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5/24~25), 17회 성소수자 인권포럼이 한빛미디어에서 이틀 간 열렸습니다. 첫날 메인 세션 ‘민주주의 지키는 성소수자 지키는 민주주의로!’에는 서울인권영화제 고운 활동가가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의 활동을 정리하는 발표를, 둘째날 ‘트랜스-프렌들리 에티켓(트티켓)으로 시작하는 트랜스젠더 친화적 환경 만들기’에서는 소하 활동가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트랜스인권팀으로 사회를 보았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의 바지런한 자원활동가 나기가 이번 인권포럼에 다녀 온 후기를 공유합니다.

원래 3월로 예정되어 있던 성소수자 인권포럼이 탄핵 정국과 맞물리며 다음을 기약한 지 두달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우리에게는 더 많은 광장의 경험이 생겼고 남태령, 한강진, 경복궁 앞에서 일어난 수많은 연대와 환대의 메시지를 켜켜이 쌓으며 광장의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평등수칙을 만들고 더 많은 소수자 정체성을 드러내며 퀴어가 살아있음을, 이전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당신의 곁에서 당신과 함께 당신의 같은 존재로서 여기에 있음을 알렸습니다.
광장과 거리에 투쟁의 빛이 켜진지 4개월이 지나, 4월 4일,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됐습니다. 동시에 대선 정국이 펼쳐지고 우리는 다시 광장에 남았습니다. 차별금지법을 가지고, 동성혼 법제화와 농민법 제정을 주장하며, 장애인 이동권과 탈시설 권리를 말하며, 고공에 서있는 해고 노동자의 이름을 부르며 말이지요. 이 기운을 이어 지난 주말(5.24-25) 한빛미디어에서 성소수자 인권포럼이 열렸습니다. 총 8개의 섹션을 통해 윤석열 파면 이후 한국 사회가 만들어 가야하는 변혁적 시대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혐오와 선동을 일삼는 극우 정치를 바라보고, 내면화된 폭력을 되돌아 보며, 앞으로 더 많이 만들어 나가야 할 부딪힘과 마주침에 대한 고민할 수 있었지요.
저는 8개의 섹션 중 3개의 섹션에 참여했습니다. 25일에 있었던 ‘민주주의 지키는 성소수자 지키는 민주주의로!’, ‘의료화와 탈의료화를 넘어 – 의료인 당사자, 활동가가 함께만들어 나가는 건강담론’과 26일에 있었던 ‘에이즈 & 혐오의 역사 40년 : ‘양보갈’부터 ‘카일리’까지’를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인권 포럼의 주제를 ‘감염병과 건강 담론’으로 정했기 때문에 세 섹션을 들으며 ‘감염’에 대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HIV/AIDS는 동성애-퀴어와 성노동-윤락여성에 대한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는 제가 일부 SNS와 광장에서 목격했던 ‘오염된’ 존재에 대한 혐오와도 일맥상통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안의 혐오와도 마주하였습니다. 문득 내가 감염병에 대한 명확한 정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u=u라고 하니 그냥 그렇구나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HIV/AIDS는 현대에 와서 통제 가능한 질병이 되었습니다. 꾸준한 치료와 방지로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으면 바이러스는 전파되지 않습니다.(u=u) 처음 에이즈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1980년대와 비교하면 좋은 예방약과 치료제가 개발되어 자신의 수명만큼 잘 살 수 있고(2000년대 전까지 감염은 곧 죽음이었기 때문에 에이즈가 ‘20세기 흑사병’이라고 불렸을 정도라고 합니다.)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HIV/AIDS에 대한 공포는 여전할까요? 머리로는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누군가가 바이러스 보균자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멈칫하게 되는 걸까요?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과 무관하게 사회에서 지속되는 낙인, ‘오염된’ 존재에 대한 공포,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오인과 괴담. 이 모든 것이 찰흙마냥 뭉쳐져 당사자를 고립시키고 멍들게 하는 폭력이 되는데 왜 우리는 이 메커니즘을 끊어낼 수 없는 걸까요?
감염자에 대한 낙인은 이주민, 동성애 남성, 성노동 여성, 지하화된 퀴어 커뮤니티 등 다양한 존재와 얽히며 약자,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집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가장 쉽게 통제하고 처벌할 수 있는 존재에게 떠넘기고 구속과 퇴출, 징벌을 통해 사회의 공포를 무마하려는 것이지요. 1980년대 에이즈는 동성애자 남성의 질병이었고 2000년대에는 ‘윤락여성’의 질병이었으며 현재는 어떤 성적 실천을 하는 (퀴어)집단의 질병이 되었습니다. 특정 정체성, 또는 집단을 바이러스의 보이지 않는 장막으로 만들어 그 집단 내부만의 문제로 치환하고 거기에 속하지 않는 ‘정상적인 몸’과 삶의 궤도는 마치 무균지대인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병균, 바이러스, 감염병은 모든 삶에 우연히 마주치고 안착하는 것이지 특정한 존재가 퍼트리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애시당초 깨끗하고 무해했던 적이 없으며 어떤 궤적도 무균실이 될 수 없습니다.
정상성과 무균상태에 대한 상상된 안정감은 나와 다른 존재를 나와 반대의 자리에 올려놓고 불결한 존재로 타자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오염된’ 상태에서 삶을 시작했으며 감염인의 삶도 사회의 일환이라는 걸 이해했으면 합니다. ‘안전한’ 사회란 모든 병/균이 삭제된 세상이 아니라 불온함 몸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감염된 몸으로 생계를 꾸리고 친구를 만들며 사람과 관계맺고 나의 질병과 통증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 건강권과 질병권에 대한 폭 넓은 대화가 오가는 사회야 말로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입니다.

저는 지난 4개월간, ‘어떤 몸이든 전부 환대하고 말리라.’라는 마음으로 광장에 나갔습니다. 여성이든, 퀴어든, 장애인이든, 성노동자든, 이주민이든, 당신이 누가 됐든 이 광장에 혼자 쓸쓸하게 세워두지 않으리라는 다짐이었습니다. 제가 부당한 세상에 느끼는 분노는 자주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고립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광장이 그 누구도 버려두지 않기를, 훌쩍 떠나버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에이즈의 40년 역사를 톺아보며 나왔던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퀴어가 과장에 나와 환호받았는데, 과연 감연인 역시 이곳에서 안전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는가?”
앞으로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하는 갈등과 긴밀하게 스며들어야 할 서로의 삶이 제게 과제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만, 의외로 별 거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유의미한 일일 수 있고요. ‘만남’ 말입니다.
실은 말입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나와 너의 구분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주민의 이야기에 왜 그렇게 네가 우울해하고 분노하느냐 물으면 저는 그다지 논리적인 대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왜 이렇게 사회적 재난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느냐는 질문에 ‘언젠가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라는 대답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 남의 일 같지 않고 내가 겪는 부당함과 구분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계속 만나고 이야기 듣고 동료가 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 태어나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 어떤 불온한 몸으로도 이 생을 끝까지 살아냈으면 좋겠습니다.
트랜스젠더가 안전한 사회는 여성에게도 안전합니다. 장애인이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아이와 노인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 감염인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공포와 혐오를 넘어 더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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