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2018년 미투 운동을 통해 소위 ‘문인’들이 저질러온 성폭력이 공론화됐다. 수많은 피해자가 문예 창작을 배우는 학교 또는 학원, 평소 좋아했던 작가가 참여하는 문학 관련 프로그램, 문인 모임, 출판사, SNS 등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가해자들은 스승과 제자, 저자와 애독자, 등단 작가와 작가 지망생, 유명 작가와 출판노동자라는 권력 관계를 남용했다. 성폭력을 은폐하기 위해 “문학을 하려면 탈선해야 한다”, “광인이 위대한 문학을 만든다”라는 궤변으로 피해자들을 세뇌하기도 했다.
<해미를 찾아서>는 성폭력 가해자에게 소설 속 등장인물 ‘해미’로 불리며 대상화됐던 피해자가 자신의 힘으로 글을 쓰며 권력을 깨부수는 ‘해미’로 주체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동시에 성폭력이 공론화된 ‘이후’에 지속되는 싸움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수많은 ‘해미’가 피해 사실을 증언했지만, 가해자의 권력은 여전하다. 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고, 대학은 솜방망이 징계로 사건을 무마하려고 한다. 교수들은 동료인 가해자를 감싸면서 성폭력을 사소한 문제로 여긴다. 학생회는 중립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준다. 대중의 관심은 점점 줄어든다. 미투 운동 이후 반성폭력 운동 현장에서 수없이 마주하고 있는 어려움이다.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피해자와 연대해온 민주는 두 가지 시선을 받는다. 첫 번째는 “선배도 해미예요?”다. 피해 당사자라서 열심히 싸우는 거냐는 시선이다. 두 번째는 “너 나중에 정치해도 될 것 같아.”다. 정치적 목적으로 운동하는 거냐는 시선이다. 마치 피해 당사자가 아니면 진심으로 성폭력 문제해결을 바라거나 피해자와 연대할 수 없다고 의심하는 것 같다. 민주처럼 되묻고 싶다. “네가 보기엔 어떤데?”
‘해미’든 아니든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아홉 번째 해미’가 용기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어온 해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곁에서 ‘해미’를 믿고 힘을 실어주는 연대자들이 있고, 가해자를 규탄하는 탄원서에 서명한 수백 또는 수천의 지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미’에게 시간이 필요할 때 기다려주고 ‘해미’가 돌아올 수 있도록 현장을 지키는 등대가 될 수 있다. 권력이 ‘해미’들을 지우지 못하도록 함께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달라.
앎(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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