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한 지 10년. 아무리 옳고 정당한 일이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투쟁의 길 위에선 할 말이 많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한다. 그들은 가족들에게도, 함께 투쟁을 버텨 내는 이들에게도 할 말이 없다. 침묵이 그들의 관계를 이어준다. 침묵이 멈추면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뱉어낼 뿐이다. 무표정 속 흔들림은 화면 안에서나 표현될 뿐 현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의 침묵이 아슬아슬한 이유다. ‘장병엔 효자 없다, 그리고 장투엔 동지가 없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 함께 고통을 이겨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다. 3000일이 훌쩍 넘도록 싸움을 이어가는데 그 시간 속에서 서로를 밀어내는 일은 어쩌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창문 하나 없는 먼지구덩이 속 공장에서 그들은 20년, 30년 동안 기타를 만들었다. 사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받았다. 사장은 일 년에 몇 백억씩 이윤을 내는 회장님이 되었지만 먼지구덩이 속 노동자들은 그대로였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들에겐 노동조합이 창문이었다. 먼지구덩이 속 공장에서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고 싶었다. 사람 죽기 딱 좋을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월급을 반 토막난 월급을 받는 불평등을 바꾸자는 것이 그들이 하는 요구의 전부였다. 그 요구는 더 이상 시키는 대로 할 수 없다는 인간선언이기도 했다.
회장이 된 사장은 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창문 하나 없는 그 공장을 폐쇄했다. ‘감히, 은혜도 모르고, 천한 것들이’가 노동자들의 모든 삶이 걸려 있는 일터를 폐쇄한 이유의 전부다. 그리고 10년, ‘은혜도 모르는’ 그들이 해보지 않은 것은 없다. 고공농성, 단식, 원정투쟁, 공장점거농성, 길거리농성, 밴드, 연극, 그리고 영화까지. 복직이나 승리만이 그들이 해보지 못한 유일한 일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곁을 지키던 이들도 떠나고, 마음은 점차 사막처럼 변해갔다. 그 고요하고 외로운 일상을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투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는 가족들에게도, 곁을 지키는 동료들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그들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카혼을 두드리며 비로소 침묵을 벗는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다는 듯,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듯이 말이다. 3000일 넘게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버티고 서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건 그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씨, 네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냐!”
그들의 노래처럼 그들의 인간선언도 아직 진행 중이다.
고동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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