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주민들이 이주를 요구하는 이유는 월성이 싫어서가 아니다. 월성을사랑하지만 월성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월성원전에서 3.5km 거리에 사는 오순자는 암으로 죽은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한다. 월성원전에서 1km거리에 사는 황분희는 손주의 몸에서 성인 평균의 3배에 달하는 삼중수소가 검출되었다며 울먹인다. 월성에서 짧게는 30년, 길게는 70년이상을 산 사람들이 모두 말한다.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고.
한국수력원자력공사와 국가는 이 긴 세월을 무시하고 숫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든다. 발전소로부터 914m까지만 방사능의 영향권이기에 그 밖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주시켜줄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아픈 몸과 일상을 집어삼킨 불안 같은 이야기는 한수원의 셈과 법원의 판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월성은 핵발전소 부지이기 전에 누군가 일상을 가꾸고 추억을 회상하고,미래를 그리는 삶의 터전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담고 있기에 삶의 공간은 삶만큼이나 무겁고 귀하다. 몸에서 나오는 삼중수소의 기준치, 선고되는 배상금, 핵발전소를 멈췄을 때의 손실액… 이런 숫자들은 ‘안전한 삶’에 앞설 수 없다. ‘산다는 것’의 무게는 ‘손익’의 숫자와 함께 저울에 올라갈 수 없다.
밤낮 없이 서울을 밝히는 불빛은 어디서 온 전기일까.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은 그곳에만 머물지 않고 흘러가서 서로의 공간을 채운다. 월성에서 300km 떨어진 곳에서 쓰는 에너지가 누군가의 삶의 공간을 무너뜨리면서 만들어진 에너지라면, 안전한 삶의 공간과 안전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은 연결되어 있다. 안전한 에너지와 안전한 삶의 공간을 위한 무게를 지는 것은 월성주민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안전한 삶의 터전을 위한 우리의 연대는 거리를 뛰어넘을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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