, 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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