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노르웨이의 의사는 말했다.
“평생 이 일을 하는 동안 환자에게 돈을 내라고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노르웨이는 공공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응급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돈을 내라고 말하는 끔찍한 일도, 경제력이 치료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일도 없었다. 공공의료의 원칙은 ‘치료가 얼마나 필요한가’와 ‘소외되는 사람이 없어야한다’ 두 가지이다. 필요와 평등의 원칙은 절대적으로 효율과 경쟁, 성장 따위의 것들에 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의 공공의료는 자본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점점 시장경제에 포섭되었다. 이탈리아는 전체 의료 중 공공의료의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공공의료예산을 대폭 줄였다. 프랑스의 공공병상은 2017년 시장주의자 대통령 당선 이후 급감하여 2010년부터 총 1만 7,500개의 공공병상이 사라졌다. 무상 의료 시스템을 갖춘 국가로 대표되는 영국 역시 시장경제 논리로 보건의료에 접근한다는 것을 <컨베이어 벨트 위의 건강>은 고발한다. 공공의료를 갖춘 국가에서조차 ‘공공성’의 힘은 약해졌다. 공공의료가 비교적 보편적인 유럽이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이다.
한국의 공공의료 비율은 매우 낮다. 2017년 기준으로 인구 1천 명당 공공병상은 1.3개뿐이다. 전체 병상 수 중 공공병상의 비율도 10%에 불과하다. 적자를 이유로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결과, 청도 대남병원에서 총 116명의 코로나19 확진자와 7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민간병원은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음압병상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지 않다. 대구의 국가지정 음압병상 수는 10개에 불과하다. 결국 병상이 부족해 집에서 입원을 기다리던 확진자가 사망했다. 의료진 부족으로 코로나19에 긴급 투입된 의료진들은 몇 달 동안 일상 없이 사투 중이다. 허술한 공공의료 시스템으로는 감염병 대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공공의료는 감염병 대응만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현재 의료시스템이 가진 배타성과 취약성을 감염병이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자본에 흔들리는 공공의료, 누군가 배제되는 공공의료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보건의료의 시장화는 환자에게 더 나은 의료에 대한 ‘선택권’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싶은 사실은 ‘아플 때 어디서든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 이지, ‘내가 원하는 날짜, 시간에 원하는 의사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 가 아니다. 보건의료가 시장화되며 도입된 포괄수가제에 의하면, 얼마나 흔한 질병인가, 치료가 얼마나 까다로운가 등을 기준으로 환자의 ‘값어치’가 매겨진다. 정신질환의 치료나 환자에 대한 정서적 지지와 신뢰는 어떻게 수치화될 수 있을까? ‘모든 국민’이었던 의료서비스의 대상자가 ‘질병의 가치에 마땅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좁혀진다. 효율적인 운영으로 적자를 내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병원은 수익성을 우선시하게 된다. 의료서비스는 상품이 되고 환자는 소비자가 된다. 이 상품을 사기 어려워지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질병 점수가 낮은 만성질환자, 치료비를 지불 할 수 없는 사람, 한국 국적이 없는 사람…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치료의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병을 감당해야 될 것이다.
치명적인 것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부실한 공공의료이다. 앞으로 제대로 된 공공의료를 실현해내지 못한다면, 시장화 된 의료체계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재난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연 그땐 지금보다 나은 조건으로 재난에 대처할 수 있을까? 누구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병원이 환영하는 소비자일까? 코로나19 속에서 필요와 평등이라는 공공의료의 원칙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안전한 삶은 치료가 필요한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보장된다. 인간에겐 도요타의 자동차들처럼 가격표를 달 수 없다. 건강은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이 아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요다, 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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