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은 자신을 표현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이 언론, 기업, 권력의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새 공간을 열 수 있는, ‘전 세계 시민의 무기’가 될 것이라는 그런 믿음이었다. 2010년을 전후로 발생한 “아랍의 봄”은 그러한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추모 촛불집회는 대안 인터넷 언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고, 2008년 미국 광우병 쇠고기 협상 반대 촛불집회에서는 다양한 시민 미디어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인터넷이 권력이 없는 시민들에게만 새로운 권력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은 거대한 정부의 관료 체제에도 새로운 권력을 허락했다. 비록 변화에 대한 대응은 늦었지만 그들이 인터넷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해했을 때, 그 힘은 훨씬 더 막강해졌다. 아랍의 봄에 당황했던 권위주의 체제는 자신들을 한때 위협했던 인터넷을 오히려 통제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인터넷 대량 감시를 드러낸 ‘스노든의 폭로’는 이러한 불법적 감시 행태가 비단 독재 정부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해킹팀이나 감마와 같은, IT 업체들이 만들어 전 세계 정부기관에 공급하는 은밀한 해킹 감시 프로그램은 이미 국제적인 규제가 논의될 정도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지난 2015년, 한국에서도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 업체 해킹팀의 RCS라는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하여 활용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RCS는 감시 대상의 PC나 핸드폰을 악성 프로그램으로 감염시켜 대상자의 위치를 추적한다. 뿐만 아니라 이메일과 SNS 등 인터넷 활용을 감시하고, 핸드폰의 카메라나 마이크를 원격으로 몰래 작동할 수 있는 기능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신기술에 능한 일부 활동가들은 정부의 감시망을 뚫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범죄자들이나 테러리스트 역시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사이버 위협과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인터넷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할 것이다. 그 사이에서 기술을 모르는 대다수의 인터넷 거주민들은 사이버 안전을 위해 정부의 감시를 수용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보안학자 브루스 슈나이어는 이를 “디지털 봉건주의”라고 부른다.
시민들이 기술을 이해하고, 정부의 감시를 피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법과 정책의 차원에서 정부의 무분별한 사이버 감시를 통제할 수 없다면, 슈나이어가 지적했듯 우리는 봉건주의로, 하지만 더욱 촘촘한 감시의 촉수를 갖고 있는 군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일지 모른다.
오병일 (정보인권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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