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스코츠보로 : 미국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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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난 뒤 남부의 흑인 노예는 해방되고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형식적인 평등만을 얻었을 뿐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차별은 계속되었다. 남부의 흑인들은 수확의 대부분을 소작세로 바쳐야 하는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소작농 생활을 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19세기 말부터 남부에서는 철도, 학교, 기타 공공 공간에서의 인종분리 정책을 공공연히 시행하였다. 또한 까다로운 선거인등록법을 만들어 흑인들의 투표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러한 차별의 근저에는 두 가지 공포심리가 깔려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성(性)적인 것으로, 흑인이 백인여자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따라서 백인 여자를 강간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무고한 흑인이 사형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하나의 공포심은 정치경제적인 것으로, 미국의 노동운동이 성장해갈 무렵 가난한 흑인들과 백인들이 합세하는 기미가 보이자 부유한 백인들은 서둘러 흑인들의 경제력 성장에 대한 공포심리를 자극하여 백인들을 반흑인전선으로 몰아세웠다.

아홉 명의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공산당의 구명운동으로 구제된 스코츠보로 사건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발생하였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1931년은 대공황의 초창기로,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 잘 나타나 있듯이 흑백 가릴 것 없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난 방랑자들이 온 미국을 휩쓸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당시 혼란의 상징이었던 이 방랑자들을 침입자로 간주해 이들에 대한 적대행위가 빈번히 일어났다.

결국 스코츠보로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는데는 4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이 사건으로 흑인과 백인은 처음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하였으며 형식적 평등 아래 감춰져 있던 실질적 인종차별이 드러나 6,70년대 흑인민권운동의 도화선을 묻은 셈이 되었다.

<김민선/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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