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운전을 하고 가는데 경찰이 차를 세우고 불심검문을 하겠다며 협조해달라는 말을 했다. 그의 말투는 (늘 그래왔겠지만)매뉴얼을 읽는 자동응답기 같았다. 나는 당신이 소속과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무엇 때문에 불심검문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으며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으니 거부하겠다고 했다. 젊은 경찰은 (이런 경험은 처음인 듯한)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법을 잘 알고 있다며 또박또박 자신의 신분과 불심검문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인근에 사건이 있었다는 대답만으로는 왜 내 운전면허증을 보여줘야 하는지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거부하겠다고 밝혔고 거부할 권리가 내게 있음을 경찰로부터 확인받았다. 그런데 경찰은 내가 거부할 권리는 있지만, 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으면 나를 보낼 수가 없다고 한다. 결국, 도로 가장자리로 차를 세우고 경찰과 실랑이를 했지만 똑같은 말만 반복될 뿐이었다. ‘거부할 권리’는 있는데 신분증을 보여줘야만 통행할 수 있다는 것이 ‘권리’인 것일까?
경찰은 범죄예방, 수사 등을 이유로 언제든지 개인의 신분과 정보를 확인하고, 추적하고, 수집할 수 있다. 이런 행위는 경찰의 공무집행이며 안전을 위한 조치이므로 ‘협조’할 것을 요구한다.(‘협조’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뿐만 아니라, 법원의 영장이나 제도적, 사회적 동의를 포함한다) 경찰이 요구하는 ‘협조’는 표현이 협조이나 실제 의미는 ‘거부할 수 없음’ 또는 ‘거부하면 더욱 의심만 받게 됨’이다. ‘네가 떳떳하면 밝히지 못할 것이 없다’는 태도는 경찰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런 논리에 합의해왔고 이는 결국 나의 신분과 개인정보는 내가 ‘범죄자가 아님’을, 내가 ‘위험한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해명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지게 했다. 그리고 신분 밝히기를 거부하는 자, 신분이 불분명한 자는 의심받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고, 의심스러운 사람들로부터 안전을 획득하기 위해 신분을 확인하고 감시하는 제도와 장치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제도와 장치 때문에 우리는 정말 안전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주민등록증제도가 없어지면, CCTV가 없으면,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지 않으면 사회는 범죄의 소굴이 되는 것일까? 신분증 제도와 개인정보 수집은 사회 안전이 유지된다는 시민의 안심 이전에 국민의 일상까지도 통제가 가능하다는 국가권력의 안심이 아닐까?
얼마 전 추락한 무인기와 관련하여 군 당국의 ‘무인기에서 발견된 지문을 국내 등록된 지문과 비교해 봤더니 일치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것이다.’라는 수사결과는 신분등록제도의 위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등록되지 않은 자,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자는 언제든지 안전의 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랑희(인권단체연석회의 공권력감시대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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