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에서 비행기에 탑승한 한 승객이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탈리아인 남성을 테러리스트로 생각해 신고했다. 테러리스트로 오해를 받은 남성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경제학과 교수로, 기내에서 수학방정식을 적어가며 강연 준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살펴보면 우리 안의 감시와 의심의 문화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신고를 한 사람은 이 남성이 피부 색깔이 어둡고 곱슬머리에 외국인 억양의 영어를 쓰니 흔히 테러범으로 연상하는 ‘중동’ 지역 출신이거나 이슬람인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게다가 알 수 없는 기호로 된 ‘미분 방정식’ 때문에 두려움이 커져 테러리스트로 확신하게 된 것 같다.
여기서 떠오르는 기억 하나,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진실이라고 믿었던 80년대 간첩신고. 학교에서는 반공교육을 하면서 신고정신을 강조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신고 대상이었을까. 당시 반공교육에서는 등산객, 낚시꾼 차림으로 아침 일찍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이나 산에서 배낭을 메고 노숙하거나 군사 시설 사진을 찍는 사람, 담배 등 일용품을 사면서 물가 시세를 잘 모르는 사람이 간첩이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을 경계하며 혹시 간첩이 아닐까 의심을 품고 살아왔다.
미국의 9.11 테러의 경험과 최근 유럽에서의 테러, IS의 등장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테러에 대한 두려움은 안전과 안보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고 설사 자유가 제한되더라도 테러 방지를 이유로 여러 법률과 조치를 승인하게 만들었다. 안전과 안보를 위한 법과 제도는 사전적인 조치를 의미한다. 위험요소를 찾아내 그에 대비하고 미연에 방지하려는 시도는 감시의 강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감시는 의심의 목록을 작성하게 된다. 의심은 모두에게 향할 수도 있지만, 특정한 누군가에게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이슬람인 또는 이주민이거나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이거나 가난한 사람이다. 결국 감시는 특정한 사람들이나 집단을 관리하거나 통제하길 원하는 조직이 이들의 세세한 일상까지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감시는 의심의 대상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감시의 대상은 위축감으로 스스로를 검열하면서 통제의 방식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감시를 받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보호받고 있다는 안심과 함께 의심의 목록을 수용하고 확장하는 데 침묵으로 동조하게 된다. 의심의 문화는 감시를 생산하고, 감시는 의심의 문화를 확장한다. 그렇게 의심의 문화와 감시는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게 된다. 결국 감시는 의심의 목록을 작성해 그들을 차별하고 배제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감시자로 만든다. 이것은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를 흔들고 사회적 차별과 분리를 강화한다.
감시는 여러 가지 이유로 행해진다. 단지 테러나 범죄를 막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권력 남용 막기 위해서,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으로부터 노동자와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감시는 사회 구성원들의 보호에서 통제에 이르는 연속선 위의 어느 곳에든 위치할 수 있다. 현재 감시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신뢰의 눈빛을 보내야 할 이웃과 이방인에게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면서, 정작 감시를 늦추지 않아야 할 권력에는 무력한 의존을 하고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한다.
랑희 (인권운동공간 ‘활’, 공권력감시대응팀)
무차별 감시. 지난 2013년 6월,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것은 단지 미 국가안보국(NSA)가 인터넷에 대한 감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근대 국가에서도 범죄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시민들의 프라이버시는 일정하게 합법적으로 제한되어 왔다. 범죄 혐의가 있다면 법원의 영장 하에 사적 공간에 대한 압수수색과 통신의 감청이 허용되어왔다. 하지만 스노든이 폭로한, 현대의 감시 문제는 바로 ‘무차별 감시’라는 점에서 다르다. 구체적인 범죄 혐의가 없어도 단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면 감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슬람 신자라든가, 페이스북을 통해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글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의 타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통과된 테러방지법에 따르면, 범죄혐의가 없어도 국가정보원에 의해 ‘테러위험인물’로 지정될 수 있다.
저인망식 데이터 수집. 이러한 무차별 감시는 특정인을 자의적으로 감시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잠재적인 테러 정보의 수집을 이유로 무고한 시민의 정보들이 마구잡이로 수집된다. 미국가안보국은 통신사를 통해 모든 시민의 통화 기록과 백본망을 흐르는 인터넷 패킷을 무조건 수집하고 보았다. 한국의 수사기관도 구체적인 혐의도, 법원의 영장도 없이 통신사로부터 시민의 가입자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스노든 폭로를 도왔던 저널리스트 글렌 그린월드는 “이러한 정보의 집적이 오히려 테러 예방을 위한 효과적인 정보의 탐지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설사 테러 정보의 탐지에 도움이 되더라도, 우리의 삶의 기록을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수집해도 괜찮은 것일까?
정보원. 영화에서 정보원은 오히려 타깃에 체포를 위해 미끼를 던지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현대 정보사회에서 타깃을 감시하는 것은 전통적인 정보원(프락치) 없이도 가능하다. 식당에서 음식을 사진 찍어올릴 때, 버스 요금을 결제할 때,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를 때, 아니 심지어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넣고 있기만 해도 내 일거수일투족은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인공지능 정보원들은 양심의 가책도 느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무차별 감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면 걱정할 것이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집안에 CCTV를 설치해서 경찰이 모니터링 하도록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집에서 범죄를 모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숨길 게 없으니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어도 상관없다는 사람은, 말할 게 없으니 표현의 자유가 없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에드워드 스노든)
오병일 (정보인권연구소 이사)
아무래도 “테러” 또는 “국가안보” 라는 틀에 맞춰 각국의 정보기관을 찍어내는 공장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니면 정보기관의 사건 조작을 위한 필독 교과서나, 테드 강연 영상 또는 숨겨진 유튜브 강좌 채널이라도 있다든가요. 혹은 어쩌면 각국의 정보기관이 이 영화 <(테)에러>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사건 조작 방법론을 공부해 써먹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국 FBI가 연출하는 “적당한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기!” 와 한국 국가정보원이 연출하는 “적당한 시민을 북한 추종 간첩 어쩌구로 몰아가기!” 가 이렇게까지 닮을 수는 없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FBI 자리에 국정원을 넣고,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종북 간첩이라는 말로 대체하면? 이럴 수가, 불과 작년까지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과 거의 똑같습니다.
본 영화 관람 전 또는 관람 후, 인터넷에 ‘국정원 프락치 공작 사건’을 검색해 그 내용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정보기관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에서 연출되고 만들어지는 가짜 테러 사건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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