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장은 전 인류의 경이로운 성취로 기록될 사건으로 술렁였다. “모든 민족과 모든 국가가 성취해야 할 공동의 기준”으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순간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들의 조직체인 국제 기구가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권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그에 대한 헌신을 다짐한 문서를 만든 것이다. 이 선
언의 등장으로 자국민을 대우하는 문제가 해당 국가만의 관할사항이라고 말할 근거를 설자리를 잃게 되었고 인권의 국제적 보장은 필연적 추세가 되었다. 세계인권선언의 모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반인권적인 전쟁이었다. 약 5천만 명에 이르는 생명을 앗아간 2차대전의 참상과 나치가 저지른 만행은 국내에서 자국민의 인권을 억압하는 국가는 언제든지 전인류의 인권과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이 교훈에 기초하여 45년 창설된 유엔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과 준수”라는 목적과 그 성취를 위한 행동서약을 헌장에 담았다. 유엔은 이 약속을 지키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46년 1월에 열린 제 1차 유엔총회는 기본적인 인권에 관한 문서를 기초하기로 했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하여 유엔인권위원회를 설치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인권의 일반적인 원칙 또는 기준을 담은 ‘선언’과 구체적인 권리와 제한범위를 명시한 ‘조약’ 둘 다를 만들어서 ‘국제인권장전’으로 이름 붙이기로 하고 따로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부터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을 만들어서 회원국의 서명을 받아내는 일에 비해 선언을 만드는 일이 훨씬 쉬워 보였다. 선언은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로 삼아야 할 지침을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속도가 붙은 것은 선언의 채택이었다. 그래서 48년에 선언만이 유엔총회에 제출되어 표결에 부쳐졌고, 결과는 찬성 48, 반대 0, 기권 8이었다. 기권표는 세계인권선언의 의의를 인정하는 속에서도 불충분하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권을 인권으로 명시(제17조)한 점이나 사회권 보장에 대한 권리가 충분치 않다는 점 등이 구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기권표를 낳았다. 이는 선언의 기초 과정에서 가장 뜨거웠던 논쟁 즉, 보편적인 인권이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한정되느냐, 아니면 경제적·사회적 권리도 포함하느냐는 논쟁의 일면을 보여준다. 긴 산고 끝에 탄생한 세계인권선언은 뒤따라 만들어진 국제인권조약들의 뿌리가 되었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권위 있는 문서로, 소위 인권 분야의 헌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인류는 선언이 채택된 12월 10일을 ‘인권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류은숙 / 인권운동사랑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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