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족이라는 말로 국가가 공적 지원을 시작한 것이 2008년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배우자와 그 자녀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다문화가족지원법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말은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당사자들에게 차별이 되었다. 한국인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한 구별이 될 때 그것은 인종화된 언어가 되어 ‘다문화’라는 범주 속 사람들을 향한 폭력이 되었다. 이름 대신 다문화로 불리고, 다문화는 뭔가 부족하고, 왕따 당하고, 피부색이 거무스름하고, 한국어가 서툴다거나, 불쌍한 존재로서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타자화된 것이다. 그러한 타자화는 때로는 통계수치로 왜곡되고, 방송 프로그램 속에서 잘못 그려지고, 영화에서 다시 범죄자로 그려지곤 한다. 거기에 언론 보도는 다문화학생, 다문화청소년, 다문화여성, 다문화군인, 다문화은행원 등 끊임없이 개인보다 집단의 정체성을 부여하며, 한국인과 다른 존재로서 칭찬하거나 비난했다. 그러한 사회적 배경과 개인적 맥락 속에서 혜나는 성장했고 라힐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남편이 이주노동자 출신의 영화감독 로빈 쉬엑이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또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으며 한국에서 나고 자란, 소위 다문화가족의 자녀인 자신에게 수없이 상처를 입힌 보통의 한국인들이 미처 인식해 내지 못한 차별이 있다. 여전히 순혈주의에 사로잡힌 민족주의 의식이 뿌리 깊게 한국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문화 시대’라는 말은 선포되었지만, 다문화라는 언어적 의미와 이데올로기로서의 다문화주의 그리고 정책과 제도로서의 다문화 정책은 아직도 혼선과 혼돈에 놓여있다. 그사이에 자라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견디기가 힘들다.
나를 나로 보아주는 일, 나의 이름이 온전히 불리고, 내가 가진 정체성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리고 교차성을 읽어내는 일이 당연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여성이 여성이기만 하지 않듯이, 남성이 남성이기만 하지 않고, 우리의 정체성은 성별, 피부색, 외모, 성적지향, 장애, 연령, 학력, 사회적 신분, 출신국가, 출신민족 등 중의 한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듯 보여도 너무나 다르다. 우리는 삶의 맥락에 따라 어느 한 정체성이 도드라지거나 숨겨지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피부색이나 생김새로 구분했을 때, 수많은 이주민들 중 50%이상이 중국이나 일본, 몽골 등으로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로 패싱(passing)되는 존재들이다. 이때 패싱은 또 다른 침묵을 불러온다. 말하지 않으면 이주민임을 숨길 수 있기에, 차별받지 않기 위해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나 존재 자체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사회여야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를 뭉뚱그리며 어느 한 범주에 넣으려고 애쓰지 말고,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달라는 것이다. 호기심의 대상에게 쉽게 다가와 말을 걸며 사적인 질문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이 차별임을 인지해 달라는 것이다.
정혜실(이주민방송MW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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