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쓰여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지는 표현, 구도, 카메라 스타일 등을 영화 비평에서는 ‘클리셰’라고 지칭한다. 어디서 본 듯한, 판에 박힌 장면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다음 장면을 혹은 영화 전체를 순식간에 예상할 수 있다. 새로운 상상력이 안겨 주는 낯선 불편함보다 지루할지라도 익숙한 패턴이 안겨 주는 안정감을 더 찾기 때문일까. 고정관념을 벗어 던진 영화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관객들 역시 그런 영화를 ‘뻔하다’고 욕할지언정 외면하지 않고 즐긴다. 꼭 영화판에만 클리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널을 뛰듯 바뀌는 입시 정책은 우리에게 묘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어디서 본 듯한 정책이 5년이나 10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형국이다. 너도 나도 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앞장서지만, 제자리 맴돌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변화된 입시 상황에 맞춰 우왕좌왕 진학 지도를 준비하는 학교들, 발 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유포하는 학원들, 내 자식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부모들. 삶도, 우정도, 사랑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사이 부자유와 경쟁에 짓눌린 청소년들은 때로는 어쩔 수 없음에 적응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죽음을 택하며 어떻게든 청춘의 시간을 채워 나간다. 수능을 전후해 대학 배치표 한 장에 인생을 걸어야 하는 진풍경은 언제쯤 사라질까. 나는 ‘선’ 위에 있나, 아래에 있나. 그것이 곧 나라는 사람의 등급을 결정한다. 수시 전형이든, 입학사정관제든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에 등급을 매기고, ‘우등 학생’의 자격을 논할 뿐 무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지 않는다. 보상을 탐하지 않는 선행, 그 자체로 즐거운 여행, 삶을 풍요롭게 하는 취미 생활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상장으로 돌아오든, 점수로 돌아오든, 생활기록부에 남든. 모든 것은 남보다 내가 우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단다.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점수도 없는 가장 보통의 학생들. 그 어떤 것으로도 돋보이지 못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학교생활을 이어 가는 학생들. 주조된 틀에 자신을 맞춰 보려 애쓰지만, 그마저 무색해진 학생들. 스스로 학교를 등진 것인지, 학교로부터 내쳐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학생들…. 이름 없이 스러져 가는 이 무수한 삶은 결국 어디로 흘러갈까. 한국의 학교를 설명할 때, 경쟁과 차별 그리고 절망이란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은 언제쯤 찾아올까. 영화 <영재특별전형>의 주인공 영재는 영재(英才)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가 영재(英才)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뛰어난 성적과 놀라운 스펙이 영재(英才)의 조건이라면, 주인공 영재는 평범한 ‘루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No Test, No Loser!'(시험이 없으면, 패자도 없다!)를 외치며 일제고사와 줄 세우기 입시 정책을 거부했던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기억하자. 그리고 ’루저‘들의 반란을 기획하자. 교육이란 이름의 경쟁 놀이를 거부하고, 함께 섞이고 서로를 이해하며 나를 알아 가는 진짜 교육을 상상하자. 홀로만 특별하지 않기에 모두가 특별할 수 있는 교육. 모든 평범한 영재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응원할 수 있도록 입시 클리셰를 넘어선 낯선 불편함을 흔쾌히 감당하자. 한낱 (인권교육센터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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