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첫 핵발전소’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거부해서는 안 될 그 무엇으로, 은근한 또는 직접적인 압박과 공포가 조장되는 가운데 들어선다. 일단 들어선 핵발전소는 오랜 시간에 걸쳐 촘촘하고 치밀하게 지역 사회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덧 그곳에서 핵발전소는 지역사회의 가장 강력한 경제·사회·정치적 조직이자 유일한 권력이 된다. 시청부터 작은 우유 가게에 이르기까지 핵발전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내가 아니면 나의 가족, 나의 친구는 핵발전소의 노동자가 되고, 핵발전소 또는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이들을 고객으로 두게 된다. 이렇게 길들여진 지역 사회는 신규 핵발전소는 물론이고 핵폐기물 처리장과 같은 다른 핵시설마저 손쉽게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체르노빌 사고가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뒤에도 마찬가지다. 이제 사람들은 핵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 경제적 기반이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핵의 귀환’은 반복된다.
이 이야기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핀란드 에우라요키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계 어느 핵발전소 지역이라도 거의 그대로 대입 가능하다. 1968년 첫 핵발전소 부지로 부산 고리(당시 경남 동래군 장안면 고리)가 선정된 후 경주 월성·경북 울진·전남 영광까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4개 핵발전 단지의 부지는 모두 군사독재정권 시절 10년 안에 확정되었다. 주민들은 결정권은 고사하고 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다. 주어진 정보 역시 없었다. 주민들이 들은 것은 ‘전기 만드는 공장이 들어와 지역이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뿐이었다. 방사능의 위험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민주화와 함께 핵폐기장에 대한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기도 하였으나, 종국에는 이미 핵발전소가 있던 경주 월성에 주민투표를 통해 중저준위 핵폐기장이 ‘유치’되었다. 역시 지역지원금을 비롯한 각종 수단이 동원된 핵발전소의 지역 사회 장악 결과다.
한참 후에야 핵발전소의 실질적인 위협들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대개 위험이 현실로 드러나는 시작은 핵발전소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한 채 가장 위험한 일을 처리하는 비정규직/이주노동자다(물론 핵발전소의 최인접 지역 주민일 수도 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주 아프고 결국 암과 백혈병 등에 걸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에 반대하는 것은 지역사회 전체를 상대로 싸우는 것과 비슷하다. 경제적 불이익은 물론이고 집단적인 따돌림과 괴롭힘이 뒤따른다. 결국 반대하는 이에게 남는 선택은 두 가지 중 하나다. 반핵을 포기하든가, 그 지역을 떠나든가. 사실상 지역 사회와 그 구성원들은 찬핵이든 반핵이든 다른 대안, 다른 미래를 그려보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 것이다. 애초의 알 권리, 선택권 부재는 눈덩이처럼 불어 이렇게 거대한 위험에 저항할 권리와 힘의 상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미 사람들이 빼앗긴 권리는 알 권리나 선택의 권리의 수준을 넘어선다. 핵발전소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의 인권은 밑바닥부터 근본적으로 무시되고 훼손된다. ‘핵의 귀환’이 반복되는 한, 계속해서 벌어질 일들이다.
이보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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