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는데, 떠나기만 한다고 더 좋은 절이 나타날까.” 왜 노동조합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김용호 씨는 이렇게 말한다. 독립운동보다 힘들다는 노동운동. 독립운동은 잘 모르지만 SK브로드밴드 설치수리기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인정받는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다.
문제의식을 가진 노동자들 몇몇이 모인다고 해서 노동조합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적은 수의 조합원으로 노동조합을 시작하면 회사의 탄압에 버틸 수 없다. 노동자들은 일정 수가 모일 때까지 조심스럽게 동료들을 설득하고 조직한다.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관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사람들을 만난다. 일정 수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도 걱정이다. 회사가 먼저 회사(어용)노조를 만들어 말 잘 듣는 노동자들을 가입시키면 고생해서 준비한 민주노조는 힘을 가질 수 없다. 노동조합 설립신고도 치밀한 계획과 철저한 보안을 통해 내야 한다. 그렇게 노동조합 설립신고가 끝나면 이제 막 한 고비를 넘겼다. 이제부터는 회사의 탄압에 맞서 노조를 지켜야 한다.
SK브로드밴드 설치수리기사들도 그랬다. 노조 설립을 세상에 알린 날이 2014년 4월 10일. 그로부터 1년을 싸운 후에야 회사와 조인식을 맺고, 노조의 요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떤 날은 관리자의 회유를 뿌리쳐야 했고, 어떤 날은 괴롭힘과 탄압을 견뎌야 했다. 비조합원들의 차가운 눈빛과 싸워야 했고, 가족들의 우려도 설득해야 했다. 언론의 무관심에 실망하기도 하고, ‘노조=빨갱이’라는 눈초리에도 시달렸다. 파업, 고공농성, 노숙농성, 본사점거, 오체투지…. 거리로 나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냈던 1년.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탄압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어야 했다. 이는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사회풍토와 ‘노조=장기투쟁’이라는 공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든 고립이었다.
투쟁이 끝난 후 SK브로드밴드 설치수리기사들은 “노조의 맛을 알았다”고 말한다. “이제 비노조(노동조합 조합원이 아닌 상태)는 못할 것 같다”며, 노동조합 1년을 ‘자존감’을 확인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이는 노동자의 존엄을 지킨 시간이 되었고, 노조가 만든 일터의 변화는 “그나마 좋은 절을 짓고 있다는 자부심”이 되었다. 이 같은 30대 남성 설치수리기사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소감’은, 대형마트의 4~50대 여성노동자, 청소를 하는 5~60대 청소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닮았다. 노동자들이 ‘절을 떠나는 중’이 되기를 거부하고 노동조합을 시작하는 순간, 이 순간은 자존감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시작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SK브로드밴드는 지난 5월 22일, 자회사를 만들어 설치수리기사들을 자회사 정규직으로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진짜 사장이 나와라”라고 외쳤던 노동자들의 외침에 “우리는 사용자가 아니다.”라고 답했던 회사가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새 정부의 일자리정책이 몰고 온 새로운 바람이다. 지금도 비노조와의 차별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이 이번 기회에 ‘진짜 정규직’이라는 경유지에 착륙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보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노동조합의 길, 경유지도 노동자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진호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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