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노트: 우리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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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은 통제를 위한 공간이다. 모든 것은 관리하기 쉽게 통제된다. 밥 먹는 시간, 취침시간, 옷, 외모, 그리고 성별까지도. 이미 트랜지션 중이었든 수감생활 동안 남성으로 정체화했든 상관없다. 여자교도소에 있는 모든 재소자들은 ‘여자’여야 한다. 나는 남자라고 아무리 말해도, 심지어 서류상으로 남자여도 여자 교도관에게 알몸 수색을 받아야 한다. 수염을기를 수도, 처방 받아오던 호르몬을 맞을 수도, ‘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없다.

여성들의 공간에 침범한 남성들은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웬걸. 여자교도소에 있는 트랜스 남성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욕망의 대상이다. 재소자들 중 가장 실세인 여자만이 이 남자들을 차지할 수 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서 여자교도소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남성’이 되어야 한다.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에게는 여성되기를, 누군가들에게는 남성되기를 요구받는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 남자 아니면 여자로 나누려고 하는 감옥 시스템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습게 느껴진다.

브라질에도 LGBT 재소자들을 위한 제도는 있다. 그러나 법을 어긴 자들은 법에 의해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는 논리는 너무나도 쉽게 이들의 시민성을 빼앗는다.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빼앗긴 공간에서 트랜스 남성들은 건강, 안전, 정의 그 무엇도 보장받지 못한다. 사회의 성별 체계에서 벗어난 몸 자체가 규율의 대상이 되고 처벌 대상이 된다. ‘트랜스’이기때문에 감옥에 온 것이 아님에도 ‘트랜스’인 것에 대한 처벌까지 같이 받는다. 감옥 안에서 교도관들에 의해 허락된 성별밖에 될 수 없기 때문에, 나로서 살겠다는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빼앗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 트랜스 남성들의 요구는 분명하다. 트랜스 남성으로 감옥에 왔으니, 트랜스 남성으로 수감생활을 하게 해달라는 것. 이들은 오로지 두 개로만 나뉜 공간에서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 저항한다. 왼쪽과 오른쪽. 두 줄 간의 사이, 그 거리에 있는 그대로존재하는 이들을 보라.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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