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유다. 그게 당신이 길을 잃은 이유다.”
정신장애인 시설에서 나오게 된 사람들의 목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것들이었다. 구속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것, 결혼과 출산이라는 버겁고 벅찬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가족을 갖는 것, 둘만의 장소에서 지내는것,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정돈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일상이었다.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다면, 저한테도 평등해야죠.”
왜 누군가는 끊임없이 법과 평등과 자유의 이름으로부터 배제됐으며 오롯한 자신의 공간마저 지니지 못했나. 때때로 사회는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말로, 혹은 정신질환자도 ‘정상’이 될 수 있다는 말로 치료와 격리를 강요했다. 그러나 시설 안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빼앗겼다. 나의 공간을 꾸려나가는 일이나 나에게 맞는 노동환경을 조성해가는 것처럼 평범한 삶의 궤적에 오르고자 할 기회를 빼앗겼다. 사회가 주목한 것은 우리의 질환이 가져올 혹시 모를 위험이었지 우리의 삶이 아니었다.
사회가 정신장애인에게 정상의 기준을 들이미는 한, 격리와 수용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적 집단으로 바라보는 한, 사회는 격리수용소의 거대한 확장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탈시설은 단순히 ‘격리해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수용소의 논리’는 불편한 것들을 한데 묶어 어느 한켠에 숨겨두면 끝이라 여기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끝없는 의문이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선 약물치료를 너머 어떤 사회적 지원이 마련돼야 하는지, 시설의 밖에서 어떻게 오롯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담론이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전 제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점점 나아진다는 것. 물리적 탈시설을 경험한 슬라바코는 위와 같이 증언한다. 점점 나아지는 삶을 경험한다는 것, 그리고 점점 나아지는 삶을 꾸려간다는 것. 탈시설은 수용소의 논리에 대한 정면의 도전이다. 숭고한 개인의 사소한 일상을 위한 위대한 도약이다. 그러니 감히, “정신장애인에게 삶을 허하라”.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댓글
타인을 비방하거나 혐오가 담긴 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