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레이션은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들지도 않는다. 1968년 이승복 군의 죽음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삐~’ 소리와 함께 하나하나 열거할 뿐이다.
이승복이 살해당할 당시 현장에 있었을 리 만무한 언론은 이 상황을 마치 자세히 본 듯 재연한다. 이승복의 입이 찢기고,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여의도 광장을 누비는 학도호국단의 일사 분란한 모습, “때려잡자 김일성”을 외치며 혈서를 쓰는 청년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살벌한 구호들이 난무하는 대규모 반공시위, 사살되어 헬기에 매달린 채 날아가는 공비의 시신, 이승복 동상, 이승복 추모제, 이승복 기념 웅변대회… 화면은 1982년 세워진 이승복 기념관을 찾은 전두환을 비추고, 여전히 줄을 잇는 추모인파를 보여준다. 이승복은 세세토록 ‘반공’의 영웅이 되어간다. 그 사이 시원하게 뚫린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정말 잘 사는 나라”가 됐다.
오랜 세월, ‘반공’은 이 사회를 유일하게 지배한 광기였다. 반공에서 승공으로, 승공에서 멸공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이 나라 국민들은 ‘반공을 위한 삶’을 살았다. 영화는 증오에 가득 찬 반공 이데올로기를 위해 한 어린이를 우상으로 만든 시대의 초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오늘’을 말하거나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주 강렬한 데자뷰(deja-vu)를 느끼게 한다. 1968년 ‘반공’은 2014년 ‘종북’으로 부활한다. 이승복 영화와 반공궐기대회는 기득권 언론의 요란한 여론재판으로 대체되었다.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는 ‘탈북자 간첩’으로 재현된다. 대통령은 아버지에서 딸로 바뀌었다. 단도직입적이고 펄펄 끓는 광기는 사그라졌을지 몰라도 적대와 증오, 배제의 논리는 여전하다. ‘종북’이라는 마법에 걸려들면 국회의원도 내란죄인이 된다. 정당도 해산되어야 한다. 그리 판단할 만한 정당한 이유도 없이, 그냥 그렇다고 굳게 믿는 ‘주술’이기 때문에 애당초 소통은 불가능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대는 분명 광기에 가득 찬 반공의 시대다. 그 시대를 역사의 강물로 흘려보냈다, 고 단언하기엔 우리 사회는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내면화 되어 있다. 레드에 대한 과장된 두려움, 부풀려진 걱정. 그로 인한 절대적인 편견.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강박증적인 행태. 사실적인 실체에 대한 정당한 공포가 아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잣대에 의한 불안 증세다. 거기에 갇히는 순간, 이성은 거처할 곳이 없다.
과거에서 자연스레 현재가 그려지는 이 영화는 그래서 유쾌할 수 없다. 이 ‘유쾌할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할 이유가 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다시 기억하자고 하는 것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이유를 대면하고 직면해야할 필연성 때문이다. 과거에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도 볼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다시 떠올리려 하는 것은, 다시는 우리 사회가 그 위험성에 감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광기의 시대를 잊는 것은, 언제고 다시 그 광기의 시대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국민들이 항상 리더의 명령에 따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정에서 헤르만 괴링(나치정권 2인자, 강제수용소 창설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처형 직전 음독자살)이 남긴 말이다. 내가 아는 말 가운데 가장 모욕감을 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 본질의 가장 어두운 측면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깊이 새긴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을 알기도 전에 ‘증오‘부터 배워야 했던 야만의 시대는 단 한번으로 족하지 않은가.
송소연 ((재)진실의힘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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