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필증’이 없으면 극장 대관이 불가능하다(1996년).”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하면 ‘이적표현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다(1997년).” “영화제가 영화진흥위원회의 추천을 받지 않거나 상영작에 등급분류를 받지 않으면 상영관을 대관하지 못한다(2008년).” “‘시국 관련 시민단체들이 집회장소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시설보호를 하기 위해 청계광장 사용 허가를 취소한다(2009년 13회 인권영화제 개막 2일 전).” “서울광장은 불특정 다수인이 자유로이 오고가는 개방된 공간이므로 영비법상의 상영등급과 관련한 규정을 준수하여야 한다. 청소년 등의 인권보호와 관련한 사항이니 적정하게 처리하셔야 할 것이다. 무등급영화는 법제29조제1호 규정에 의한 예외사항에 해당함을 증거하여야 하며, 12세 이상 등급분류된 영화는 법제29조제3항, 제4항, 제5항 등을 위반하지 아니할 방법을 강구하고 제시하라(2012년).”
인권영화를 함께 볼 상영관이 없어서 주로 대학의 학내 공간을 전전하던 시절, 그리고 ‘등급분류’를 거부해 상영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리상영을 해오던 시절 동안 서울인권영화제가 겪었던 일이다. 이렇듯 ‘사전검열’이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서울인권영화제’와 상영작들에 대한 ‘(사전)검열’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최근 몇 년 동안에도, 2016년 현재까지도 ‘정치적 중립’이라는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적 중립성을 해치는 작품’이므로 상영 취소를 요청한다(2014년).” “인권영화제의 내용이 우리 대학의 설립 이념인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교내 행사 및 장소 사용을 허가할 수 없다(2015년).” “전체적으로 정치성을 띠고 있고 편향성 우려가 있어 공공시설인 서귀포예술의전당 대관은 부적절한 것으로 결정한다(2016년).”
한국 사회에서 영화제가 선정한 작품을 상영하고자 하면 심심치 않게 당면해야 했던 사건들이다. 이는 베이징퀴어영화제 조직위원회가 영화제를 지속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비들과 닮아 있다.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무궁무진하게 세상에 나온다. 굳이 영상물로 남겨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 이미 주류 담론화된 어떤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도 넘쳐난다. 그 틈바구니에서 목소리 낼 수 없었던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는 작품들은 드물게 ‘발견’된다. 애써 내보이고 발견하더라도, 갈 곳도 없다.
이 존재들의 목소리가 어떤 의미로 ‘정치적’인 것이며, 상영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개방된 공간에서 나눌 수 있고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나누지 못해야 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내 경험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정체성과 위치성을 가지고 존재하므로 나의 이야기를,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곧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더욱이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로 요구된다. 더 선명한 ‘관점’을 취하고, 더 분명하게 ‘정치적’이어야 한다.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어떤 위치에서 목소리를 낼 것인가. 그렇기에 ‘여성’, ‘장애인’, ‘퀴어’ 등으로 정체성을 전면에 내건 문화행사들이 존재하는 데에는 충분히 의의가 있다.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들이 단단한 중심들을 향해 모아지고, 구체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 이야기들이 담긴 영화/인권영화는 충분히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권영화에게 표현의 자유는 더욱 중요하다. 희미해지기 쉬운 존재들일수록 표현의 자유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절실하게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권영화는 이러한 존재들의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버릴지도 모를 마음들을 포착해 어떤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로써 그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들을 보태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불러 모을 수도 있다. 인권영화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더 편안하게 생산해낼 수 있도록 하며, 더 풍부해지도록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권운동으로서 인권영화제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권영화제는 그 이야기들이 모인 새로운 이야기의 장이 된다. 그에 더해 더 깊은 사유와 논의들을 이어지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 시간과 공간이 되어주는 영화제는 ‘운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이 ‘운동’으로서의 영화제는 ‘증언’의 기록물을 모은, 또 다른 기록물로서 인권운동의 장에서 돋움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입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1996년 1회 인권영화제가 외치던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은 아직 유효하다.
레고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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