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는 박근혜정권 퇴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의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두가 변화를 염원하며 광장으로 나서던 그때, 한 노동자는 “근데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습니까, 저는 사실 큰 기대는 안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노동자의 자조적인 예언은 코로나19 시대에 현실이 되었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이 시작되자, 정부 당국은 여러 예방책을 제시했다. 가능하다면 재택근무를 할 것, 사람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손을 자주 씻을 것, 아프면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쉴 것. 이러한 예방책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없었다. 택배를 들고 나르고 분류해야 하는 노동자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을까? 좁은 공간에서 쏟아지는 전화에 쉴새없이 응대해야 하는 콜센터의 직원들이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며 자주 손을 씻을 수 있을까? 언제 직업을 잃을 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하며, 항상 회사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오늘은 아프니 집에서 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계급화된 사회에서 스스로에게 결정권이 없는 노동자는 너무나 다양하며 많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노동을 기준으로 짜인 정부의 예방책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이 노동자들의 사업장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부패한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세상은 비정규직에게, 육체노동자에게, 저임금노동자에게, 그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충분히 달라지지 않았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0년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전년동월대비 총 127만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임시직, 일용직과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 65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확진자 수가 차츰 줄어들며 유래없던 감염병 위기에 잘 대처했다는 찬사 뒤편에서 ‘재택근무’가 불가능하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했던 노동자들의 삶이 스러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사업장이 폐쇄된 노동자들을 위한 지원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부터 법적으로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특수고용,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들은 배제됐다. 이에 노동자들이 문제제기하자 정부는 각종 증빙서류를 제출 시 ‘긴급고용안정지원금’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을 서류로 입증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에겐 이마저도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재난상황에서 주어진 고용안정지원금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주어진 권리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증명해야만 얻을 수 있는 권리였다. 이미 노동하고 있지만 노동자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들의 노동이 ‘정상적인 노동’에 부합하지 않고, 재난상황에서 ‘함께’ 고려조차 되지 못하는 대상이었음을 드러냈다. 모두 같은 재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불평등한 현실의 체제는 우리를 구획하고 구분지었다.
<청소>의 노동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부터, 하루를 끝낸 후까지 계속되지만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노동은 코로나19의 시대에도 이어진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확진자와 의심자를 상대하며 밤낮없이 일하는 의료진은 날마다 언론의 주목을 받고 전국민의 응원과 감사의 대상이 되지만, 방역작업을 하는 청소노동자는 당연한 존재가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늘어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 역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노동은 성역시될 때, 누군가의 노동은 당연한 것이 된다.
박근혜의 탄핵이 선고된 날 “촛불승리 만세!” “우리가 승리했다!”라고 외쳤던 우리들, K-방역을 연일 칭찬하는 쏟아지는 외신들의 기사들에서 자긍심을 갖는 우리들. 그 “우리”는 누구일까? 현재 “우리”는 어디까지가 “우리”일까? “우리”가 모두가 될 때까지 그 누구도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레나, 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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