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수백 개의 메시지가 쌓여 가고 검색 몇 번이면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요즘. 텍스트와 이미지로 알고 있고 그렇게 만나는 것으로도 내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자조할 때쯤 40일간 현장을 돌아보는 순례에 함께 하게 됐다. 문정현 신부의 이야기처럼 촛불의 내용을 채우지 못함으로써 검찰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순례를 준비했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설사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 해도 지금껏 싸워온 사람들은 투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란 걸. 이미 몇 번의 민주 정부가 심지어 ‘촛불혁명’이라며 세워진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권력이 바뀌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을 것이란 걸 여실히 증명하지 않았나.
‘지금 당장 기후정의, 차별을 끊고 평등으로, 일하다 죽지 않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 전쟁 연습 말고 평화 연습’ 이라는 네 가지의 의제를 가지고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자는 것이 순례의 출발이었다. ‘만남’ 자체가 중심에 선 운동이었다. 제주에서 출발해 전국을 돌아보며 매번 2시간 정도 시간을 들여 차분히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세상을 만나는’이라는 봄바람 순례단의 슬로건처럼 순례단은 우리가 다른 세상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곳곳에서 자본과 권력에 맞서 다른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던 깊은 자부심 때문이었다. 자신의 노동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신이 살아온 지역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들이 지키고 싶은 진실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펄럭거리는 노상 천막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싸우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고통이 있는 곳에서 존엄하게 살고자 하는 존재들의 힘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투쟁은 시골의 작은 이야기로 비정규직들의 외로운 싸움으로 다른 성별,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수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축소되어 있다. 하지만 결코 투쟁하는 사람들은 소수가 아니었다.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세상을 말하는 사람들, 그 곁에 선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불평등과 차별은 핍박받는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거대한 이익 앞에 놓인 이 땅에 사는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오늘 하루를 안전하게 깨끗하게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던 이면에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순례 내내 들었던 고민이었다. 하지만 봄바람 프로젝트_여기 우리가 있다 상영회를 통해 이 고민도 서서히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21명의 감독들을 통해 재구성된 이 영화를 접하고 다시 고민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렇게나 많은 세상의 고통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시작된다면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고 익숙한 공간, 주제, 지역을 떠나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다가갈 때, 사람들이 서로 교차할 때 운동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혼자가 아니란 걸. 싸우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란 걸 느낄 때 든든한 마음으로 다른 세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우리가 있다.
딸기(평화바람, 봄바람 순례단)
평화바람 gunsanpeacemuseum.kr
군산과 제주 강정에서 군사기지에 반대하며 평화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군산에서는 평화박물관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의 평화운동의 역사와 현재성을 알리며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을 바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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