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세상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어떤 사건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에게 다가와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에는 아흔이 다 된 할머니, 김말해가 살고 있다. 말해는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냈다. 그 삶은 온전히 말해의 것이지만, 말해의 기억엔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내 하루하루 살아온 것을 일기로 써 모으면 누가 봐도 안 알겠나.” 아궁이 앞에 앉아서 타는 장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TV 소리만 가득한 방안에 누워 마음속 응어리로 남아있는 기억을 말한다.
축 늘어진 살에 붙은 파스처럼 질긴 삶이다. “뭐 하다 이리 됐노?” 말해는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말에 일찍 결혼을 해치웠다. 그러나 겨우 스물세 살 먹었던 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집을 나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은 ‘빨갱이의 자식’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했다. 학살의 역사는 여러 모양으로 변주되어 또다시 말해의 일상을 헤집어 놓는다. 그 역사를 살아낸 기억은 말해를 투쟁의 현장으로 이끈다.
고사리 파먹고, 손톱 발톱 갈라지도록 일해서 일궈놓은 밭, 그 위로 765kV 대규모 송전탑이 들어섰다. 집 앞 풍경이 변해간다. 옛날 호롱불 켜면서도 살았던 골짜기를 기억하며 말해는 추운 겨울 피켓을 들고 한전 앞에 선다.
이 투쟁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내내 치열하게 살아왔던 기억, 그 삶이 바로 투쟁이었다. 말해의 기억을 들음으로 우리는 그가 수없이 지나왔을 사계절을, 긴 세월을 천천히 따라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역사가 되어버린 ‘삶’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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