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발자취를 남기고 기록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탄압받아야만 했다. <레드헌트>를 상영했던 1997년이 그러하다. 제주4.3을 다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는 한순간에 이적표현물이 되었고, 국가는 경찰을 앞세워 영화제 기자재를 압수하는 등 상영장을 봉쇄했다. 당시 집행위원장은 구속되었고 인권운동사랑방은 압수수색 당했다. 이처럼 어떤 기억들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진술하는 것만으로도 지난한 방해에 시달린다.
소리를 내도 괜찮을까, 저 눈빛들이 날 감시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 날 또 죽이지 않을까. 명치 언저리에 자리 잡은 불안은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봇물 터지듯 나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조용한 세상 그 아래에 갇혀 있었다.
지금도 제주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살고 있다. 감시와 방해를 부단히 받아온 사람들은 살기 위해 입을 틀어막아야 했음에도 말 한마디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한다. 용기를 내어도 이 영상을 누가 볼까 두렵고 자식이 부끄러워할까 목소리로만 증언한다. 이들에게 제주4.3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다.
제주는 다랑쉬굴에 있던 많은 이들의 자취를 시멘트로 덮어 끊어버리고, 눈물과 피로 물들었던 정방폭포를 관광지로 만들었다. 제주4.3을 묻고 지내온 날들이 쌓인 오늘의 제주에서는, 4.3 추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이 국가가 벌인 학살에 대한 사과와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제주4.3의 완벽한 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완성이 아닌 터져 나오는 봇물의 시작을 향해, 우린 광장에서 제주4.3을 이야기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담지 못했던, 70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감춰진 이야기들과 광장에 서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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